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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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죽으면 저수지에 던진 돌멩이처럼 그냥 사라진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매끄럽게 정상으로 되돌아간다. 그런가 하면 죽고 나서도 오랫동안 주위에 머무는 이들도 있다. (18쪽)

그러니까 내 말은 호프나 나나 하지라는 게 뭔지, 또는 엘패소는 여름에 늘 비가 내린다든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몰랐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별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여름철에는 가끔 북쪽 하늘에서 유성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것도 우리 집 식구들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85쪽)

권태는 어째서 세련된 것일까? 품위 있는 여행자 또는 공연장이나 드나드는 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권태에서 우러나오는 괴로움의 표정이 있다. (105쪽)

로라는 그런 친밀한 행위데 다른 이성을 대하듯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감싸였을 뿐이다. 다시는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나이를 더 먹으면 혹여 순종적으로 반응하더라도 자신이 그 순간을 통제할 것이라고. 누군가에게 압도당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직막이 되리라고 로라는 생각했다. (108-109쪽)

로라가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 앞에 걸터앉았다. 나는 사랑에 빠진 걸까, 엄마? 그녀는 마음 속으로 물었다. 임신하게 될까? 나는 더럽혀진 걸까? 엄마, 나 좀 도와줘. 그러나 로라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134쪽)

세상에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게 있다. 사랑 같은 어려운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장례식도 재미있는 장례식이 있다든가, 불난 집 구경은 재미있다든가 하는 어색한 말이 그런 것이다. (141쪽)

나는 식당 문 앞으로 갔고 어머니는 나를 보고 놀란 듯하더니 마치 내가 그곳에 없는 사람인 양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다. 자기가 보고 싶지 않은 건 보지 않으면서도 사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본다. (147쪽)

미국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 하나를 꼽자면 바로 창문이다. 사람들이 창문 커튼을 열어 젖혀두기 때문이다. (149쪽)

나는 나이 든 기분이 들었다. 어른이 된 느낌이 아니라 지금 느끼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데 이제는 너무 늦은 느낌. 뉴멕시코의 공기는 청량하고 차가웠다.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다. (157쪽)

‘데자뷔‘의 반대말이 있을까? 미래가 송두리째 번개처럼 눈앞에 스치는 것을 본다는 뜻을 가진 단어가 있을까? 내가 본 것은...... 나는 앨버커키 내셔널 은행에서 계속 일하고, 버니는 박사학위까지 받고도 계속해서 형편없는 그림을 그리거나 뭔지 모를 도기나 구우면서 언젠가는 종신재직권을 얻고, 딸을 둘 낳고, 그러면 하나는 치과의사가 되고 하나는 코카인 중독자가 되는 미래. 아, 물론 내가 그런 미래를 다 보았다는 건 아니다. 사실 내가 본 미래는 고된 삶이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르고, 버니는 제자와 눈이 맞아 나를 버리고, 나는 큰 충격을 받고 휘청거리다 복학해서 졸업하고, 그러다 보면 쉰이 다 되어 비로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할지 모를, 하지만 그걸 즐기기에는 이미 지쳐 있을 그런 삶. (160-161쪽)

마리아를 보면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아내의 역할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거나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 같았다. 그녀가 그렇게 말이 없는 단 하나의 이유는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165쪽)

저 사람들 좀 봐. 저렇게 걸어다니고, 차 안에 앉아 있고, 꽃을 가져오는 저 사람들. 저들도 모두 과거 언젠가 잉태되어 나왔겠지. 모두 하나하나 두 사람이 결합해서 세상에 태어난 거잖아. 태어난다는 것. 우리는 어째서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죽어가는 이야기, 태어나는 이야기 말이야. (169쪽)

놓쳐버린 기회. 한 마디 말, 몸짓 하나로 인생이 바뀔 수 있다. 모든 걸 망칠 수도, 모든 걸 회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도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몸짓을 보이지 않았다. (172쪽)

그러나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인 마야는 좋은 아내가 된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커피를 가져다줄 때는 커피잔의 뜨거운 몸통을 잡고 손잡이 쪽을 그에게 돌려서 건네주는 것 정도만 할 줄 알았다. (179쪽)

벤자민은 내게 말이 없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의식이 확고한 상냥한 사람이었다. 리사에게는 자애로운 태도와 강한 인내심을 보였다. 단 그녀가 무언가를 과장해서 말하면 (자주 그러지만) 그건 거짓말에 가깝다고 말할 때 외에는. 그는 절대로 과거시제나 미래시제로 말하지 않았다. (209쪽)

사람들은 이따금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때가 무엇무엇의 시작이었다,라거나 그때, 또는 그 전에, 또는 그 후에 우리는 행복했지,라고 한다. 또는 어마어마한 때가 오면, 또는 일단 나에게 무엇무엇만 있으면, 또는 우리가 어떠어떠하다면 내가 행복할 텐데,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218쪽)

찌는 듯이 더운 오후. 마야는 해먹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아냐, 모든 게 잘되지 않을거야. 마야는 생각했다. 그녀에게 그 두렵고 황량한 기분은 익숙한 것이었다. (259쪽)

케이시는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우리의 삶 속으로 다시 들어왔다. 우리 집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대개는, 나와 애인관계를 가지지 않았지만 우리와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아이들과 오리 연못을 팠다. 그는 내가 서재에 들어가 있는 동안 아이들을 돌봤다. (269쪽)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용기? 난 내가 인식한 것조차 오 분 이상 붙들고 있지 못하는데 무슨. 픽업트럭을 타고 달릴 때 듣는 라디오 음악처럼. 질주하며 듣는 음악. 웨일런 제닝스, 스티비 원더...... 그러다 가축 출입 방지용 도랑에 처박힌다. 쿵!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텍사스주 클린트에서 온 목사다. 당신의 웃음소리는 쓰레기요. 웃음소리만? 인생은 어떻고? (304쪽)

어렸을 때 나는 잠이 오는 순간을 알아차리려고 시도해보곤 했다. 하지만 가만히 누워 기다리다 눈을 뜨면 번번히 아침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가끔 시도해보았다. 간혹 사람들에게 그런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318쪽)

우리 아들들이 보고 싶었다. 브루노와 부모님 생각에 슬펐다. 그들이 그리워 슬프지 않고 정말 그립지 않아 슬펐다. 내가 죽어도 그러리라. 죽음은 산산히 부서지는 수은과 같다. 수은 방울처럼 낱낱이 흐르다 하나로 합쳐 다시 바르르 떠는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나는 기운을 내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너무 오래 혼자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지난날을 뒤돌아보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실로 아름다움과 사랑이 가득했던 지난날. 눈에 띄지 않는 구경꾼으로 루브르 미술관을 돌아다니듯 나는 지난날도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았다. (328쪽)

여행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살아온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직선적 시간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행위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과 사건은 소설처럼 우화가 되고 불멸성을 얻는다.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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