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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평점 :
한동안 내가 살았던 동네가 사라졌다. 재개발로 높은 아파트를 짓고 있으니, 그렇다. 어릴 때,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많았던 그 동네. 학교 안뿐만 아니라, 등굣길과 하굣길에서 함께 걸으며, 웃고, 떠들던 그 동네. 방과 후에도 장난꾸러기 소년과 새침데기 소녀가 어울려 놀았던 그 동네. 이젠 없다. 그렇지만,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었던 그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기억 안에서 그 동네를 언제나 재구성하며. 그리고 그 이웃들이 다시 소환됐다. 한 작가의 짧은 이야기를 읽으며. 1970년대 우리 이웃들을 그린 박완서 작가의 48편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왜 낭만을 찾는답시고 간직하고 있는 낭만이나마 하나하나 조각내려 드는 것일까? 이 낭만이 귀한 시대에.' -'마른 꽃잎의 추억 4' 중에서. (71쪽)
'"부인, 그래서 나쁠 것도 없잖습니까. 전 지금 오래간만에 행복합니다. 가슴이 소년처럼 울렁입니다. 늙어도 행복할 권리만은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노을과 양떼' 중에서. (321쪽)
'이사 오는 날이었다. 옆집에 산다는 여자가 인사를 왔다. 나는 반갑고 한편 놀라웠다. 아파트에도 이웃이란 관념이 남아 있다는 게 반가웠고, 그 여자의 미모가 놀라웠다. 중학교 다니는 자녀가 있는 그 여자의 미모는 상당하달 수 없었지만 유달리 착하고 밝은 표정 때문에 눈부시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여자가 내 이웃이라는 게 예기치 않은 행운처럼 즐거웠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 중에서. (387쪽)
작가는 말한다. 48편의 짧은 소설에서 말한다. 연인, 부부, 이웃 안에서. 결혼, 집, 아픔 안에서. 낭만과 자유를, 행운과 행복을. 각별히, 여인과 어르신의 낭만과 자유를, 행운과 행복을. 1970년대의 우리나라에서.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성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성장통도 함께 있었다. 배금주의에 물든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이 더욱 작아진 그 시대. 낭만과 자유가, 행운과 행복이 더욱 소중해졌다. 풍요 속의 빈곤이리라. 황폐해진 우리들. 더욱이 가려린 이들에게는 그 목마름이 깊었으리라. 그래도 낭만과 자유를 찾고, 행운과 행복을 지키려고 한다. 희망으로. 아픈 이를 위하는 마음으로.
결혼은 나에게 화두이니, 혼인을 바라는 부드러운 마음을 이야기 안에서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건강도 나에게 화두이니, 쾌유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도 이야기 안에서 나에게 고이 스며들었고.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차이와 반복' 중에서.
이때와 그때. 물론, 차이가 있다. 지금과 1970년대. 여러 가지 달라졌다. 그때와 이때의 다름. 이때와 그때의 다름. 그렇지만,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가 있다. 그때의 다양함이 한 목소리를 내듯이, 이때의 다양함이 한 목소리를 내듯이. 그때도 이때도 한 목소리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듯이.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하나인 것이다. 여러 다름이 하나가 됨을 반복하고 있다.
박완서 작가의 이 소설도 그렇다. 매우 짧은 소설 안에서 지금과 다른 1970년대를 말한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그 서로 다름이 서로 하나가 된다. 사람 사는 것이 이때와 그때가 달라 보이지만, 역시 같다, 단지 시간만 다를 뿐. 작가는 평범한 일상에서 풍자와 재치로 이 역설을 세심히 그리고 있다. 낭만과 자유를, 행운과 행복을. 그리고 이 가치들을 아끼며 감싸는 희망을. 모든 물방울들이 담은 찬란한 아름다움을.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품은 찬란한 아름다움을. 그래서 빛난다. 따뜻하게 빛난다.
그리고 소환된 어릴 적 내 이웃들의 기억도 이때와 그때로 마주 보았다. 결론은 이렇다. 역시 같다, 단지 시간만 다를 뿐.
덧붙이는 말.
하나. 이 책은 1981년 '이민 가는 맷돌'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왔다가 몇 번 개정판이 나온 후 지금의 개정판에 이르렀다.
둘. 이 책은 기업의 사보에 실었던 콩트 모음집이다.
셋. 작가는 콩트 쓰는 맛을 방 안에 들어앉아 창호지에 바늘구멍으로 내고 바깥세상을 엿보는 재미로 비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