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몸은 분석을 하면 할수록, 겉으로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덜 존재한다는 거야. 노풀과 반비례하여 소멸되는 거지. 내가 매일 일기를 쓴 건 그와는 다른 몸, 그러니까 우리의 길동무,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에 관해서란다. (11쪽)
내 몸은 모둔 것에 반응한다. 하지만 어떻게 반응하게 될지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35쪽)
인간은 자기 몸에 관해 무엇이건 다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모조리 다. 걷는 법, 코 푸는 법, 씻는 법. 누가 시범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게 될지 모른다. 처음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아무것도. (42쪽)
우릴 가장 잘 알던 사람도 우리가 커버리면 더 이상은 우릴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모든 게 비밀이 되어버린다. 그러다가 죽는 순간엔 다시 모든 게 다 드러난다. (72쪽)
"사람이 살면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서로 싸우느라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지." (136쪽)
몸은 사랑의 에너지 덕을 어느 정도로나 보는 걸까. 요즘은 모든 게, 정말 모든 게 다 잘 풀린다. 직장 일에서도 지치는 법이 없다. (177쪽)
아버지가 된다는 건 팔을 못 쓰는 장애인 신세가 되는 것이다. 한 달 전부터 내겐 팔이 하나밖에 안 남아 있다. 다른 팔로는 브뤼노를 안고 있다. 하루하루 그렇게 살다 보니 익숙해지긴 한다. (186쪽)
우리 몸에서 풍겨나오는 것들, 즉 실루엣, 걸음걸이, 목소리, 미소, 필체, 몸짓, 표정 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 곁에 있다 사라진 사람들을 떠올려볼 때, 그런 것들이야말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유일한 흔적들인 것이다. (210쪽)
그 무엇에도 집중이 안 된다. 극도의 산만함, 어설픈 동작, 어설픈 문장, 어설픈 숙고, 이무것도 마무리되는 건 없고, 모든 게 내면을 향해 파고든다. 불안은 끊임없이 불안의 중심으로 되돌아간다. 그건 아무의 잘못도 아니다. (238쪽)
‘늙은‘이라는 형용사가 들어간 단어나 관용구를 보면, 노화를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도대체 언제 노년기로 들어가는 거지? 어느 순간에 늙은이가 되는 거지? (259-260쪽)
이제 막 모두의 동의를 얻으려는 찰나......돌연 말문이 막혔다! 기억이 차단된 것이다. 발밑의 함정에 빠진 기분. 그런데도 난 다른 표현을-찾으려 하는 대신, 미련하게도 문제가 된 그 단어만 찾고 있었다. 도둑맞은 주인처럼 분노를 느끼며 기억을 추궁했다. 원래의 단어를 내놓으라고 떼를 썼다! (288쪽)
인간이 진정으로 겁을 먹는 건 오로지 자기 몸에 관해서뿐이다. 자기가 말로 한 걸 누군가가 진짜 행동으로 보여줄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 (315-316쪽)
아주 자주, 난 어린아이가 된다. 내 안의 아이는 내 힘을 과대평가한다. 우린 모두 이 어린 시절의 충동에 꼼짝 못하고 딸려간다. 나이를 잔뜩 먹어서가지도. 아이는 끝가지 자기 몸의 존재를 드러내려 한다. 무장을 풀지 않은 채로 있다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달려드는 것이다. 그런 순간들에 내가 쓰는 에너지는 이미 지나간 시절의 것이다. (325쪽)
그러나 가장 절망스러운 건, 금방 대화를 시작해놓고도 내가 말하려는 걸 잊어버릴까 봐 겁이 나서 긴장해 있는 바보 같은 상태이다. 내 기억력이 도무지 미덥지 않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내게 교육시켰던 내용도 분명히 기억하긴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나머지 세부 사항은 다 잊어버린 것 아닌가 의심이 든다. (중략) 오늘, 내 기억력은 오로지 기억력의 감퇴를 기억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네 기억력이 없다는 걸 기억해! (353쪽)
사실 이 일기를 써온것도 끝없는 조절의 훈련이었는지 모른다. 흐릿함에서 벗어나기, 몸과 정신을 같은 축에 유지하기...... 난 ‘상황을 똑바로 보기 위해 애쓰며‘ 내 인생을 다 보냈다. (379쪽)
장례는 단지 의례였을 뿐, 난 홀로 분노를 곱씹으며 슬픔을 키워갔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죽을 때 우리에게서 뭘 앗아가는지 알아채기란 쉽지 않지. (중략) 그들은 몸이 살아 있는 동안 기억할 거리들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내겐 그 기억들만으론 충분치 않았다. 내가 그리워한 건 그들의 몸이었으니까! 내 앞에 마주하고 있어 손만 뻗치면 만질 수 있는 몸, 그거야말로 내가 잃어버린 것이었다! (447-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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