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에게 ‘운명애‘는 초인의 행위이자 극도로 주권적인 행동입니다.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노예가 아닌 주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37쪽)
삶에 대해서 성찰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주의는 삶과 성찰을 분리시킵니다. 그렇다면 성찰하는 사람은 조르바의 표현에 따르면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제대로 사는 동안에는 성찰할 수 없지요. 이것이 조르바주의입니다. (45쪽)
이 삶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은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것, 윤리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반복되어도 좋을 만한 것으로 최선의 삶을 살라는 주문이기도 하니까요. (66쪽)
카잔차키스에게 핵심적인 가치는 자유였죠. 자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선택은 다르게 말하면 유혹입니다. 최후의 유혹이나 하느님의 부름에 대한 부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신이 선택한 게 아닙니다. 예수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권‘이지요. (83쪽)
달이나 6펜스냐. 단,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 작품의 핵심은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17쪽)
삶의 본질이 무엇이냐? 표상과 의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맹목적 의지는 욕망으로 바꿔도 됩니다. 욕망은 우리를 항상 파멸로 몰고 가니 억제해야 합니다. 욕망은 우리를 항상 파멸로 몰고 가니 억제해야 합니다. 성에 대한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종류의 욕망, 의지를 다 거부합니다. 이것이 쇼펜하우어적 염세주의입니다. (127쪽)
우리가 개념을 습득하면 그로부터 새로운 시야가 열립니다. 하지만 이면도 있습니다. 즉 보게하지만 보지 못하게도 합니다. 여러 개념을 바궈가며 살펴봐야겠지요. (186쪽)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해우이,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96쪽)
그렇다면 일회적인 삶은 아주 가벼운 것이고 이를 극복해서 아주 무거운 삶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다 하더라도 이대로가 더 나은 것인가?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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