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을 구분하는 일종의 기준을 정의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33쪽)
살 만하지 않은 삶은 우리 몸의 삶이나 생명의 조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종의 중단을 겪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자아의 파괴를 수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덜한less"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worse것인데, 왜냐하면 삶이 계속되는데도 삶을 삶으로 만들어주거나 누군가가 그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38쪽)
죽음보다 나쁜 것이 있다면, 삶보다 나은 것도 있고, 살 만한 삶보다 더 좋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45쪽)
주체를 상호주체성으로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의 삶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수많은 삶들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도 살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통되게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고 공통된 삶을 위해서 사회구조에 의존하기 때문이지요. (중략) 따라서 우리가 살 만한 삶의 조건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의 조건에 대해 따져 묻고자 한다면, 삶을 비옥하게 하는 제도적 지원과 인프라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60쪽)
우리 문화는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붙잡힌 삶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 합니다. 이런 대립으로 인한 희생자(죽은 자) 아니면 이 대립을 벗어나서 살아 있는 자 둘 중에 하나만 있기를 바랍니다. (64쪽)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는 백신이 거의 보급되지 않았습니다. 값이 비싸고요.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마치 세계의 이런 지역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장소에서 눈길을 돌리고, 자신을 보존하려는 이 집단적인 "우리‘ 주변에, 문자 그대로의 장벽 혹은 은유적인 장벽을 쌓아서 우리 자신을 보존합니다. 우리는 파괴의 확대에 일조하거나 방조하지 않으면서 이런 파괴로부터 거리를 둘 수 없습니다. 그것은 더 큰 파괴와 상실을 수반하고, 사회적이과 경제적인 불평등을 심화하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 중 누구라도 그러한 근본적 불평등이 확정 또는 편햐오디어 재생산되는 이 세계의 모습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보존하려 하고, 그렇게 보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이들이 외면하는 타인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9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