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의 구조대 민음의 시 258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베리아에서 길을 잃고 사경을 헤매다가 구조된 조난자들은 거개가 참의 희생으로 목숨을 부지했다는데, 참이 이렇듯 잘 알려지지 않고 이 변변치 않은 사람의 글에 의해서 널리 알려지는 까닭은, 인간에게 수치심이 있기 때문이다. 목숨을 부지한 조난자는 차마 동료를 죽이고 그 덕분에 살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기를 꺼린다. (14쪽)

사랑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
사랑은 자신을 더욱 잘 사랑하는 것 (25쪽)

당신이 곁에 있어도 나는
당신보다 더 깊은
곳으로 가고 싶다. (33쪽)

우리가 사는 현대
그 잘난 현대가 행방불명이다
죽었다는 신이 자꾸 새로 생겨나
구조대가 찾지 못하는 것은 현대다
소리 없는 경광등이 눈발을 뒤집어쓴다 (43쪽)

오랫동안 말씀을 찬양했던 노래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말씀을 따라 읽은 사랑 공의 자비가 자신의 귀까지 와서는 항상 다르게 들리는 것에 절망했다. 그는 손바닥을 펼쳐 입과 귀 사이의 거리를 재어 봤다. 귀와 입 사이의 거리는 겨우 한 뼘도 되지 않았지만, 입과 귀보다 더 먼 것은 세상에 없었다. (56쪽)

잠을 재우지 않고 알만 낳게 하려고 형광등을 줄지어 빼곡하게 켜 놓은 양계장의 좁다란 닭장 속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서 있어야 하는 닭들은 자기가 뭐 하는 놈인지 진짜 모른다. (64쪽)

아침에 너를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눈을 떴을 때 너를 볼 수 있다면
아침에 너를 볼 수 있다면
일어나서 사과를 한입 깨물듯이
너를 아침에 놀 수 있다면

독자 여러분
너와 나는 남자와 여자가 아닙니다 (100-101쪽)

돈을 받고 등단을 시켜 주는 문예지와 돈으로 작가가 되려는 이들을 욕하지 맙시다.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우려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럼에도 저희는 한국 문학의 발전을 위해 이들을 가혹하게 비판하고 싶습니다. 작가라는 명예스러운 호칭을 고작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니요? 저희는 그런 구태를 강력히 거부합니다. 저희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가 되려는 분들의 장기를 원합니다. 저희는 흔들림 없는 문학 혼으로 어떤 고통도 감내하시겠다는 분들하고만 거래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문학은 돈 놓고 벼슬 사기가 아닙니다. 문학은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로 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당신의 심장, 폐, 간, 위, 쓸개, 신장, 비장을 내어놓으십시오. (10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