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를 쓰는 것은 오직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20쪽, 005 조인화)
첩첩한 산 너머, 중중한 물 건너 무엇이 있으랴만, 이 삶의 오지에서 시 아니면 또 달리 무엇을 구하겠는가. (21쪽, 006 이홍섭)
일고 쓰면서 인생을 버려가는 법만 배울까 두려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마저 즐거웠던 적이 있습니다. (26쪽, 009 김안)
세월이란 것이 겨우 몇 개의 목차로 요약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도 이 책의 대부분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탕진의 그 방대한 여백만이 시의 몸이 되었으니 지금 더듬을 수 없는 것만이 다시 희망이 될 것이다. 시를 써오는 동안, 내가 바란 것이 있다면 더이상 시를 쓰지 않고도, 견딜 수 있는 아름다운 날을 살아보는 것이었다. (30쪽, 013 천서봉)
투명과 불투명의 사이. 명징함과 모호함의 경계쯤에 시를 두고 싶었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개판 같은 세상을 개판이라고 말하지 않은 미적 형식을 얻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말과 문체를 갱신해 또 다른 시적인 것을 찾고자 하였으나 그 소출이 도무지 형편없다. 저 들판은 초록인데, 나는 붉은 눈으로 운다. (38쪽, 020 안도현)
어느 날에는 손바닥에 그려진 실금들 중 하나를 골라 무작정 따라가고 싶었다. 동요하고 싶었다. 가장 가벼운 낱말들만으로 가장 무거운 시를 쓰고 싶었다. 그 반대도 상관없었다. 낱말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을 갖고 싶었다. (중략) 아무것이, 아무것도, 아무것이나.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진, 동요하는 어떤 낱말이. 그러고도 한번 더 동요하는 어떤 마음이. (58쪽,038 오은)
어떤 시간이 와도 시절을 탓하지 않고, 어떤 세상이 와도 공밥은 먹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38쪽, 048 윤제림)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신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고 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묻곤 했다. (79쪽, 052 이문재)
말이 곧 시가 되고 노래가 되는 말이 곧 법이 되고 밥이 되는 때로 돌아가기, 아니 말이 곧 목화가 되고 햇콩이 되는 때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물렁물렁한 말의 혓바닥으로 깨어진 말의 사금파리에 베인 상처 핥아주기 (77쪽, 056 최서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다. (131쪽, 108 심재휘)
시를 통해 눈 하나 더 찾게 될까 (149쪽, 126 정채원)
진실이 다 진짜이거나 진실만은 아니라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위안인가. (중략) 세상이란 현실과는 상관없이 허구와는 다르게 한없이 얼마나 이따금 기껍고도 사랑스러운가. (160-161쪽, 137 채길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다른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 사이가 아득히 멀다. (172쪽, 148 김박은경)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을 피했을 뿐이라고 (중략) 삶은 문제 해결의 과정이고 우리의 선택은 여전히 차선과 차악 사이에서 더 오래 머뭇거리고 있지만. 이 분명한 없음과 분별하기 힘든 있음들 사이에서 (중략) 낫 굿 낫 뱃.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삶은 좋았다가 나빳다가 하는 삶이지만 뜻한 바대로만 되지 않는 삶이라서 이미 읽은 전단지를 한나절 내내 뒤집어 읽는 공터의 바람처럼 필사적이고 간절한 기도가 더 빤하고 평범하기 쉽다. (중략) 내가 겪어보지 못한 아픔에게는 더 버려진 말보다는 흘러듣기 좋은 말이 필요했다. (185-18쪽, 160 이현승)
시를 후회하는 용도로 쓰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다. (중략) 이제는 하다하다 시를 고백하는 용도로 쓰려고 하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지껄이고 후회하고 고백하고 지껄이고 후회하고 고백하는 삶에 시가 끼어들어 자꾸 묻는다. 너 지금 뭐하느냐고. 너 지금 그렇게 사는 게 맞느냐고. 대답할 수 없어 썼다. 실패하는 마음의 한가운데에서 스스로 만든 지옥에 중독된 채로. (198쪽, 171 서효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는 마음이 없으면 필요 없어진다 우리는 마음의 노예까지도 아니다. (204쪽, 177 황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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