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스미는 - 영미 작가들이 펼치는 산문의 향연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외 지음, 강경이.박지홍 엮음, 강경이 옮김 / 봄날의책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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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25면의 산문 32편이 실렸으니 글의 내용도, 색깔도 다양하다. 어떤 글은 유쾌하고 어떤 글은 뻔뻔하고 어떤 글은 아프다. 책을 엮어놓고 보니 힐레어 벨록이 말한 구불구불한 길을 보는 듯하다. 벨록의 표현을 빌자면 "구불구불한 길은 사람을 결코 지치게 하지 않는다. 길마다 성격이 있고 영혼이 있다. 이 길에서 저 길로 걸어다니다 보면 많은 사람과 함께 여행하거나 여러 친구와 어울리는 기분이 든다." (8쪽)

폐허와 참담함. 어쩌면 내가 될 수 있었던 것과 어쪄면 내가 할 수 있었던 것들. 그러나 놓쳐버리고 낭비해버리고 다 써버리고 땅진하고 되찾을 수 없는 것들.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 텐데. 그걸 절제할 수 있었을 텐데. 소심했던 그때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결솔했던 그때 신중할 수 있었을 텐테. 그녀에세 그렇게 상처 줄 필요가 없었는데. 그에게 그렇게 말할 필요도. 부서트릴 수 없는 것을 부서트리려고 기를 쓰느라 내 자신이 부서질 필요도. (29-30쪽)

사슴때가 늑대에게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것처럼 산도 사슴 떼에게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산이 느꼈던 공포가 더 정당한지 모른다. 늑대가 쓰러뜨린 사슴 한 마리는 2-3년 사이에 다른 사슴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사슴 떼가 너무 많아져 허물어진 산은 수십 년이 흘러도 복원되지 않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도 마찬가지다. 목장에서 늑대를 소탕한 소치기는 이제 목장 규모에 맞게 소 떼를 솎아내는 늑대의 일을 자신이 떠맡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산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모래폭풍이 일어나는 척박한 곳이 되었고 우리의 강물은 미래를 바다로 쓸어가고 있다. (104-105쪽)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힘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각하고 비밀스런 문제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흑인에게는 삶의 사소한 문제들이 말하기 힘든 것이 된다. 그 사소한 문제에 자기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별의 관계를 표현하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지만 빵 한 덩이를 얻는 데 온 정신이 팔려 있는 사람에게 그 빵 한 덩이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중요한 법이다.) (180쪽)

걷는 여인이 붙든 것은 꾸미지 않은 것이다. 이를테면 특정 직업이 좋다는 편견으로 치장하지도 가장하지도 않은 것이다. 사랑,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이리저리 재지 않고 영원한 약속이 아니라고 밀어내지 않기. 그리고 아이는 어떻게 가지든 좋다,고 자연과 걷는 여인은 말한다. 그것을 붙들라고, 너무 많은 겉치레가 적절히 어울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고. 그러면 사건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적어도 우리 중 하나는 틀렸는지 모른다. 일하고 사랑하고 아이를 낳는 것. 무척 쉽게 들린다. 하지만 우리 삶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을 많이도 만들어낸다.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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