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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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사랑이 어떻게 오는지
나는 잊었다

노동과 휴식을 바느질하듯 촘촘히 이어붙인 24시간을
내게 남겨진 하루하루를 건조한 직설법으로 살며
꿈꾸는 자의 은유를 사치라 여겼다.
고목에 매달린 늙은 매미의 마지막 울음도
생활에 바쁜 귀는 쓸어담지 못했다 여름이 가도록
무심코 눈에 밟힌 신록이 얼마나 청청한지,
눈을 뜨고도 나는 보지 못했다.
유리병 안에서 허망하게 시드는 꽃들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의식주에 충실한 짐승으로
노래를 잊고 낭만을 지우고
심심한 밤에도 일기를 쓰지 않았다

어느 날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
비스듬히 쳐다볼 때까지 -16쪽

네 맘에 꼭 드는 집은 없단다.
그냥 정 붙이고 살아야지.

-'내집'중에서-22쪽

Love of My Life?


너무 맑아
낚시꾼도 포기하고 돌아서
아무도 놀지 않는 연못.
깊은 물을 두려워 않던......

그는
나의 열린 문으로 들어온
날쌘 물고기.

노를 젓지 않아도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는 기술을 알던
능숙한 바람개비.

어느 겨울 아침, 황금비늘을 자랑하며
그는 떠났다.

그가 휘젓고 다닌 구석구석이
흉터와 무늬가 되어,

그가 일으킨 물결 밑에
꼼짝 않고 얼어붙어
비가 와도 나는 흐르지 못한다.-34-35쪽

어떤 꿈은 나이를 먹지 않고
봄이 오는 창가에 엉겨붙는다
땅 위에서든 바다에서든
그의 옆에서 달리고픈
나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떤 꿈은 멍청해서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지

어떤 꿈은 은밀해서
호주머니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는데

-'사계절의 꿈'중에서-46쪽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 않은 삶.
여기에서 저기로,
이 남자에서 저 여자로 옮기며
나도 모르게 빠져나간 젊음.
후회할 시간도 모자라네

-'여기에서 저기로'중에서-48쪽

신호등을 읽었다면,
멈출 때를 알았다면,
나도 당신들의 행렬에 합류했을지도.....

내게 들어왔던, 내가 버렸던 삶의 여러 패들은
멀리서 보니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지루하지 않은 풍경'중에서-70쪽

어차피 사람들의 평판이란
날씨에 따라 오르내리는 눈금 같은 것.
날씨가 화창하면 아무도 온도계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나쁜 평판'중에서-105쪽

나는 시를 쓴다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혀를 깨무는 아픔 없이
무서운 폭풍을 잠재우려

봄꽃의 향기를 가을에 음미하려
잿더미에서 불씨를 찾으러

저녁놀을 너와 함께 마시기 위해
싱싱한 고기의 피로 더럽혀진 입술을 닦기 위해

젊은날의 지저분한 낙서들을 치우고
깨끗해질 책상서랍을 위해

안전하게 미치기 위해
내 말을 듣지 않는 컴퓨터에 복수하기 위해

치명적인 시간들은 괄호 안에 숨기는 재미에
부끄러움을 감추려, 詩를 저지른다.-112-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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