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글로 잡아내고 다시금 글을 가지고 생각을 거듭하는 철학이고 보면, 알파벳을 소중히 여기는 철학의 속내를 알 만하다. 생각을 그림처럼 잡아둔 글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생명력으로 영원이라는 환상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25쪽)
진리란 언제나 단 하나이며, 말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진리라면 이는 곤란하다. 더욱이 진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 뿐이다. (51쪽)
일상의 익숙함에 젖은 인간은 동굴에 갇힌 사람과 마찬가지다. 단지 진리의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 진리 그 자체는 보지 못한다. (중략) 한마디로 정신의 세계로 올라가 맑은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54쪽)
십자가와 더불어 다른 세상이 있을 가능성이 등장했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천국의 정치를 펼쳤다. 주기도문을 외우며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소서!"라고 거듭 간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는 유토피아의 차원이 담겨 있다. 플라톤에서 정신의 세계가 인간은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빛이었다면, 십자가는 하늘과 땅이라는 두 영역이 언제나 동시에 현존한다고 이야기한다. 하늘과 땅이 우리를 이루는 두 부분이며, 우리의 이중적인 본성이라고 말이다. (83-84쪽)
그때까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부여받는 것으로 여겼다면("귀족 혈통주의), 시토 수도회의 노동 질서는 인간이 자신의 지위를 손수 일궈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귀족의 특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실제적이고 입증 가능한 업적이 결정적이었던 셈이다. 이로써 시토 수도회는 중세 사회가 성직자와 기사, 농부로 구분 해놓은 굳어진 신분 질서를 극복했으며, 그 자리에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질서를 놓았다. (95-96쪽)
모든 권력을 제후라는 중심에 집중시키면서도 겉으로는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대의로 삼는 정치체제를 꾸리려는 논으가 일어난 것이다. (중략) 정치적으로 볼 때, 중심 중시 관점이란 곧 권력의 언어이자 대의제 정권을 뜻한다. (127쪽)
개인은 혈연과 전통이라는 속박을 끊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그림처럼 바라볼 수 있는 사색의 자유에 이르러야 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런 자유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문화의 저 깊숙한 내면에서 도도히 흐르던 원류가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힘으로 터져 나올 때, 비로소 자유는 고개를 들었다. (137쪽)
제후라고 해서 위에서 말한 좋은 성격을 모두 지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진 듯이 보이게 만드는 일은 꼭 필요하다. 청치는 일종의 속이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152쪽)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통찰을 가로막는 모든 것은 유치한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우리의 상상이 빚어놓은 것이기에 혹시 잘못은 없는지 살펴보는 비판 정신은 반드시 필요하다. (180-181쪽)
즉,인간이 각 개인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따를 때 결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공동의 부를 키우는 결과를 낳도록 유도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이다. 탐욕과 이기심이 공동의 복리를 향상시킨다는 이 놀라운 변신이야말로 경제학을 탄생시킨 야합이다. 이로써 경제학은 죄책감과 속죄같은 까다로운 도덕의 문제를 철저하게 외면할 수 있었다. (186-187쪽)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품은 시리즈로 생산되며, 얼마든지 복사할 수 있다. 다만 우리의 눈길과 감각은 기회되거나 복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의 주목이나 관심을 귀한 재화로 이해한다면 많은 일이 쉽게 분석되거나 설명될 수 있다.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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