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의미의 공간을 넓히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메타포(metaphor)에 기댄다. 메타포란 A 뷴야의 경험을 이용하여 B 분야의 경험을 환히 비추는 방법으로, 언어의 직접적인 전달능력이 부족함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중략) 따라서 인간의 재능에서 변하지 않는 부분, 글쓰기와 독서 행위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원리, 즉 메타포를 위해 사용되는 어휘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고 교훈적이다. (10-14쪽)
보나벤투라, 아우구스티누스, 단테에게 독서란 순례자가 계신된 길을 따라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책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 전까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양심을 찌른다. 거기까지가 책의 역할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대하다고 일컫는 텍스트가 모두 그렇듯, 궁극적 이해는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아무도 모르므로, 그 곳을 묘사할 단어가 없다. (59쪽)
‘인생=여행‘이라는 비유도 오래된 메타포 중 하나다. 독서란 책을 여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독서. 인생. 여행이라는 트리오는 ‘인생=여행‘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서. 인생. 여행은 서로에게서 의미를 차용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 준다. 따라서 독자는 책을 통해 세상을 여행하면서 인생을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단, 인생과 독서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는데, 오르한 파묵은 [조용한 집(Silent House)]이라는 소설에서 그 점을 잘 설명했다. "인생은 재출발을 용납하지 않는다. 정시에 운행되는 열차와 같다. 그러나 책은 다 읽은 후에도 헷갈리거나 당황스러울 때는 언제든 처음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당신은 원한다면 몇 번이고 다시 읽어 이해 못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62쪽)
종이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제2의 책‘이 생겨난다. 제2의 책은 ‘과거. 현재. 미래의 독서‘와 ‘회상과 기대‘로 구성된 마음속의 텍스트이며, 독서를 돕는 여행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반면 전자책은 자유로운 여행 공간이 아니다. 개념상으로만 봐도 현실감이 부족한 가상공간이다. 한마디로 유령 같은 존재여서 전통적인 연상 기능이 부족하다. (71쪽)
전광석화 같은 스크롤과 쓸어 넘기기가 판치는 오늘날, 우리는 천천히, 깊게, 철저히 읽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종이책이 됐든 전자책이 됐든 독서 여행의 목적은 ‘읽은 내용을 알뜰히 챙겨 귀환하는 것‘이다. 그런 독자라야만 진정한 의미의 독자라 할 것이다. (73쪽)
상아탑의 이중적 이미지, 즉 ‘학구적이고 호젓한 안식처(위험이 수반됨)‘와 ‘책임과 행동을 회피하는 은신처(죄책감이 수반됨)‘라는 모순된 이미지는 [햄릭]에서 잘 드러난다. (96쪽)
햄릿이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어서가 아니라 학문적 가르침에 잔뜩 얽매여서다. ‘대학의 교리문답서를 모두 잊고, 현실의 경험에서 다시 배워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108쪽)
그람시는 묻는다. "비판의식 없이 생각하는 것과,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을 의식적. 비판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옳은가?" 이것은 햄릿의 유명한 말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한 것이지만, (중략) 그람시의 이분법은 햄릿에게 두 가지 독특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나는 상아탑이라는 서재에 머물면서 독서의 한계가 소장한 책과 일치하는 독자로 남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열린 공간으로 독서의 범위를 확대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안한 세상책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123쪽)
오늘날 상아탑이라는 독서 장소는 또 하나의 공간을 상징하게 되었으니, 바로 인터넷 서핑 공간이다. 현대사회는 속도와 간결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그 때문에 느리고 강렬하고 사색적인 독서는 비효율적이고 케케묵은 것으로 여긴다. 다양한 종류의 전자책은, 하나의 텍스트를 오래도록 진득하게 음미하는 대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짧게 단편적으로 부지런히 쪼아 먹으라고 부추긴다. (중략) 그러나 사실, 그들은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 무한한 공간의 왕들을 헤아리고 있을 뿐이다. 햄릿이 그랬던 것처럼. (125-126쪽)
이상한 운명에 얽매인 독자가 할 일이라고는, 앞에 놓인 책에 눈을 고정하고 한 페이지씩 정독하는 것밖에 없다. 그건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무기력하고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책벌레는 주변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심지어 자신의 몸조차 종이에 감싸여 있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그 모습이 마치 고치와 비슷해 나중에 나비처럼 자유로워지리라고 상상하기 쉽지만, 그건 착각이다. (130쪽)
독자는 책바보와 책벌레라는 이중의 굴레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을 사랑하는 독자‘는 책바보가 되고 ‘걸신들린 독자‘는 책벌레가 되는데, 둘의 공통점은 ‘책에 사로잡힌 독자‘에 대한 은유라는 것이다. (147쪽)
여행자가 됐든, 상아탑 거주자가 됐든, 책벌레가 됐든, 각각의 메타포에 부여된 의미는 오랫동안 변화되어 왔다. (중략) 우리는 ‘독서하는 피조물‘이다. 단어를 섭취하고, 단어로 이우러져 있으며, 단어가 존재의 수단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단어를 통해 현실을 파악하고, 자아도 확인한다. (167-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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