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푸른 저녁 - <입 속의 검은 잎> 발간 30주년 기념 젊은 시인 88 트리뷰트 시집
강성은 외 87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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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젊음‘의 기준은 기계적일 수 없겠으나 2000년 이후 등단자들을 기준으로 삼았다. (중략) 여기는 애도의 자리가 아니라 기형도의 이름으로 연결된 찬란한 우정의 공간이다. (중략) 이렇게 해서 다시 수많은 기형도가 우리에게 도래했다. (11쪽)

집이 있으면 좋겠다,
봄날이 가고 다시 오지 않더라도 대물림되는 불행과 무능의 서정 따위 빈병처럼 팔아먹게,
집이 있으면 아이와 아이 엄마와 함께 누워 입을 다문 가수의 옛노래를 이어 부르다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처럼 잠들겠지,

-‘빈집‘ 중에서 (25쪽)

포도밭에 갔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흙 위에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단단한 땅을 더 단단하게 밟고 있었다. 적막을 닮은 훍일까. 흙을 닮은 적막일까. 한 가지로 전부를 생각하는 버룻. 작은 알맹이로 변해버린 적막을. 입 안에 넣고 껍질을 뱉고 있었다. 한 알씩, 한 알씩. 까마득해지고 있었다. 입에서 시고 떫은맛이 났다. 뱉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 끝나지 않았다.

-‘거버링‘ 중에서 (94쪽)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중에서 (128쪽)

언덕은 어디 안 가고 거기 있었다. 한번 언덕이 되면 언덕은 멈출 수 없다. 가다가 멈춘 언덕이라면 언덕은 다 온 것이라고. 잠깐 딴 생각을 하다가 언덕을 잊어버린 언덕처럼 앉아 있으면

네가 지나갔다.

-‘과거‘ 중에서 (153쪽)

그 거리를 떠나
나 여기까지 왔네, 텅 빈 가방 같은 청춘 들고서
터널 속으로 불던 바람 멈추고
안개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슬픈 포즈를 취하고
아직도 가끔 그가 내 머리 속에서 중얼거린다
그곳이 심장인 줄 잘못 알고서

문이 닫히고 움직이는 유리창 너머

어떤 문장은 지나가고
어떤 문장은 남아있다
역으로 내려가는 확고한 계단들처럼
열차가 오면 우리가 급히 일어나는 기다란 벤치들처럼
심장 위의 젖은 발자국들, 검은 종이 위 잔설처럼

내 슬픔 이제 서른 살이 되었네

-‘지하철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에서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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