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는다. 하나님을 믿고 이해하고 깨닫는 근원적인 출처가 바로 신구약성경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의 계시인 이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어떤 행동이나 적용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20-21쪽)
해석은 개인의 작업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개인이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해석은 반드시 공동체적이어야 하며, 우리 해석의 타당성 역시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진리 주장은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확인되고 검증되는 것이다. 그러니 개별 본문들에 귀 기울이며 충실히 다루어 가되, 우리의 해석이 타당한지 공동체 안에서 나누고 검토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다. (64쪽)
구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신약을 구약의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한다는 실천적인 함의를 지닌다. 구약은 사라진 시기의 말씀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한결같은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구약을 신중하게 고려할 때, 구약은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적 차원을 항상 명심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지극히 사사롭고 개인적인 차원으로 축소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가 드러내고 있는 문제의 본질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07쪽)
불의한 세상을 향한 예언자의 비판은 온데간데없이 언제나 자신의 마음속만 들여다보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독재 권력과 부패한 권력에게 최상의 종교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교회가 늘어갈수록, 이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잘못되고 불의한 구조보다는 내면의 평화, 내면의 변화, 내 안에 있는 죄의 문제에만 집중하게 될 것이다. (중략) 그러니 이렇게 개인주의적이고 사적인 성경해석은 어느 시대든 절대 권력이나 부패한 권력의 환영을 받고 막대한 후원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한 사례들을 이미 우리나라 개신교 역사 곳곳마다 볼 수 있다. (117쪽)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이 두 가지를 합쳐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신구약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읽는다는 의미며, 신약의 모든 본문이 구약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139쪽)
논리적으로 당연하게, 이후 이스라엘의 존재는 정의와 공의의 삶으로 대표된다. 다윗의 나라는 정의와 공의의 나라고(삼하 8:15), 솔로몬의 통치 역시 정의와 공의의 통치로 알려졌으며(왕상 10:9), 이스라엘에서 새로 등극하는 왕들에게 하나님이 정의와 공의를 부어주시기를 기도했다(시 72:1). 정의와 공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걲는 것‘(시 72:4),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는 것‘(사 1:17),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는 것‘(렘 7:6),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는 것‘(렘 22:3)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풍성한 제사를 드릴지언정 이러한 정의와 공의의삶에 대한 요구는 도외시했다.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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