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들러붙어 있던 이 모든 것들, 그러니까 물건, 약정, 계약, 자동이체, 그리고 이런저런 의무사항들을 털어내면서 나는 이제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나는 쓸데없는 것들을 정말이지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읽지 않는 책들, 보지 않은 DVD들, 듣지 않는 CD들이 너무 많았다. 인터넷 서점에서 습관적으로 사들인 책들이 왜 자기를 읽어주지 않느냐고 일제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런 비난이 두려워 우리는 후회의 순간을 미래로 이월해 버린다. 나중에는 보겠지. 언젠가 들을 날이 있을 거야. 그러나 그런 날은 여간해서 오지 않는다. 새로운 물건들이 계속 도착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순간의 만족을 위해 사들인, '너무 오래 존재하는 것들'과 결별해야겠다고 결심했다.-33쪽
사서 축척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게 왔다가 그대로 가도록 하는 삶, 시냇물이 그러하듯 잠시 머물다 다시 제 길을 찾아 흘러가는 삶. 음악이, 영화가, 소설이, 내게로 와서 잠시 머물다 다시 떠나 가는 삶. 어차피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33쪽
그들에게 비너스란, 즉 아름다움이란 무엇이었을까? 나는 미美란 하나의 거대한 오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미란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음란한 매혹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란 다다를 수 없는 천상의 특질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란 정복함으로써만 소유 가능한 일종의 재산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는 끝내 이해 불가능한 난해한 개념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는 즉각 제거해야 할 불길한 미혹인 것이다. 미는 끝내 정의되지 않은 채 천상의 도시 깊은 곳에서 풍문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183-184쪽
시칠리아는 삼각형의 섬이다. 삼각형의 세 변은 각각 유럽과 그리스와 아프리카를 바라보고 있다. 등을 돌린 세 사람이 각각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섬, 그것이 시칠리아다. 유럽을 바라보고 있는 쪽에 파레르모가 있다. 그리스를 바라보고 있는 쪽은 메시나에서 시라쿠사까지이고 아그리젠토나 젤라는 아프리카를 향하고 있다.-222쪽
그러나 그 신전들은 이제 무너져 기둥 몇 개만 남아 있다. 호텔의 발코니에 앉아 그중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는 콩코르디아 신전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저런 유적들은 왜 우리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는가? 왜 우리는 저런, 반쯤 무너져버린 불완전한 건물들에서마저 미적 쾌감을 얻는 것일까? 왜 유네스크와 이탈리아 정부는 엄청난 세금을 들여 이 유적들을 복원 혹은 보존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왜 아무도 그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것일까? 왜 우리는 어떤 건물들은 거금을 들여서라도 보존하고, 거듭하여 그것을 감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반면, 다른 어떤 건물들은 무가치하다고 여겨 당장 무너뜨려 한줌의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게 마땅하다고 믿게 되는 것일까? 아그리젠토의 신전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들을 불러일으킨다. -276쪽
"맞아.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거야." "가이드북 보니까 이탈리아에 이런 속담이 있대.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댜." "갑자기 뜬금없이 웬 속담?" 아내가 짐짓 딴지를 걸어왔다. "그러니까 여행을 해야 된다는 거야." "결론이 왜 그래?" "결론이 어때서?"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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