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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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넓게 말해서 텍스트는 본래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겨났다. 즉, 세계가 텍스트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그런데 어느덧 텍스트는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거짓을 앞세워 자신에 앞서 있던 세계를 희롱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텍스트는 그것 자체로 일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세계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텍스트도 생겨났다. -4쪽

텍스트를 담는 그릇이 있고, 그것을 퍼뜨리는 매체 네트워크가 있다고 할 때,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점은 '그 그릇과 네트워크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운용할 것인가'이다. 이것을 매체를 둘러싼 일종의 권력이라 부를 수 있겠는데, 이렇게 본다면 '매체'는 텍스트의 생산과 유통을 둘러싼 거대한 컨텍스트를 가리키는 말로 다시 규정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컨텍스트가 끊임없이 텍스트 내용 자체와 의사소통을 하면서 텍스트를 제어하기도 하고, 매체가 가진 테크놀러지의 독특한 측면들을 텍스트가 극대화해서 활용하기도 하는 등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36-37쪽

인간의 법을 지키지 않은 자라면 형제라 해도 죽인다는 것, 신의 법을 따른다면 형제는 죽일 수 없는데도 인간의 법에 따라 죽인다는 것, 이것이 로마적 실용성의 사회적 단면인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다. 로마를 보는 우리는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옳음과 옳음의 대립과 같은 상황 때문에 마음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45쪽

로마인들은 행복했다. 자신의 몸을 바쳐 지켜내기만 하면 자신의 불멸성을 보장해주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제국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 거래를 통한 이익이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각인되었다는 것, 이 점이 로마를 지탱한 근본적인 힘이었다. 이러한 로마가 무너졌다는 것은 불멸성 보장체제가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이 붕괴는 한순간에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게 아닌데'라는 의심은 헌신의 감소를 낳고, 헌신의 감소는 또다시 체제의 허약함으로 귀결되고, 그러다가 로마는 무너져 내린 것이다. -52쪽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은 직접적으로 이러한 대단함에서 나왔겠지만, 그 말은 단순히 물리적인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고, 그 길을 따라 로마로 모여드는 물자와 사람, 정보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로마를 '제국'으로 만들어주는 기본 요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로마 가도가 덤불 속으로 사라져갔다는 것은 길에 수레나 사람이 다닐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어떠한 정보도 교환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제국의 붕괴는 우선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다.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는 아무런 교류도 없었고, 라틴어라는 공용어는 잊혀지고 방언의 시대가 되었다. 덤불로 뒤덮인 가도, 마을과 마을 사이의 무성한 숲, 야만족의 끊임없는 침입과 더불어 모든 네트워크가 마비되고 두절된 것이다. -54쪽

텍스트를 수용하는 집단과 텍스트를 담는 매체가 텍스트의 유통과 전파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들임은 이미 앞서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러면 이것을 좀더 다듬어보기로 하자. 거듭 말하지만 텍스트는 외따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것이 널리 열심히 읽히는 것은 텍스트를 생산하고 그것이 전달되는 중간의 여러 절차들과 조직들 전체가 유기적으로 작용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 전체는 크게 세 가지 층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텍스트의 내용이요, 다른 하나는 그 텍스트를 만들어 내고 공유하는 조직이며, 마지막 하나는 그 텍스트를 기록하고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테크놀러지, 즉 좁은 의미의 매체라는 층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서로가 서로를 긴밀하게 제약하면서 성립한다. 이를테면 텍스트를 제작하고 유통시키는 방식은 텍스트 자체에 영향을 끼질 수도 있고 그것을 공유하는 조직의 형태에도 파급력이 있을 수 있는데, 이때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점은 모든 요소들의 그러한 관계들은 순수한 텍스트적인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텍스트의 내용 자체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컨텍스트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이다.-68-69쪽

[백과전서]는 기본적으로 지식을 다시 분류하려고 한다. 지식뿐만 아니라 현상을 분류하는 방식은 원칙상 임의적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 제멋대로 현상을 구분할 수 있으나 이것이 널리 통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권력자는 권력을 통해 정당화하거나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임의적 구분을 통용시킬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면 사물과 지식은 분류 도표로 확립되어 질서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배과전서파는 지식 분류가 가진 이러한 권력구조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통적 질서를 해체하는 전략으로 새로운 지식 분류를 채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백과전서] 편집 작업에 착수했다. -80-81쪽

[파우스트]의 한 구절처럼 '모든 이론은 잿빛'이어서 이론은 현실에 맞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이론적 파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론적 파악의 출발점인 읽기를 그만두어야 하는가?-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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