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겨울 2022 소설 보다
김채원.성혜령.현호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평점 :
절판


질서는 삶을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는 순서나 차례이니 그러므로 삶에 해가 되는 기억을 가진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기 아니, 질서는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어. (11쪽, 빛 가운데 걷기)

얼마나 미운가. 노인은 생각했다. 어렵게 노력하여 죽은 그 애가 나는 얼마나 싫은가. 그런 것은 무료한 시간을 잘 보내다 갑자기 두 발을 구를 때의 기분처럼 잘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잘 알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21쪽, 빛 가운데 걷기)

지우고 쓰는 일의 반복이 백지 위에서의 걷기일 수도 있겠죠. 저에게 걷기라는 행위는 한 인간의 존재 방식, 살아 있음을 계속해서 감지하고 이어나가는 집요한 움직임과 관계 맺고 있습니다. (38-39쪽, 빛 가운데 걷기 인터뷰)

햇빛이라는 ‘자연‘은 언제나 무구하고, 숨고 싶은 작은 사람에게조차 동일한 빛을 내리쬐니까요. "보이는 것을 보는 일과 보이는 것이 되는 일, 혹은 보일 수 있는 곳에 있는 일"이란 저에게 있어 깨끗하고 환한 ‘빛‘이라는 존재와 따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고 저의 오랜 화두입니다. 인간에게 적으로 여겨지는 무구한 빛. (42쪽, 빛 가운데 걷기 인터뷰)

뭐가 잘 안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말과 행동을 자꾸 반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것 같은데 다른 것. 다른 것 같은데 같은 것. 그런 분간이 어려운 것들을 표현할 때에도 반복이 유용하고, 반복을 통해 발생하는 문장의 주고받음, 일종의 리듬을 경험하는 것이 저에게 의미가 있고, 즐겁기 때문에, 앞으로도 소설을 쓸 때 반복을 많이 해야겠다고 혼자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52쪽, 빛 가운데 걷기 인터뷰)

어떤 부모도 자식을 끝까지 책임을 질 순 없는 거 아냐. 자식이 해야지. 주고받고. 그게 순리 아닌가? 내가 지금 내 자식한테 계속 줄 때는 지났지. 나는 우리 어머니한테 갚을 때고. 그걸 하려고 여기 있는 거고. (67-68쪽, 버섯 농장)

경찰은 부모님의 시체를 찌그러진 자동차 안에서 꺼낼 때 어쩔 수 없이 약간의 훼손이 생겼다고 했다. 기진은 진화와 함께 병원의 시체 안치소로 갔다. 자주 싸우고 그보다 더 자주 서로를 무시하면서 살던 부모님이 같은 날 함께 죽었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느꼈졌다. (78쪽)

두 사람이 단지 경제적 조건 때문에 멀어진 건 아니지만, 그 차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중략) 선을 넘어오는 살마들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86쪽, 버섯 농장 인터뷰)

기진의 부모의 사고사에서 언급되듯, 자신이 초래한 것이 아닌 죽음에마저도 신체의 일부를 훼손당하는 방식으로 ‘삶‘이 수습됩니다. 누군가의 삶에 대한 비의지가 필연적으로 타인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면 역으로 부러 타인을 해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수습하는 알리바이로 삼고자 하는 것이, 진화가 남자의 사체에 손을 댄 까닳이 아닐까 추측해보았어요. (중략) 의지적 훼손은 앞으로 이들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가게 될까요? (90쪽, 버섯 농장 인터뷰)

"보리차, 숭늉, 된장국 따위에서 나는 맛이나 냄새와 같다." 구수함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보리차와 숭늉과 된장국의 공통점은 최후의 음식이라는 것뿐이었다. 훙년이 들어 먹을 게 없을 때,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아플 때. 내 연명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라고 여겨질 때, 그러니까 내가 음식을 먹고서 하루를 더 살아가는 게 이 세계와 주변에 누가 되는 게 거의 확실해졌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할 수 없는 밥상.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낮은 밥상의 맛이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구수한 맛이란 먹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맛. 현실적으로도 구수한 맛은 최후의 맛이다. (104쪽, 연필 샌드위치)

영적인 탯줄은 언제 끊어지는 것일까. 아마도 딸이 엄마가 되는 그 순간일까? 그 순간에 엄마는 자신과 자기 엄마를 이어주던 그 탯줄을 끊고 나와의 결속을 선택한 걸까? 사람의 배꼽이 하나인 이유는 그 때문일까? 나는 어쩌면 할머니와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 엄마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110-111쪽, 연필 샌드위치)

그리고 침대 위헤서 눈을 떴다. 오래된 우울이 느긋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오고 낯선 슬픔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머릿속을 파고드는 이른 오후였다. (중략) 내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나를 잠에서 깨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손을 움켜쥐는 것이다. 헛되이 바삐 움직이는 손가락을 꽉 붙들어 때늦은 자상함과 의미 없는 보살핌이 만들어내는 기만적인 보람을, 비겁한 기쁨을, 지어낸 행복을 깨뜨리는 것이다. 미처 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던 일들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 나를 다시 끌어다놓는 것이다. 글로 씌어진 좋은 이야기들이 내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침대 밑으로 툭툭 떨어진다. 밥상을 차려 온 엄마의 발등을 멍들게 한다. (114-115쪽, 연필 샌드위치)

먹고, 자고, 숨 쉬고,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들에 관한 의심이 생의 전반에 걸쳐 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먹는 게 맞나‘ ‘이런 식으로 숨 쉬는 게 맞나‘를 생각하며 방 한구석에서 겁에 질려 있던 어린이가 삼십대 여성이 되며 나름대로의 "단호한 주장"이랄지 "오랫동안 간직해온 진심"같은 것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요. (117쪽, 연필 샌드위치 인터뷰)

한국 사회에서 삼 대에 걸친 여성들이란 무엇보다도 함께 먹고, 서로를 먹이고, 서로에게 먹히는 존재이기 마련이니까요. 자연히 ‘돌봄‘이라는 주제도 떠오르고요.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건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기도 한데요. 삼 대에 걸친 여성의 관계란 무언가 좋은 것이 하나 그 삼각형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게 당연히 내 몫이 아니라고, 일단 내 몫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관계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121쪽, 연필 샌드위치 인터뷰)

소설에는 다섯 개의 제법 긴 각주가 달려 있습니다. (중략) 이렇게 달린 주석들은 독자에게 ‘쓰는 자‘의 존재를 환기시킵니다. ‘쓰는 자‘는 아무리 거식증으로 고통받으며 얕은 잠 사이에 놓인 꿈과 기억의 공간을 헤매고 있을지라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이 모든 과정을 글로쓰고 주석을 달아둘겄입니다. (중략) 각 이야기마다 그것에 어울리는 형식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찾아내려는 방식들이 있을 텐데, 저는 [연필 샌드위치]를 쓰며 이 소설의 정념이나 일화들이 잘 정돈되지 않고 울퉁불퉁하기를 바랐고 이를 통해 읽는 이가 자신의 정념이나 사건들이 이루는 톱니에 이 소설의 톱니를 일부 맞추어 돌릴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여성들의 이야기, 엄마와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평면적이라고 평가되는 경우가 많기에 어디까지 입체적일 수 있을지 보여주고 싶었고 스스로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23-125쪽, 연필 샌드위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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