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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주택 ㅣ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81
유은실 지음 / 비룡소 / 2021년 3월
평점 :
추천을 받고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새해 첫 책으로 유은실의 <순례 주택>을 읽었다. 사전 정보로는 희미하게나마 <순례 주택>의 순례는 건물주의 이름이며 그녀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보만으로도 새해를 여는 책으로 안성맞춤이라는 감이 왔고, 결론적으로 내 예상이 적중했다는 것이다. 새해에는 새로운 각오도 필요하지만 다시 밭을 일구는 마음으로 착하고 좋은 마음의 씨앗이 될 롤모델도 필요한 법이니까.
누구나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다. 어른, 사전적 의미로는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그런 기준으로 나를 들여다보면 자신있게 어른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키는 내면의 자람과 상관없이 쑥쑥 컸지만, 어른이라 자명할 수 있는 내면의 키는 실제 내 키와 같으려나.
“수림아,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 (53쪽) 그런 의미에서 순례 씨는 참으로 어른이다. 땀 흘리지 않고 번 돈은 내 돈이 아니라는 순례 씨는 때를 밀어 번 돈으로 산 순례 주택의 임대료도 받을 만큼만 받고 시세에 따라 올리는 법이 없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순례 주택의 사람들은 그런 순례 씨에게 고마워서 자기 힘으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더 애쓰는 사람들이 되었고, 자연스레 어른의 면모를 더해가게 된다. 인생에서 좋은 어른을 만난다는 것은 만남에 있어 큰 복이 아닐 수 없고, 주위에 그런 분이 있다면 더욱 감사할 일이다.
“순례 씨가 좋아하는 유명한 말 -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가 떠올랐다. 나도 순례자가 되고 싶다. 순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 인생에 관광객은 되고 싶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도.”(99-100쪽)
‘순하고 예의바르다’ 뜻의 순례에서 ‘순례자’의 순례로 개명을 한 순례 씨. 순례자의 순례라니. 정말 취향저격의 순례 씨가 아닐 수 없다. 내 삶의 모토는 나그네 길, 순례자의 삶인데 현재는 안타깝게도 마음만 앞서는 어설픈 불량 나그네다. 하지만 주인공인 중3 수림이의 고백을 통해 수림이는 좋은 어른, 참 순례자가 될 재목임을 알 수 있는데 다행히 순례 씨와 함께 한 덕분이다. 어릴 때부터 산후 우울증을 겪는 엄마로 인해 외할버지와 그의 연인인 순례 씨에게 맡겨진 수림이는 일찌감치 자신의 부모가 얼마나 철이 없고, 부끄러운 어른들인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가만히 그 부모들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고, 그들이 철없이 하는 말들이 곧 우리 내면의 목소리임을 깨닫게 된다. 그걸 깨닫는 순간, 수림이와 순례 씨 입장에서 부모들을 바라보던 시선이 내 안의 어두운 부분을 향하는 경험을 한다. 스스로 높은 체 하는 시선이 바닥을 향해 떨구어지는 경험…
순례 씨를 많은 이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좋은 아파트, 좋은 직업, 대학, 부모의 유산…, 세상적인 기준에 맞춰진 시선을 새롭게 조정하고 회복시키는 시간을 순례 씨를 통해 가지게 하고 싶다. 언젠가 사랑하는 조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 살 때 가장 친했던 “재물”이라는 친구는 죽을 때 같이 가지 못하고, 그리 친하지 않았던 “선행”이라는 친구는 죽어서도 끝까지 같이 간다고.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순례 주택>을 읽으면서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나도 어른다운 어른, 순례자 다운 순례자로 살아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잘 책임지며 살고 싶어졌으므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