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상함은 자기 자신을 온전하고 한결같은 존재로 경험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감정에 상처를 입힙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깊은 불안에 빠지게 되고, 무력감과 실망. 고통. 분오. 경멸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상처받은 마음은 상대로부터 완강히 돌아서서, 복수와 응보를 끊임없이 궁리합니다. -22쪽
마음상함은 극복한다는 것은 어떤 일을 자신과 관련지어보되, 주변 세계의 긍정적인 기호, 즉 ㅇ리의 자존감을 강화시켜주는 기호와 연결시키는 능력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39쪽
수치심과 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언제나 서로 분리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서로 겹치는 면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치심이 죄보다도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죄는 종종 고백이나 후회, 속죄나 보상등의 행위를 통해 해소될 수 있지만, 수치심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 즉 정체감을 건드리므로 어떤 방법으로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소멸 불가능한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한 어떤 일이나 중단한 일에 대해서, 우리는 죄책감을 느낍니다. 반면에 수치심의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 나아가서는 남에게 보여진 우리 자신입니다. 개리 욘테프Gary Yontef는 수치심과 죄를, 그것이 야기하는 결과의 관점에서 이렇게 구별합니다. "죄를 지었을 경우 그 보복은 벌이다. 한편, 수치심에 대한 보복은 버림받는 것이다. 자기에게 소중한 사람이 자기를 외면하는 것에서부터 물리적으로 떠나는 것, 그리고 추방에 이르기까지 이 버림받음은 광범위하다."-65쪽
지금 앓고 있는 상처는 대개 이전의 상처받은 경험, 자존감을 건드린 경험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지요. 말하자면 이런 기억들은 미해결 과제offene Gestalt가 되어, 해결이 되지 않은 채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겁니다. 무의식 안에서 '상처난 부위'로 있다가, 비난이나 퇴짜를 맞든지 버림받거나 무시를 당하면 미처 해결되지 않은 옛날의 상처가 되살아나면서 마음상함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83쪽
누구나 자기가 살아온 내력에 따라 나름대로 여러 가지 미해결 과제를 상처 부위의 배경으로 갖고 있지만, 보통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냅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에 겪은 상처는 어린아이의 건망증, 즉 망각의 영향력 아래 있어서, 의식적 회상을 통해서는 대개 불러낼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망각은 우리를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제대로 낫지 않은 이전의 상처로 인한 부상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상담 치료를 통해 우리는 묵은 상처를 찾아내어 과제를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수록 마음상함에 대한 저항력도 그만큼 커집니다. -85쪽
이제 나의 관심사는 다음의 두 가지 질문으로 모아집니다. 첫째, 마음이 상처를 받은 상황에서 사고와 행동이 유연성을 잃고 막혀버리는 양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둘째, 같은 상황에서 감정이 지나치게 분출하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122쪽
"뚜렷한 의식을 갖고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바탕으로 합당한 행동을 하는 것은, 일종의 자제력의 표현입니다. 순수하고 자유로운 삶의 가장 큰 특징인 통합성 또는 전체성의 직접적 표현이지요" 그런데 심적 타격을 받을 때면 우리는 이 전체성이라는 권위를 전혀 사용하지 못합니다. -127쪽
그러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은 비단 시기와 경쟁심만이 아닙니다. 질투 역시 내면의 평화를 깨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질투심은 고민 거리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정열이다"고 한 철학자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1768~1834, 독일의 신학자. 설교가. 문헌학자. 일반적으로 근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평가된다)의 말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일리가 있습니다. '찾는다'는 말에는 '자기에게 고통을 가져올 것'을 처음부터 목표로 삼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적극적 동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질투심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어떤 것, 남이 나에게 끼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태도에 대한 개인의 선택적 반응입니다. 인용한 슐라이어마허의 말 속에는, 스스로 고통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떠다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는, 다시 말해 고통말고 다른 것을 찾아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함께 숨쉬고 있습니다. -205-206쪽
각자 자신만의 마음상함 거리를 확실히 짚어낼 때까지는, 우리는 똑같은 유형의 상황가 처지에서 끊임없이 거듭하여 상처를 받게 됩니다. 마치 언젠가는 상처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예전의 그 상처받던 상황을 반복하여 상연하는 격이지요. 이러한 마음상함에서 벗어나려면 내사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소화할 수 없는 지침, 자기를 옭죄는 금지 사항 같은 것을 해체하겠다는 목표를 갖고서 말입니다. 유리관이 땅에 떨어져 몸이 흔들리는 바람에 목에 걸렸던 사과 조각이 튀어 나와 백설공주가 다시 살아났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주의 목에 걸려서 공기를 차단하고 있었던 이 사과 조각처럼 우리에게 속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삶을 어렵게 하거나 아예 살아갈 수 없게 하는 원인을 마음에서 떨구어버릴 때, 우리 마음속에는 새 공간이 열리면서 마음상함에 대처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241쪽
그런데 화해에는 나를 다치게 한 사람과의 화해 외에 자기 자신과의 화해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도착'했다는 뜻으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받아들이고 존중함을 의미합니다. 현재 나의 모습이 아닌 것, 안간힘을 써서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닌, 지금 이미 여기 존재하는 나의 모습만이 여기서 말하는 '자기 자신'입니다. "행복은 미래에만 있을 수 있어"하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의 충많ㅁ을 지나쳐버리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이미 넘치도록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제 현재에 떠억 발을 딛고 서겠다는 결심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미래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을 때에만 사람은 마음을 상하게 됩니다. 현재를 충만하게 느끼며 사는 동안에는 마음상함이란 있을 수 없지요 "우리가 행복할 이유는 많고 많습니다." 굳이 마음상함을 겪으면서 불행해질 이유가 있을까요?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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