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 김서령이 남긴 조선 엄마의 레시피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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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속성이 있다. 다 잊은 줄 알았던 옛 부엌의 아침과 저녁들이 앞다퉈 떠오른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아이를 많이 낳아 부엌에서 제대로 된 방식, 우리 엄마말로는 ‘조백을 갖춘‘, 범절 있는 음식을 푸지게 만들어 먹이는 엄마가 되고 싶다. 내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부엌일에 동참시켜 장장근이 발달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혀와 눈과 코와 귀가 탁월한 기능을 갖도록, 강제가 아니라 즐거운 방식으로 단련해, 세상 온갖 미감을 만끽하는 인간으로 키우고 싶다. (29-30쪽)

그러려면 그 교육 장소는 부엌 이상 가는 곳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고추를 손바닥으로 비벼보고 냄새 맡고 마늘을 까고 깧고 오이를 문지르고 가지와 파를 결대로 찢고 늙은 호박 껍질을 닳은 숟가락으로 벗기고 양파와 토마토의 단면을 정신없이 들여다 보며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맵고 짜고 다록 쓰고 신맛을 혀끝에 올려놓고 전율할 때 인간은 우주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기심과 탐욕과 분노와 공포 같은 걸로 흐려진 인간성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선하고 고운 그 무엇, 썩은 감자 속에서 길어 올리는 매끄러운 녹말 같은 그 무엇, 어쩌면 인이거나 사랑이거나 자비라도 불러도 좋을 그 무엇, 바로 그것을 대면할 수 있는 가장 가깝고 너그러운 장소가 저 산꼭대기 선방이나 성균관의 명륜당이 아니라 부엌이라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 (30쪽)

현재가 아닌 오래고 먼 시간, 이 부엌에서 지은 밥을 먹고살던 조상들이 줄줄이 뒷산으로 돌아가 묻혔던 시간, 일 년에 한 번씩 생전에 먹던 그 밥을 먹으러 뒷산에서 사당을 거쳐 제상 위에 올라가 슬그머니 앉던 시간, 내가 다시 그리로 돌아가 누을 먼먼 미래의 시간, 지금 내가 보는 풍경 안에 그것들이 서로 겹쳐지고 있는 것을 나는 느낀다. (47쪽)

냉동실 문 앞에 하염없이 서 있다. 허쁘다는 말은 기쁘다와 슬프다와 고프다와 아프다를 다 녹여 비벼놓은 말이다. 삶이 ‘삶은 나물‘보다 못할 리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다 사라져버렸을 리야. 냉동실 문을 잡고 삶과 죽음의 어처구니없음을 생각하는 날, 민들레 꽃씨를 휭휭 나록 뭔 새는 줄곧 쪼롱쪼롱 울고 줄에 넌 빨래는 바람에 화르륵 화르륵 뒤집힌다. 나는 오늘 저 시래기를 녹여 멸치를 대가리 채 솰솰 부숴 넣고 시래기국을 한 솥 끓여볼가. 해 지고 난 후 고개 숙이고 후루룩거리며 마셔볼까. (87쪽)

요즘처럼 먹을 게 넘쳐나는 때에 익지는 무엇이고 콩장은 또 무언가. 나는 내 부엌에서 절대 그런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 필요를 느낀 적도 없다. 그러나 이상하다. 익지란 말을 엉겁결에 발음하고 나서 나는 난데없이 그 밍밍한 무와 심심한 콩장 맛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맛이었다. 결코 맛있지 않은 맛이었다. 그런데 그 맛 속에 별의별 것이 담겨 있었던 것만 같다. 무와 콩을 길러낸 척박한 땅에 비치던 은은한 햇볕과, 땅속 깊이 인색하나 달디 달게 숨어 있던 지하수와, 눈물이 돌 것 같은 겸허와 수도승같이 맑은 인내와, 텅 빈 밭이란 위로 불어오는 바람결 같은 가난과, 그 가난과 짝을 이룬 꼿꼿한 자부와 자존심이 슴슴한 익지 맛 안에 모조리 담겨 있었던 것만 같다. (121쪽)

햇장은 산뜻하고 풋풋했다. 산뜻하되 순가넹 지나가는 산뜻함이 아니라 코끝을 오래 감도는 산뜻함이었다. 풋풋하되 풀을 비빌 때 나는 풋풋함과는 달리 옅은 곰팡내가 휘발하면서 풍기는 풋풋함이었다. 그래서 향이 깊고 여운이 길었다. 그러면서 코끝을 싱그럽게 자극했다. 날이 길어지고 먼 산에 아지랑이가 아물거리면서 실내가 갑자기 어둑신해지는 계절, 햇장은 그럴 때에 뜬다. (143쪽)

정성, 거기에 대해 나는 할 말이 너무도 많아졌다. 젊어서는 주변에 널려 있는 하염없는 정성들을 비웃었다. 나는 남들에게 저렇듯 헛된 정성을 바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까기 했다. 나이든 지금은 우습게도 정반대가 되었다. 인간이 제 안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대 가치는 정성이라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145쪽)

생각해보면 나는 오래전부터 ‘말없이 반짝이고 글썽이는 것들‘에 매혹돼왔다. 반짝이지 않거나 글썽이지 않거나 말이 없지 않거나 하면 내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반짝이는 것은 재주이고, 글썽이는 것은 슬픔이고, 말없는 것은 수줍음 혹은 고요라고 할까? 아름다움의 개념을 왜 그런 쪽으로 규정했던지 스스로도 해명할 길은 없다.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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