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여러 해를 거듭하여 계속 이어짐)는 가족 이야기다. '하고 싶은 걸 다하고 살 수는 없다'가 한영진의 삶을 지배한다. 어느 순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 놓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언제나 듣고 싶은 말,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맏이라서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 물건을 팔 때는 자식보다 엄마 본인을 챙겨야 한다고 권하지만, 정작 자신은 거짓말하고 있다. 한영진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한세진 여동생은 본인이 좋아하는 삶을 사는 듯 보이고, 한만수 남동생은 해외에서 자신의 삶을 펼친다고 여긴다. 이순일의 이야기는 보통 엄마들의 이야기이다. 이 집 식구들은 제대로 된 소통을 전혀 못한다. 그러려니 짐작하고 그럴거야로 단정한다. 아무도 확인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말하지 못한 말들이, 묻고 싶은 말들은 한영진을 계속 좌절시킨다. 칠십대의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는 이순일 엄마에게 무슨 말을 묻을까. 영원히 오지 않는 순간을 거짓말로 되뇌이고 있다. 

나 또한 지속적으로 엄마의 말에 뽀족하게 답하는 것은 말하지 못한 게 있어서다. 몇 번이나 입안 가득 물었던 말들을 팔십이 넘은 엄마에게 해서는 뭐하나. 하지만, 한 가지 잘 못한 게 여러 가지 잘 한 일을 이기려 한다. 어쩌면 엄마도 이순일처럼 미안하다고 하면 되지, 그 까이꺼 일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한영진은 입을 다물고 있다. 이순일 또한 금방 사라진 그 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을까. 키워 준 사람들과 친구와 남편과 자식들에게까지. 자신의 문제만 더 크게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이순일은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고 나서는, 한영진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쏟을 준비가 되어 있다.  

가족들은 가깝고도 멀다. 우리 오남매도 각자 기억의 범위와 강도가 많이 다르니, 부모와의 관계가 개인의 삶을 좌우하고 있으니, 가족의 일은, 가족 관계는 연년세세가 맞다.

가족 내에서 각자의 호칭이 아니라 이름을 호명한 부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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