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현대문학 테마 소설집 1
하성란.권여선.윤성희.편혜영.김애란 외 지음 / 강 / 2009년 3월
품절


어느날 갑자기, 유리 문을 에워싸며 들어찬 축대. 아래쪽은 화강암이고 위쪽은 검정 벽돌로 다섯 층을 쌓아서, 이 동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담장과 비슷한 모양새가 된 그 축대 귀퉁이에,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만한 문이 나 있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하나하나 뜯어보면 가치 있어 보이지만 함께 모임으로써 조악해진 물건들 틈에, 그리움에 절어 미라가 된 무엇이 있을 것만 같았다. -32-33쪽

강은...... 아니 강이라고 생각되는 검고 길쭉한 공간은 전혀 흐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흘러가는 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둬, 라고 연선배는 오래전 그녀에게 충고했다. 감정이 흐르는 대로 그냥 흘러가게 놓아두라고, 부질없음을 부질없음으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라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들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 말라고도 했다. -91쪽

햇빛과 바람과 구름과 신록이 실내악처럼 부드럽게 연주되는 날씨. 사치스럽게까지 느껴지는 화창함. 봄이다. 검고 거친 외피를 가졌지만 아카시아는 새로 돋아난 연녹색 둥근 잎들을 무수히 매달고 있다. -167쪽

그는 지사에 근무하면서 자신의 세계가 거대한 선박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노동자들이 제작하는 부품과도 같다는 걸 쉽게 받아들였다. 그러자 더 이상 젊지 않은 게 다행으로 여겨졌다. 젊음이라는 것은 지나온 과거 속에나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한때 그런 시간이 있었을 테지만 발령을 기다리며 인사를 치르고 상사들의 온갖 대소사를 찾아다니는 동안 조금씩 소진되어갔다.-223-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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