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되는 하루하루 일상들을 도대체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 끝도 없는 질문들을 퍼 올리며 꿈을 포기하지 않는 여성들의 삶에 대해 말을 보태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치열하게‘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은 ‘느긋하게‘였다.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말고, 명랑하게, 기꺼이 웃으며, 내 안의 것을 새롭게 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싶었기 때문일까. 나는 나 자신도 지키지 못할 것들을 중얼거린 것은 아닐까. (15쪽)
바깥으로부터 규정된 정체성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의문을 제기하는 것, 미완인 채 자신의 부족함을 끌어안는 것, 다른 사람과의 교섭과 대화를 통해 변화를 꿈꾸는 것, 자주 절망하지만 믿음 안에서 희미한 불씨를 되살려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이자, 사랑의 힘이 아닐까. 그 희망은, 나를 나 자신의 고유함 위에 놓는 것과 나 자신을 타인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사이의 긴장과 탄력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믿는다. (35-36쪽)
인간 세상에도 힘의 논리가 있고 먹고사는 일 이상으로 비대해지고 잔인하게 행사되는 것이 요즘의 사정인 것 같다. 본능과 관습과 문화를 이기는 경제 논리가 점점 강화되니 정말 두려운 것은 거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69쪽)
기억을 되돌려 지루한 고백을 하는 것은 무능력하고 볼품없는 누군가에게도 기회가 오고, 주변의 사람들이 도와 주면 그래도 살 만해지고 시 같은 것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누군가에게 조금 용기를 주고 싶다. 세상은 딱하고 개인은 불행하지만 조그마한 의지와 선행이 우연히 만나 한 삶을 문학적으로 이끌어 가기도 하는 것 같다. (147쪽)
말과 글의 즐거움은 나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인간과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는 초월적 감정에까지 이르게 한다. 어떤 종류의 까발림은 즐거움과 위안, 초월의 감정 너머에 있는데 인간이라는 존재의 허술함을 드러내면서 이 세계의 견고함이 사실은 수많은 금(균열)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5쪽)
사건 사고는 얼마나 쉽게 일어날 수 있는지,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기분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 목숨이 위대로운 상황 속에서 인간의 판단 능력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생각하다 보면 한없이 초라한 기분이 들고는 한다. 인간이란 유치하고 겁 많은 존재들이라는 것, 약하고 물렁하고 불완전하다는 것, 그런데 인간들은 삶이 가지는 모호함이나 우연함에 기대어 참 잘도 살아간다. 사랑이나 믿음이라는 허울은 쉽게 벗겨지는데 말이다. 서로를 뒤흔들고 위협하는 본능과 사악한 쾌감은 인간의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인간들은 서로를 흉내 내면서 앞으로 잘도 나아간다. 이 본능적 모방의 능력은 인간의 나약함을 보충하고 스스로가 우월하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 같다. 나를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너를 파괴하고 조정하는 잔인함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도의 기술이다. (195-196쪽)
어느새 젊음은 내게서 빠져나갓다. 외모쯤이야 어때, 라고 말하는 당당하고 용감한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초라한 기분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젊음을 대신해서 내가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젊음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면 우아하게라도 늙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을 대신한다는 관념 자체가 마치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피해망상적 집착인 것 같아 스스로도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223쪽)
식사란 칼로리를 채우고 영양분을 보충하는 행위 딱 그것만은 아닌 셈이다. 뜻을 천명하기 위해 곡기를 끊는 사람들을 봐도 그렇다. 간절함과 의지 이상의 선택이 거기 있는데 그 옆에 놓인 생수통과 소금 그릇 같은 것을 보면 인간이 인간임을 자처하며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더불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가기 위해 우리가 선택하고 배제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복잡한 생각의 그물 속에 빠진다.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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