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구판절판


자본주의는 각자의 노동을 통해서 살아가고 유지되는 체계입니다. 물론 노동의 대가로 임금이나 보너스가 제공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우리를 노동으로 계속 내몰기 위해 지속적으로 돈을 쓰도록 유혹하는 장치를 함께 고안했습니다. 끊임없이 화폐를 소비하게 하려면 유혹의 장치는 그만큼 강력할 수밖에 없겠지요. 가장 상징적인 그 유혹의 공간이 바로 백화점입니다. -19쪽

도시인들은 자신의 속내를 타인에게 드러내거나 나아가 타인이 자신의 속내를 나에게 털어놓는 것도 피하려고 합니다. 만나는 타인들 모두와 이처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면, 도시인들은 신경과민으로 쉽게 지쳐버리겠지요. 그런데 신경과민을 피하기 위한 이런 거리두기라는 도시인 특유의 삶의 태도가 바로 '자유'라는 감정의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타인에 대한 냉담한 거리두기가 삶의 양식이되어 대도시에서 나와 타인은 서로의 삶에 거의 간섭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한, 다른 이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바로 도시의 암묵적 윤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90쪽

욕구나 욕망은 모두 어떤 결여를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욕구가 단순히 부족함을 총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욕망은 단순한 충족을 뒤로 미루고 여전히 충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욕구보다 좀 더 복잡합니다. 욕망이란 욕구가 기묘하게 뒤틀려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욕망은 동물에게는 없고 오직 인간에게만 있지요. 인간과 달리 동물은 단순한 욕구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144쪽

내가 자유롭듯이 내가 사랑하는 타인 역시 자유롭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나를 사랑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의 힘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선택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사랑해"라고 사랑하는 사람이 내 귓가에 속삭인다고 해도, 나는 역시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것은 나를 위로하기 위한 단순한 거짓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을 꿈꾸면서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타인의 내면, 즉 그의 자유를 엿볼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애인에 대해 항상 불안해합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은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고, 나를 보면서 다른 제3자를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타인의 자유, 곧 타인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요?-197쪽

가라타니 고진은 영화나 소설을 미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문화적 학습 덕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무관심'하게 보는 능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학습되어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흔히 상류계급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하류계급에게 보이는 오만한 태도입니다. 다소 도식적이지만, 자신은 저급한 문화수준에 있지 않다고 자부하며 동시에 다른 계급의 사람들로부터 모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간단히 상류계급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상류계급은 자신이 드라마는 드라마로, 연극은 연극으로 본다고 자신합니다. 그래서 상류계급은 드라마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하류계급 사람들을 비루하거나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그들은 상류계급과 하류계급 사이의 이런 차이는 선천적 차이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합니다. 다시 말해 상류계급 사람들은 자신의 미적 능력이 자신들이 가진 돈과 생활의 여유에서 비롯되었음을 잊고 있습니다. 만약 자신과 같은 물질적 조건을 갖추었다면, 하류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도 자신과 유사한 순수한 미적 관심을 공유했겠지요.-277-278쪽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 같은 감정이 있기에 산업자본의 기호가치가 작동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소비사회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통찰이 중요한 이유도 그가 인간에게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 혹은 허영이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점은 벤야민이나 부르디외의 통찰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구별짓기 욕망에는 다음과 같은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부당하게도 자신의 현재 삶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일종의 피해 의식 말입니다. 또한 이런 피해 의식의 이면에는 모든 인간에게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비판도 함께 깔려 있지요. 그래서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은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한 것입니다. 스스로 그런 소수에 속하고 싶다는 욕망, 다시 말해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은 바로 부르디외가 말한 귀족적 취향에 대한 욕망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333-334쪽

자본주의하에서 돈은 분명히 자유라는 감정에 물질적 기초를 제공합니다. 호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면 자유의 감정, 두려움 없는 당당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원하는 상품을 마음대로 구매할 자유, 즉 이러한 소비의 자유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적절히 생산할 수 있는 '생산의 자유'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생산의 자유'란 결국 자본가 자신이 독점하는 것이지요. -363쪽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사실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 삶이 다른 어떤 시간의 삶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4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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