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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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중에서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는 민주화 운동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어요. 그래도 운동권인 친구들은 있었지요. 야학 교사를 한다는 친구들도 있었고요. 그 친구들 덕분에 집회에 한 번 참가한 적은 있었지만요. 저는 대체로 운동권과는 먼 학생이었지요. 그렇지만, 독재 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했던 전설적인 선배들의 이야기는 간혹 들었어요. 민주화 투사(鬪士)! 그들은 사람들이 적게 간 그 길을 택했고요.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지요.

 

 

최순실 씨가 2017년 1월 25일 오후 체포영장이 집행돼 서울 강남구 특검 사무실에 출두하며 소리치고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최순실 씨는 특검에 출두하는 그때, "억울하다. 자백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강제 소환에 항의하면서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라고 했다고 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최순실 씨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서명숙 씨는 천영초 씨를 생각했다고 해요. 천영초 씨의 후배로 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던 서명숙 씨. 천영초 씨가 외치던 민주주의는 분명 최순실 씨가 외치던 민주주의와는 달랐을 거예요.


'뿌리 뽑힌 채 이식된 것 같은 낯설고 삭막한 서울에서의 삶, 철저하게 '기브 앤드 테이크'로 일관하는 듯한 도시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 붙일 곳 없어 서성대던 나였다. 그런 내게 언니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오랜만에 햇볕을 쪼인 화초처럼 쑥쑥 자랐다.' -53쪽.


 '영초언니'는 서명숙 씨의 눈으로 본 천영초 씨를 그려요. 서명숙 씨의 삶에 들어왔던 천영초 씨를 토막토막 보여 주는 거지요. 천영초 씨! 학보사 기자였던 서명숙 씨에게 그 선배는 '고대신문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미모에 훌륭한 문장가였다(46쪽)'는 전설적인 선배였지요. 그리고 큰 언론사에 가지 않고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한 사람이었고요.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72학번인 천영초 씨. 서명숙 씨는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76학번이었지요. 그 둘은 첫 만남에 선후배로서 호감을 가졌고, 함께 자취를 하게 돼요. 그 둘이 사는 곳에 여학생들이 모이게 되고요. 그 여학생들의 모임. 그 이름이 가라열이었어요. 열 명이었거든요. 민주화를 외치던 천영초 씨는 결국, 서명숙 씨, 박종원 씨와 함께 일명 '산천초목' 사건으로 고문을 받고 실형을 살게 돼요. 한 명은 남학생인데, 지명 수배를 받았고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나눠준 대가였지요.  


 '언니는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했지만 후배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한 선배였다. 역사의식과 대의명분망으로 후배의 선택을 강제하고 희생을 요구하는 선배가 아니었다. 그녀가 내게 가졌을 부채의식이 여실히 느껴졌다.' -182쪽. 


 '다시는 절대로 영초언니와 엮이지 말아야지' 결심했다. (중략)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그날까지 더 가열하게 싸우겠노라'고 구치소 앞에서 선언했듯이 가파른 투쟁의 길로 걸어들어가는 영초언니와는 점점 멀어졌다.' -257쪽.


 독재와 폭력의 시대. 민주주의를 외치는 투사인 천영초 씨와 서명숙 씨. 둘 다 결혼을 하게 되지요. 천영초 씨는 정문화 씨와 서명숙 씨는 엄주웅 씨와 했어요. 남편들도 민주주의 투사예요. 결혼과 함께 서명숙 씨는 더 이상 투사로 살지는 않지만요. 다른 이들은 투사로의 삶을 이어가지요. '5.18 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 항쟁' 등을 겪어요. 그리고 천영초 씨 부부는 생활고도 겪고요.


 '비록 내게 고통도, 실망도 안겨주었지만 찬란한 청춘의 봄날을 함께했던 내 인생의 첫 멘토 영초언니, 풀각시처럼 영롱했던 그녀가 서서히 부서지고 망가져가는 걸 눈뜨고 지켜보기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터. 그녀가 떠나는 날 공항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부디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출발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263쪽.


 2002년 영초언니, 천영초 씨는 이민을 가요. 캐나다로요. 정문화 씨와 이혼을 하고요. 아들의 따돌림 문제로 가는 거였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큰 사고를 당해 시력과 뇌의 많은 부분이 손상을 당해 단순한 말과 행동만을 한다고 해요. 지금은 경기도 양평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고요. 천영초 씨의 불운에 마음이 아프네요.


 '이 책은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한 여성에게 바치는 사랑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듣고 그녀가 조각난 기억의 파편을 온전히 맞추어내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10쪽).


  '그간 많은 것이 변했다. 촛불을 드는 평화적인 행위만으로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부패한 최고권력자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박정희 정권을 향한 향수에 뿌리를 둔 박근혜 정권도 막을 내리고, 박근혜 본인도 구속되었다.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모든 것들이 달라지고 무너지고 무뎌진다. 정치적 입장도, 남녀 간의 사랑도.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변하고 바스러진다. 그러나 천영초, 그녀는 내 마음속에 늘 애틋한 풀각시처럼 남아 있다.' -'에필로그' 중에서 (283~284쪽).


 '영초언니'를 읽으며, 제게도 천영초 씨가 제 마음속에 들어오네요. 서명숙 씨가 천영초 씨에게 바치는 사랑 노래가 깊이, 길게 울리고요. 우리 나라의 민주화가 이런 민주화의 투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요. 그렇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가시밭길이었을 거예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던 그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지요. 그 아픔을, 그 슬픔을 기억해야겠어요. 그리고 이런 아픔과 슬픔으로 다시는 사람들을 눈물짓게 하지 않아야겠고요.


 '망치의 두드림이 아닌 물결의 출렁임이 조약돌을 완전하게 만든다.' 

 

Not hammer strokes, but dance of the water,

sings the pebbles into perfection.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 '길 잃은 새(STRAY BIRDS) 중에서  


 독재 시절, 망치의 두드림인 폭력이 있었지요. 백성들에게요. 그렇지만 백성들을 완전하게 만드는 건 민주주의라는 물결의 출렁임이지요. 독재 시절, 민주주의라는 물결의 한 출렁임이었던 영초언니, 천영초 씨. 우리는 그 물결의 출렁임을 이어받아야 해요. 아직 곳곳에 적폐가 숨어 있는 우리나라. 옳은 뜻을 지닌 여러 사람에게 이어지는 물결의 출렁임이 결국에는 백성들을 올바르게 인도할 거예요. 


 서명숙 씨가 그린 '영초언니'는요. 서명숙 씨의 눈에 비친 천영초 씨예요. 또, 서명숙 씨의 삶에 사이사이에 스며드는 천영초 씨고요. 그렇기에 그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그 독재 시대에 민주화를 외치는 여성 투사를 그려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어요. 그 의미 하나로도 천영초 씨와 서명숙 씨에게 감사하게 되네요. 이 이야기를 만난 우리에게 영롱하게 빛나는 '영초언니'. 그 민주화를 담은 힘찬 날개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네요. 그 날개가 오랫동안 펼쳐져 있기를 소망해요. 그리고 그 날개를 잇는 다른 날개들도 날아오르기를 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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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8-28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 모씨 얼굴은 모자이크로 가리고 싶군요. ^^

사과나비🍎 2017-08-28 12:10   좋아요 0 | URL
아...^^; 최순실 씨의 얼굴은...^^; 아무튼~ cyrus님~ 좋은 월요일되시고요~ 점심 식사 맛있게 하시기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