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최초의 연작소설,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유곤 옮김 / 문학사상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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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동안 그녀는 온종일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은행과 병원 빌딩이 무너져내리고, 상점가가 불길에 휩싸이고, 철도와 고속도로가 끊어져내린 풍경을 그냥 잠자코 노려보고 있었따.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고무라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를 흔들거나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따. 자신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리는지 아닌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아내는 야마가타 지방 출신으로 고무라가 아는 한, 고베 근교에는 친척이나 친지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아침부터 밤중까지 텔레비전 앞은 떠날 줄 몰랐다. 적어도 그가 보고 있는 앞에서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도 않았다. 화장실조차 가지 않았다. 이따끔 리모컨의 버튼을 눌러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는 것 외에는 몸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13-14쪽

신문은 여전히 지진에 대한 기사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는 좌석에 앉아 조간신문을 구석구석까지 읽었다. 사망자 수는 지금도 계속 불어나고 있다. 물과 전기가 많은 지역에서 끊어진 채였고 사람들은 살 집을 잃었다. 비참한 사실이 차례차례 밝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무라의 눈에는 그러한 상세한 모습이 이상하게도 단조롭게 느껴져 깊이가 없는 것으로 비쳐졌다. 모근 울림은 멀고 단조로웠다. 약간만이라도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자꾸만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아내뿐이었다. -22쪽

우리의 마음은 돌이 아닙니다. 돌은 언젠가 무너져내릴지 모릅니다. 모습과 형태를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형태가 없는 것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디까지고 서로 전할 수 있는 겁니다. -112쪽

"지진이라는 건 참 이상한 거예요. 우리는 밟고 있는 땅이 아주 단단하고 움직이지 않는 거라고 전적으로 믿고 있지요. '땅에 발을 붙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돼요. 견고해야 할 땅이나 바위가 마치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져버리잖아요?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어요. 액상화液狀化라고 했던가요? -127쪽

준페이는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돌아와 그대로 일상생활로 되돌아갔다. 텔레비전도 켜지 않았고, 신문도 제대로 펴보지 않았다. 지진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면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아득한 옛날에 땅속에 묻어버린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메아리였다. 대학을 졸업한 이래로 그는 그 도시에 발을 들여놓은 일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에 비쳐진 황폐한 풍경은 그의 마음속 깊이 감추어져 있던 상처의 흔적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그 거대하고 치명적인 재해는 그의 생활 양상을 조용히, 그러나 뿌리부터 변화시켜버린 듯했다. 준페이는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깊은 고독을 느꼈다. 뿌리라고 할 만한 게 없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어디에도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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