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성에 머무룸은 연결의 지향을 품는 것이다. 부대끼더라도 자기인식에 닿아있는 이는, ‘나의 살아남기와 내 아이의 살아남기‘에 갇혀 모든 관계를 대상화하고 소외된 채로의 부산함 속에서 다만 또 하루를 살아내기보가는, 나의 행위가 세계에 미칠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껴안는다. (22-23쪽)
무감함은 시대의 공격성에 상응하는 논리적인 반응이다. 제정신으로 버티려면, 기능을 수행하려면, 성공하려면 무감함이 필요하다. (중략) 존재를 버티어내며 보낸 무감한 하루의 끝에서 다시 무감하게 일상을 살아낼 때, 멀어져 있음의 무감함은 확연하다. (34-35쭉)
모든 사람은 살아감에서 겪는 폭력으로부터 저마다의 방식으로 흔들리고, 감당이 되든 안 되든, 저마다이 방식으로 그 짐을 진다. 고통에는 트라우마를 겪어낼 시간과 그리하여 평온에 이를 시간이 응당 뒤따르는 것이라면 참으로 이상적이겠지만, 한 순간도 가벼워질 수 없는 버거움이라는 것도 있지 않던가. 감당함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무엇을 감당하는지도 다르다. 그러니 네가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이러했어야 한다고, 네가 이르러 마땅한 결론은 이것이었다고, 내가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이제 나는 정신머리를 바꿔놓고 싶지 않으며, 다만 연결되기를 바란다. (53쪽)
이미 세상에 있으므로, 다음 번에 또,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나를 비방하였을 때, 그 사람의 인간됨을 거칠게 단정짓기보다는 그를 다만 불환전하고 다면적인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슬픔과 상실과 바람과 낙담이 교차하는, 그 모든 어긋나버린 순간들을 휘청이며 걸어온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다음번에, 나에게 이런저런 상처를 주었다는 이유로 내게 있어 그 누구보다 가깝고 소중한 사람을 거칠게 평가내리고 싶어지는, 그런 순간에는 어떨까. 그때도 모르는 사람에게처럼 할 수 있을까. 그를 나의 액세서리가 아니라 그의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79쪽)
자기인식에는 어떻게 이를까. 타인이 보는 나라는 불편한 층위, 혹은 남들이 나를 그렇게 보기 때문에 나도 내가 그렇다고 여기는 선, 그 아래를 어떻게 찾아 들어갈까. 나는 무엇을 보여주려 하고 또 무엇을 감추려 하는가. 가기지식과 자기강박은 어떻게 다른가. 자아는 극복해야 하나 북돋워야 하나. 한편으로, 나로부터 소외되어 있지 않음은 타인과의 함양적인 연결을 가능케 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의 마음의 욕구를 소홀히 대함은 타인의 욕구에 대해서도 소홀함을 낳는다. 나로부터의 욕구를 알고 스스로 경계를 정해 그 선을 넘지 않는 것. 그로써 나를 지켜내기가 쉽지는 않다. (88쪽)
타인에게 수용되는지로 내가 규정된다면 나는 타인의 배제에도 내맡겨진다. 그들의 생각에 흔들리고,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더 굳건히 그들 사이에 자리매김하려 애를 태운다. 이러할 때, 닿아 있음의 감각은, 타인의 생각이나 수용이나 자리매김으로는 내가 규정될 수 없음을, 사실 그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님을 환기한다. 타인에게 수용되어야 굳세어지는 확신이라면 그것은 확신이 아니라 허위이다. (92쪽)
나는 누군가의 평가로 규정되지 않는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이곳 지금이다. 연연해하지 않는다. 소리 높여 나누는 인사, 멈춰서는 차 소리, 경적, 아이와 여우와 라디오와 강아지의 외침. 세상의 모든 소리는 살아감이다.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배경음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다가선다. 앞으로 가운데로, 수많은 건물의 수많은 창을 올려다본다. 그곳에 살아감이 있다. 나는 미루어둔다. 내려놓는다. 타인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나뭇가지의 움직임에, 갑자기 차장든 비에, 물결의 무늬에 시선을 둔다.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사람, 잔디밭에 몸을 누인 두 사람, 건널목에서 머리칼을 당기며 노는 셋, 손에 든 짐의 무게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엄마의 굳센 두 다리를 쫓아가는 아이. 그들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그곳에 중요한 것이 있다. 그곳에 아름다움이 있다. (137-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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