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는 무기력 상태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소설가는 궁극의 고요함과 질서를 이어가는 삶을 원합니다. 날이 가고 달이 가도 똑같은 얼굴을 보고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글을 쓰고 있지요. 그 무엇도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환영을 깨뜨리지 않도록, 낯가림이 심하고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이라는 기운이 비밀스럽게 뭔가를 캐고 다니고 여기저기 더듬거리며엄습하고 돌진하고 불현듯 찾아내는 그런 여정을 그 무엇도 방해하거나 동요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이런 상태는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이 적용될 것 같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제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소설을 쓴다고 상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손에 펜을 쥐고 앉아 있는 한 소녀를 마음속에 그려 보세요. (29쪽)
여전히 여성의 주변에는 맞붙어 싸워야 할 환영이 널려 있고 넘어서야 할 숱한 편견이 포진해 있습니다. 죽여야 할 환영이든 부딪쳐 깨뜨려야 할 바위든 맞닥뜨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 책을 쓰기까지 여전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리고 여성이 몸담은 모든 직업군 중에 가장 자유로운 문학계에도 이 상황이 적용된다면 이제 여러분이 처음 발을 내딛는 새로운 직업 세계에서는 상황이 어떻겠습니까? (31쪽)
요즘 많은 사람이 그렇듯 나 역시 질문에 시달리고 있음을 밝혀야겠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도로 한복판에서도 끊임없이 ‘왜?‘라는 물음이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같습니다. 교회, 선술집, 의회, 상점, 확성기, 자동차, 윙윙대며 구름 속을 스쳐가는 비행기, 남자고 여자고 전부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혼자 질문을 던진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질문은 사람들 있는 데서 공개적으로 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질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있지요 바로 부자들입니다. (36-37쪽)
질문 끝에 나오는 갈고리 모양의 기호 때문에 부자들의 심사는 뒤틀립니다. 권련과 명성이 잔뜩 무게를 잡고 질문을 나무랍니다. 그 때문에 민감하고 충동적인, 또는 대체로 바보 같은 질문들은 응당 질문 장소에 대해 눈치 보게 마련이지요. 그 질문들은 권력, 부, 전통이 조성한 분위기에 위축됩니다. 대형 신문사 문턱에서는 여러 개의 질문이 죽어나갑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내빼고 맙니다. 형편이 좋지 못해 줄 게 없고 권력이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이들이 사는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으로 말이죠. (37쪽)
맞습니다. 일탈은 최상의 즐거움이에요. 겨울의 거리 유랑은 최고의 모험이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현관 앞 계단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오래된 물건들과 낡아빠진 편견을 감지하고 거기서 안도합니다. 거리 모퉁이마다 바람을 맞고, 접근할 수 없는 수많은 가로등 불꽃에 나방처럼 두드려 맞던 자아는 피난처를 찾아 보호받습니다. (69쪽)
그녀는 돈 한 푼 들일 필요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박물관도 무료, 국립미술관도 무료, 자연도 무료, 물론 아닌 것도 있지. 그녀도 안다. 빨래는 누가 하고 밥은 누가 하고 애들은 누가 보겠는가. 그러나 진리는 있는 법. 다들 입밖에 내길 두려워하는 그것은 바로 행복이란 매우 저렴하다는 것이다. 공찌로 행복을 얻을 수도 있다. 아름다움도 그렇다. (90쪽)
우리 생각이란 게 얼마나 쉽게 새로운 대상으로 우르르 몰려가는지, 개미떼가 지푸라기 하나를 세상없이 열광적으로 옮기다가 금세 놓고 가 버리듯...... (108쪽)
그 순간 거울이 그녀를 향해 빛을 쏟아냈다. 빛이 그녀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 빛은 비본질적이며 피상적인 것을 뜯어내고 오직 진실만 남겨두는 무슨 산성 물질이라도 된 듯했다. 매혹적인 광경이었다. 그녀에게서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갔다. 스카프, 원피스, 바구니, 다이아몬드, 덩굴이며 삼색메꽃이라 불리던 모든 것이 떨어졌다. 그 이면에 단단한 벽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있었다.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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