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배우다 - 아르스 모리엔디
랍 몰 지음, 이지혜 옮김 / IVP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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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인생의 처음이나 끝이나 똑같이 신성하다. 임신부의 편의 때문이든, 노인 환자의 치료비를 더 이상 대고 싶어 하지 않는 보험회사의 경제적 이익 때문이든, 생명을 업신여기는 행위는 똑같이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생명의 가치를 평가하는 일은 태아의 경우와는 다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이라면, 생명 그 자체만으로 판단하는 편이 이치에 맞는다. 태아의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는 태아를 만드신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에 깃든 소망을 포기하며, 자신의 창조물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충만한 인생을 살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신성한 생명을 지키겠다는 노력은 불필요하다. 생명이 신성하기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의술을 총동원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이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잘 죽는 법을 가르치고 훈련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49쪽)

우리의 믿음은 이 세상에서 그 결과가 드러난다. 이웃이나 직장 동료, 가족과의 관계나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돌보는 데서 믿음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 믿음을 드러내야 할 중요한 영역이 있다면, 바로 죽음을 실천하는 방식일 것이다. (71쪽)

루터는 임종 현장이 악의 세력과 싸우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는 장소라고 말한다. 임종은 이 세상 문제에서 내세의 문제로 우리의 관심을 옮기는 영적 과정이다. 임종은 그리스도인의 인생에서 격변의 사건이 아니라 그 정점이다. (86쪽)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심오한 영적 시간이 될 수 있는 반면 죽음을 기다리는 과정은 죽음이 정말로 닥치기 오래전부터 영적 회복을 가져다준다. 실제로 하나님이 불치볍을 통해 사람들을 회복하신다고 믿는다면, 그 병은 그 사람의 평소 교제권을 벗어난 수많은 사람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런 사실은 하나님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의 인생에도 새로운 의미와 소망을 주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113쪽)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죽음을 앞둔 사람과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온 가족이 한데 모일 수 있고, 아무리 애써 피하려 해도 우리 모두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되새길 좋은 기회가 된다. 또 결국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죽음을 맞도록 도울 수 있다. 그러면 우리의 애도도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148쪽)

제대로 슬퍼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충분히 시간을 들여 슬퍼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친한 친구 사이, 이렇게 한데 엮인 두 인생의 매듭을 풀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애도 과정은 그 관계의 깊이를 인정하는 시간이다. (189쪽)

죽음으로 인한 유혹과 각종 문제에 맞설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좋은 인생을 사는 데서 나온다. 노화와 약화, 임종에 따른 어려움은 인생의 마지막에만 찾아오는 문제의 결과가 아니다. 잘 죽는 데 필요한 가치들과 인생에 대한 접근법은 잘 사는 데에도 필요하다. (207쪽)

죽음이 기술인 까닭은 하나님이 죽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분 손에서만 추하고 끔찍한 것이 아름답고 목적 있는 것으로 변할 수 있다. 결국 죽음은 부활만큼이나 신비로운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세례의 물을 통해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연습하고 다른 이들이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의 손을 찾는 과정을 보살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250-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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