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는 느린 행위다. 책 읽기는 우리에게 멈춰 서도록 요구한다. 눈과 귀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허겁지겁 처리하는 대신 천천히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중략) 그러므로 책 읽기는 얼마나 비효율적인 행위인가. (중략) 그러나 비효율이 곧 우리가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더 나아가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경청하는 이들은 안다. (28-29쪽)
책에서 책으로, 또 책에서 책으로 통과하는 날에는 내가 책이 되어 사는 것만 같다. (31쪽)
마음에 와닿는 책을 읽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가 된다. 그게 슬픈 책이든 웃긴 책이든 담담한 책이든 신나는 책이든, 나와 주파수가 맞기만 하면 그리고 작가가 충분히 고민했다면 어떤 책이든 위로가 된다. (중략) 그렇게 한 사람에게 위로가 된 책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83쪽)
나는 가끔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에 소비되고 있을 커피나 휴지나 비닐의 양을 상상해 본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온당한 일인지 의심한다. 내가 살아 있는 것, 살아서 뭘 자꾸 쓰고 버리는 것 자체가 해악인 건 아닐까. (131쪽)
사실 모든 책은 다 ‘서바이벌 가이드‘ 내지는 ‘서바이벌 매뉴얼‘인 게 아닐까? 내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관심을 두어야 할 사회문제, 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 같은 것들을 알려 주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한 생존 가이드 말이다. (135쪽)
책 읽는 일을 경청이라고 설명한다. 그건 우리가 평소에 하기가 정말 힘든 일이다. (중략) 반대로 글을 쓰는 일 역시 나에게 집중하고, 질문하고, 답하고, 다시 질문하는 일이다. 책은 저자의 경청과 독자의 경청으로 완성된다. (178-179쪽)
끔찍하지, 삶이란 게. 삶은 너무 끔찍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해야만 하는 일을 말할 수 없게 만들고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만 말할 수 있게 허락한다. 말해야만 하는 일을 말하고 나서 제 삶을 침범당하는 기막힌 사태에 슬퍼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세상과 투쟁해야 하는 사람들. 에세이가 투쟁이 되는 사람들. 자서전이 비명이 되는 사람들. (185쪽)
소설은 결론이 아닌 과정이며 보상이 아닌 성찰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자신의 몸 밖으로 나아감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색칠하며 경험하는 인간이 된다. (중략) 삶이 인간을 받쳐 주기를 멈추어 그가 바닥없는 심연으로 떨어져 갈 때 문학은 그가 아예 지구 속을 통과해 새로운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것은 외면이나 냉소가 아닌 간절한 제의에 가깝다. (중략) 상상력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 다른 삶, 다른 선택지를 그려 보기 위한 조건이다. 허구가 또 하나의 진실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능력은 다른 세계, 다른 삶, 다른 선택지를 내 삶 안에서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다. 무수한 개인의 진실은 문학 속에서 구체화된다. 그것은 사실도 허구도 아닌 진실의 영역이다. 소설의 결말을 향해 급하게 달려간 후에 그래서 이게 나에게 무슨 이득을 주느냐고 묻는 것은 죽음을 향해 급하게 달려간 뒤 그래서 삶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196-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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