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말들 -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공감하기 위하여 문장 시리즈
김겨울 지음 / 유유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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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박해졌다.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고, 작은 글씨를 무리 없이 볼 수 있고, 좋은 자세로 앉아 있을 수 있고, 활발하게 지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몇십 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hide in plain sight‘라는 영어 표현처럼 늘 같은 자리에 존재했으나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종류의 진실이었다. (27쪽)

글은 쓴 사람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일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전부가 아니며 또한 외면이 아니다. 책은 저자가 아니라 저자가 가진 일부를 뽑아내 차근차근 꿰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두가 허구인 것도 아니다. 그러한 내용은 분명히 그의 안에 존재한다. 혹은 그 내용이 그의 핵심적인 부분일 수도 있다. 책은 탄생하는 순간부터 저자에게서 분리되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동시에 저자의 핵심적인 일부로 존재한다는 아이러니 상태에 처해 있다. (95쪽)

살아가는 일은 몸에 갇히는 일과 다름없다. 몸이 썩어 없어지리라는 확신, 무슨 짓을 해도 늙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 더럽게도 말을 들어 먹지 않는 장기와 근육과 온갖 액체를 무사히 먹이고 재우고 이끌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움직인다. 그것이 그토록 지난한 일인데도 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몸이 곧 인간이며, 몸을 지겨워하는 것이 인간이고, 몸을 뛰어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므로. (123쪽)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탐구하고 수도하고 가르친다는 일이 아직도 이렇게나 남자의 몫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 변하리라는 느슨한 낙관만으로 참고 기다리기에 세상은 이미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하루빨리 더 많은 여성이 철학과 종교에 깊숙이 관여하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철학과 종교는 무너지는 대신 더욱 깊어질 것이다. (125쪽)

우리는 자연을 자원화해 왔고, 인간의 육체노동을 자원화해 왔고, 정신노동을 자워노하해 왔으며, 마침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자원화하기에 이르렀다. 취미와 취향과 신념과 원칙은 이제 상품이 된다. 내가 나라고 믿는 것은 알고리즘의 재료가 된다. (중략) 우리는 상품으로 태어나 상품으로 죽을 것이다. 우리는 지구를 먹어 치우는 거대한 동물인 동시에 낱낱이 파헤쳐지는 거대한 광산이다. 아니, 우리는 낱낱이 파헤쳐지기에 더욱 먹어 치우는 동물이 되어가고 있다. (133쪽)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대신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좀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사회에서 규정한 ‘낭비‘의 개념으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을 그만두기 위해 나를 여러 번 타일러야 했다. 사실은 ‘그럴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는데도 오랫동안 세뇌된 한국 사회의 가치관은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진짜 낭비, 그러니까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고 연습도 하지 않고 공연도 하지 않고 맥주만 마시는 그런 시간 낭비를 하면서, 진은영의 ‘대학시절‘ 같은 시를 읽으면서, 침대에서 구르며 갑갑해했더랬다. (151쪽)

책은 저자의 경청과 독자의 경청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지쳤을지도 모른다. 혹은 너무 바쁠지도 모르고,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기에는. 그래서 ‘영화 결말 포함 줄거리‘와 ‘노래 후렴 모음‘과 ‘소설 줄거리 요약‘의 힘을 빌려 재미를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는지도 모른다. (179쪽)

책이 암호며 퍼즐이며 도랑이며 죽비가 된다는 사실은 늘 놀랍다. 책의 바다에 빠져 어리석게 죽을까 봐 책은 책일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책은 책만이 아니라고 자꾸만 말하고 싶어진다. 삶보다 못한 것을 삶보다 위대하다 여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그래도 (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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