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적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다. 혼자 뛰는 단거리가 아니라 같이 뛰는 장거리가 비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쪽)
우리는 대체 얼마나 많은 좋은 소설을 놓치며 사는 걸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이 가능해지는 세상이 온다면 그때는 좋은 소설이 누락되지 않는 ‘소설 안전망‘이 구축됐으면 좋겠다. 독자 복지 차원에서. (35쪽)
맞춤법은 원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정신과 문화의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걸 수많은 서술어를 검색하면서 느낀다. (47쪽)
작품에 앞서는 존재, 작품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저자만이 작가가 된다. 그러므로 작가는 출판사가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자 스스로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독자가 만든다. 그리고 독자는, 책을 통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전해주는 사람을 작가라 부른다. (65쪽)
문학을 공부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다 글을 써야 하는 사회가 되면 어떨까. (125쪽)
비평집은 꼭 많은 사람이 읽어야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읽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다. (139쪽)
나의 문제는 곧 세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의 문제는 곧 내 문제가 된다. 철학과 문학은 세계와 나 사이의 관계를 명명하는 방식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묵직한 글이 많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가벼움과 묵직함 사이의 수위 조절이 잡지 편집의 가장 어려운 점이라 생각하니, 태평양 건너 호주의 편집장에게 애뜻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다. (166쪽)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소설가는 거짓말하지 않는 몸으로 거짓이 아닌 이야기는 쓴다. 내게는 세실과 주희의 이야기 모두가 장막 사이로 흘러든 빛처럼 느껴졌다. 그 빛이 우리의 진실일 것이다. (210쪽)
비극은 사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명령의 무게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을 위반하는 행위를 저질렀을 때 인간은 극단적인 악행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비극적일수록 그 발단은 사소하다. 어떤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명령. 그 명령에 오랜 시간 학습되어 있는 자에게 용서와 반성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도록 훈련되어왔기 때문이다. (223쪽)
우리의 인생은 현재 시제지만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궁금해한다. 마음은 좀처럼 과거나 미래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해 보이지만 그 어리석고 미련한 시차가 또한 우리들로 하여금 꿈꾸게 하고 기억하게 한다. (257쪽)
다르다 하여 불쌍한 게 아니다.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힘들고 괴로운 것이 아닌, 다름을 받아들이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갖가지 태도가 슬픔과 자조와 비판을 만드는 것이리라. (284쪽)
책은 가능한 것을 이야기하는 매체가 아니다.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 실제로 가능한지 검증해보는 매체다. 하나하나,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속도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분량으로 벽돌을 쌓아가는 건 오직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285쪽)
[집 놀이]에서는 집을 가꾸는 것 자체를 놀이로 여기라 하는데 (중략) 이런저런 인테리어로 이렇게 저렇게 돈을 써서 집을 꾸며라, 라고 말하는 책은 절대 아니다. 그보다는 집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그 안에서 가족을 태하는 자세, 그렇게 생기는 ‘삶의 순간‘을 말하는 책이다. (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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