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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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59년에 태어난 유시민이 2014년까지, 55년의 기록이다. 아마도 이 세대가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자란 세대가 아닐까 싶다. 책의 구성은 거시적인 현대사와 함께 미시적인 개인의 체험을 기록한 이중구조이다. 1959년생 유시민과는 10여년의 터울이 있는, 1970년생인 나는 이런 현대사의 격동을 느낄 새도 없었다. 산업화에 슬슬 시동이 걸릴 때였고, 정부의 산업화 정책에 발 맞추어 우리 부모님도 충청도 산골에서 무작정 상경하여 서울의 한 귀퉁이인 달동네에 자리를 잡으셨다.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한 지붕 세가족의 풍경은 일상이었고, 연탄불에 라면을 끓여먹던 시절이었고, 연탄가스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자살해서 죽는 사람보다 많았던 시대였다. 그로부터 46년이 흐른 지금의 한국은 괄목할 정도의 풍요를 자랑한다. 이런 풍요는 아아이러니하게도 보수와 진보의 극한 대립을 가져왔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사회경제적, 정치적,문화적 변화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탓에 일어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현대사는 현재와 이어져 있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역사다. 점점 첨예해지는 좌우이 대립으로 부담은 더욱 배가 된다. 국정화 교과서로 인해 한 차례의 파란을 겪은 작년이후 이러한 현대사의 대립은 좌와 우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저자는 이런 현실이 '역사가도 각자 나름의 개성과 취향이 있고 서로 다른 욕망과 감정에 끌리며 저마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선택해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차피 역사는 사실의 선택과 선택한 사실의 해석, 역사 서술의 핵심인 두 가지가 모두 주관적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둘러싼 다툼은 당연한 것이다. 또 하나 이 민감한 현대사가 더욱 민감해 지는 것은 현대사의 중대한 사건들의 주역들이 여젓이 현실에 살아있다는 점이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객관적인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역사가가 허락할 때만 말을 한다. 역사가는 제멋대로 사실을 만들거나 바꿀 수 없지만 사실의 노예인 것도 아니다. 사실과 역사가는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기의 사실을 가지지 않은 역사가는 뿌리 없는 풀과 같고 자기의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죽은 것이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이다. -p29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앞두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최대의 정치적 쟁점에 서있다. 좌우의 첨예한 대립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보는 시각차에서도 엄연히 드러난다.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래로 보는 사람들은 노래의 정당성을 부여하며 기념식에서 제창하기를 바라지만 반대로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가 반미민중혁명을 선동하고 있다하여 제창을 반대한다. 우리의 현대사는 이 사실만 보아도 다분히 감정적이고 정치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얼마나 현대사를 이해하면서 현재를 해석할 것인가이다. 주관적 시각을 유지하되 얼마나 보편적인가를 떠올릴 줄 알아야 하고, 객관적이되 얼마나 합리적인 시각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면 우리의 현대사는 바른 균형을 가진 역사로 쓰여질 것이다. 현재와 연결되어진 현대사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주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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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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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슬픈 현대사는 아픈 가족사와 함께 한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러했다. 우리 집은 단칸방에서 여섯이 옹기종기 붙어 살았다. 건넌방에는 삼촌이 신혼방을 차려 한 지붕 두 가족이었다. 정확히 내가 여섯 살에 작은 엄마는 조카를 낳았다. 그것도 집에서. 문지방 너머로 몰래 본 애 낳는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은 채 뇌리에 남겨져 있.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한 그 시절을 일컬어 유신시절이라고 어른들은 불렀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가난했었고 누구나 아픈 시이었다우리 부모님들은 언제나 바빴다. 좋게 이야기하면 부지런한 것이었고 나쁘게 표현하면 죽도록 일해야 입에 풀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시절의 이야기를 지면으로 만났다. 오랫동안 봉인 되어 온 기억을 스치기만 해도 툭 터져버리듯 그 시절들이 떠올랐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산동네가 꼭 우리가 살던 달동네와 닮아있었고 매일 같이 싸우는 엄마와 할머니의 싸움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욕설이 난무하고 며느리만 보면 못 잡아먹어 환장하시는 할머니와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살림하나는 똑 소리나게 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늘 할머니 편만 드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모두 그랬다. 아내편 들어주면 큰일나는 줄 알고 주먹으로 자식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아버지.

 

그런 동구의 가슴에는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 어디에나 꼭 존재하는 부잣집의 정원을 비밀처럼 품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정원은 잔디 하나 없지만 낙엽이 융단처럼 깔려 있고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아 순수의 결정체 같은 비밀의 정원이었다.

 

 

도저히 화목이라고는 눈씻고 찾아 볼 수 없는 이 가족들이 영주의 탄생으로 인해 약간의 평화가 찾아오긴 했다. 며느리라면 쌍심지부터 켜는 할머니도 영주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고 아버지는 영주의 행동 하나하나에 울고 웃었다. 동구는 달덩이 같은 영주얼굴을 보기 위해 학교가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왔고 아버지의 폭력과 할머니의 욕설로부터 엄마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영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3학년이 된 동구는 한글을 여전히 못 깨우쳤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이 동구가 한글을 모른다고 하자, 아버지는 따귀를 때렸다. 동구는 그후 더욱 글을 읽는 것을 두려워했다. 3학년이 되자 동구는 특수 학교로 가야 할 정도로 심각한 난독증을 보이고 3학년 담임 박영은 선생은 동구의 상담을 자청한다. 선생님과의 대화 시간을 통해 동구는 부모들에게 받지 못한 애정으로 치유되는 듯 하였고 학년이 끝나갈 무렵 동구는 박영은 선생님에 대한 동경을 비밀 정원처럼 품는다.

 

 

사회의 격변기를 지나던 시절, 탱크 구경하러 간 곳에서 옆동네 주리 삼촌을 만나고, 처음으로 멍게와 소주를 맛본다. 소주의 맛처럼, 독하고 혼미한 시절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주리 삼촌과 박선생, 박선생의 선배와 함께 한 자리에서였다. 대학시절 박영은 선생이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한 아픔에 눈물을 흘리며 시작된 고백은 이후 박영은 선생의 거취를 예고하는 복선이다.

 

 

나는 두 팔을 높이 쳐들어 아름다운 정원을 찬미하면서 능소화 꽃 사이에서 이 정원의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 능소화의 찬란한 영혼, 붉은 자주빛 원피스를 나부끼며 떠나가신 박 선생님 같은 그 황금의 새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p244

 

 

박영은 선생이 실종 되고도 동구의 집은 여느 때와 같, 엄마와 아빠의 싸움을 피해 영주를 무등 태워 감 따러 간 날, 영주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고 이후 동구의 집에는 파란이 일어난다. 격으로 엄마는 정신이 나가고 할머니의 타령은 더욱 심해졌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죽을 듯이 싸운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엄마를 기다리기 위해 성숙의 계단을 오르는 동구는 오랜 비밀의 정원에 이별을 고한다.

 

아버지와 엄마는 돈을 많이 벌고 나를 잘 키우자는 희망이 있다. 나는 나중에 박 선생님을 다시 만나자는 희망이 있다.하지만 할머니의 몫으로 남은 희망은 무엇일까. 할머니에게 손을 내밀고,노래를 불러주고, 말벗이 되어주고, 나들이를 함께 나가던 영주가 떠난 후 할머니에게는 어떤 희망이 남았을까.

 

소설의 큰 틀은 글 한자 읽을 줄 모르던 동구가 할머니를 이해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동구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인격체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다. 동구는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힘겹게 한 세계를 깨뜨린 후에야 성장한다. 정원의 아름다움이 흔한 것과 귀한 것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내는 것처럼 자신의 세계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누구나 그런 시절을 지나왔다. 기차 밖에서 흘러가는 풍경처럼 역사가 흘러가는 동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입에 풀칠하는 것만으로 바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동구의 비밀 정원처럼 아로 새겨진 민주화 운동을 기억한다. 유신 시절은 누구나 가난했고 누구나 아팠다. 동구의 아픈 가족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였고 슬픈 현대사를 품은 우리의 이야기이다.

 

-책속에서-

영주와 나와 박 선생님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지만 지금 같은 새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든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는 독재자에게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의탁하고 싶어한단 말이야. 이런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맞닥뜨리게 되면 무능하다느니, 권위가 없다느니, 산만하다느니 하며 불평을 늘어놓게 되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그들도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 저항할 수는 없을 거라고? 아니야, 독재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은 또 다른 독재가 자라날 수 있는 가장 비옥한 밑거름이야. 이렇게 기름진 밭이 있는데 독재라는 질긴 덩굴이 왜 성장을 멈추겠어?

 

 

 

인간이 살아가는데 치사하게 답만 알고 과정을 모른다는 것은 뿌리가 없고 불완전한 것이라는 설명에 수긍했을 따름이었다. 그 원칙이 산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사 전반에 그렇다는 훈계를 듣고는 앞으로 어른이 되더라도 내 인생이 뿌리가 없고 불완전한 것이 되리라는 생각에 몸을 떨었고, 인생을 완전한 것으로 해주는 그 '과정'을 찾기 위해 따로 노력도 해보았으나 야속하게도 내 머릿속에 과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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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 존중받지 못한 내 마음을 위한 심리학 심리학 3부작
박진영 지음 / 시공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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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이 제목을 보면서 나는 반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라고 묻고 싶어졌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한장씩 한장씩 넘길 때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좋은,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에 앞서 우리는 평소 얼마나 '나'를 생각하며 살까? 아마 하루 24시간의 한시간도,  일주일의 하루정도도 나를 생각하지 않으며 살 것이다. 이렇게 '나'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눈치 보는 나, 착각하는 너>, <심리학 일주일>에 이은 마지막 심리학 책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는 먼저 '나'를 사랑하라 한다. 그것이 행복한 삶과 좋은 삶의 첫걸음이기에 , 그렇다면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몇 년 전 한국인이 생각하는 중산층 기준은  월소득 500만원이상 벌고 순자산 65천정도에, 집은 3억이상이어야 하고 자가용은2.000cc를 소유해야 한다고 답한 반면 선진국 국가의 국민들은 페어플레이를 할 줄 알며 자신의 주장과 신념이 있고 사회적 약자를 도울 줄 아는 자라고 답하였다. 지금도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글이다.  물론 정확한 기준이나 출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공감하게 되는 이유가 우리들 스스로가 얼마나 배금주의에 물들어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삶 역시도 그런 기준과 다르지 않다. 적어도 좋은 삶의 기준에는 물질적으로 풍족하여야 하고 남들 다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는 갖추고 살아야 한다는 속물근성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남과의 비교는 당연지사고 거기에 따른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자기혐오나 부정의 감정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현실은 이러하지만, 삶의 즐거움을 찾는 일은 절대로 낭비가 아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행복한 삶이란, 결국 삶이라는 하나의 큰 그릇이 불행보다 행복으로 더 많이 차 있는 삶이다 

 

이런 자기 혐오와 자기 부정은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심연에 똬리를 틀게 된다. 목적도 없이 매일 굴리는 삶의 바퀴속에서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면 결국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없고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에서 진짜 내 모습을 찾아야 하며 나라는 지도를 그려야만 이 자기 혐오와 부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한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내가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가치관은?

나는 전반적으로 괜찮은 사람인가?

나는 내 삶에 만족하는가?

삶이 괴롭고 힘들다고 느껴질 때의 대처 방법은?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그려지는 '자아지도'는 내 인생을 다시 정립하고 삶의 가치관을 다시 세워주는 시간들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 지도 위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로서의 삶은 불행하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채 행복하길 바란다는 것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다. 저자는 그렇게 그려진 나라는 지도 위에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나'의 복잡하고도 다양한 특성들을 이해하게 된다면 타인의 복잡성도 헤아리기 쉬워진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이렇게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게 되면 예기치 못한 고통이 찾아 왔을 때 힘들지 않게 극복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삶 자체가 예측불가능이고 인생에 고난이 찾아올 것을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도 될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해주는 저자의 답은 간단하다.

최대한 즐겁고 행복하게 지낼 거야. 하고 싶은 일들 맘껏 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좋은 삶의 시작이다.

 

 

 

 -책속에서-

행복한 삶이란 죄책감이나 막연한 불안감 없이 있는 그래도 즐거움을 느끼면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다.-p33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평소에 사람들을 많이 챙기고 진심으로 위하는 편인가? 사람들이 당신에게 진심 어린 응원이나 무관심 중 어떤 것을 줄 거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진심 어린 응원이라는 게 뭔지, 그런 게 정말 가능한 것인지 의심스럽다면, 내가 사람들을 진심으로 위해준 적이 별로 없었던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한 적이 없다면 나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를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응원이 별로 와 닿지 않는 경우 어쩌면 그들보다 내가 문제일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삶은 원래 항상 누구에게나 어렵고 복잡한 것임을 아는 것, 즉 삶을 얕보지 않는 것이 성숙의 중요한 조건이다.

 

삶은 누군에게나 힘들고, 때론 우리의 행동거지와 상관없이 안 좋은 일들이 터지기도 하며, 예측하지 못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러니 조금 더 너그러워져보는 건 어떨까? 나 자신과 타인, 또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 말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이 일이 생겼다고 해서 내가 망하진 않을 거야. 극복할 수 있다고라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다음 제 3자의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현명하게 대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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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9 18: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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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1: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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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살아있는 재해석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성현 옮김 / 심볼리쿠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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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모의 짜라두짜는 다르다.
미화가 아닌 직설화법
돌직구로 내리 꽂는 철학의 언어들.
사이다처럼 시원함과 동시에 니체의 진경을 맛 볼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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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의 정치학 - 안철수와 로스 페로의 부상과 추락
조기숙 지음 / 인간사랑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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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조차 선동가나 다름없는 트럼프의 약진을 보면 아무리 발달된 민주주의라 해도 선동가들은 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 선동가에 휩쓸리는 대중도 많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라는 구멍은 이런 게 아닐까 한다. 대중의 선택에 의한 것, 이것은 대중이 언제나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6년만의 여소야대의 정국을 맞이하게 한 이번 총선 역시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여나 야나 국민의 비난속에서 그래도 선전한 당이 있다면 바로 안철수, 국민의 당이다. 그렇다고 국민의 당이 더불어민주당보다 정치적 역량이 뛰어나거나 진보다운 야당이라 하기에 판단하기가 힘든 부분이 많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린지 삼십년도 채 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정당은 합리적인 진보야당이다. 더불어 민주당은 합리적인 진보 정당이라 하기에는 정체성에 문제가 있다.  다니엘 튜더가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에서 주장하듯이 통진당의 흡수로 더민당은 합리적인 진보가 아닌 종북의 오명을 쓰게 되었다. 이번 총선에서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친노·운동권 배제하고 실무형 비대위를 구성한 것을 성공요인이라 보는 이유도 일반 국민에게 보여지는 더민당의 프레임을 정확히 짚어내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의 이해

정치인이 표를 얻기 위해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면 대중은 그에 따라 움직이는 현상을 흔히 포퓰리즘이라 한다. 그러나, 이 책 『포퓰리즘의 정치학』에서 말하는 포퓰리즘은 기존에 알고 있던 인기영합주의와는 다르다.  저자 조기숙은 포퓰리즘이 인기영합주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온 이유가 남미에서 좌파 분배주의와 결합한 페론의 포퓰리즘이 재정 파탄을 가져온 나쁜 사례를 들어 상대를 포퓰리스트로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라 한다. 물론 포퓰리즘에는 인기영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모든 포퓰리즘에 나타나는 최소 정의는 포퓰리즘의 필요충분조건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 정치를 동질적이고 적대적인 두 개의 집단(순수한 국민대 부패한 엘리트)으로 분리하고 정치는 국민의 일반의지를 표현하는 것이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이념“(p41) 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포퓰리즘의 기원은 19세기 말 북미에서 펼쳐진 농민운동과 러시아의 혁명 전야에 있었던 나로드니크 운동이라 한다. 이 농민운동 -나로드니크의 영어 번역이 포퓰리즘이다. 미국의 농민운동은 농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순수하게 아래로부터 시작된 개혁이었고 체제 저항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이 농민들이 만든 당이  국민의 당이다. 이렇게 국민의 당은 이름 자체도 전형적인 포퓰리스트 정당으로 출발한다.

 

#포퓰리스트

[포퓰리즘의 정치학]은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가 안철수의 현상을 다각도로 연구한 책이다. 저자는 각국의 포퓰리스트 등장과 안철수 현상을 비교 분석하였다. 미국의 전형적인 포퓰리스트였던 로스 페로 후보와 안철수는 데칼코마니처럼 닮았다. 게다가 그들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정치에 무관심 하거나 정치 냉소주의자라는 점 역시도 같다. 

 

 안철수를 포퓰리스트라 하는 이유는 정치 경력이 짧은데다 등장당시에 영웅시 되었던 부분때문이다. 영웅주의 자체는 민주주의 본질을 훼손한다. 그 이유는 정당정치 위에 영웅시 된 개인의 존재는 정책보다는 비현실적인 언변에 촛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철수는 애매모호한 화법으로 정책에 대한 정확한 방향성이 없다.  일례로  후보 시절 안철수는 국회의원 수를 줄이고 정당의 국고 보조금을 줄이자고 해서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이 국고보조금을 받기 위해 국민당을 창당하고  현역의원을 빼가기 까지 했다. 안철수 본인이 얼마나 정책기조가 없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정치 냉소주의자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은 국민이 정치를 외면하는 것이다. 정치를 외면하고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을 정치 냉소주의자라고 부른다. 정치 냉소주의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선동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스트에게 이끌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비정치 영역에서 성공한 신화를 가지고 화려하게 정치인으로 등장하는 포퓰리스트에게 동원될 가능성이 높다. 포퓰리스트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정치인들이 국민을 편가르기 한다고 공격한다. 포퓰리스트는 국민은 하나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기득권 정치 엘리트들이 국민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만들었다며 자신이 국민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 대변하겠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는 한 마디로 반정당주의자, 반정치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정치 냉소주의자는 정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포퓰리스트의 말에 깊이 공감하여 그가 자신들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다고 믿고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

 

  ★포퓰리스트와 혁신가를 비교하는 분석들 

 정치인의 종류  포퓰리스트 새정치의 아이코(혁신가) 
 경력

 비정치인의 정치인으로의 변신

혹은 기존 정치인의 돌변

 정치권에서 검증된 인물
 정치운영방식  정치의 사인화 제도에 의한 정치 
 리더십

 사적인 신화에 기초

폐쇄적 사조직 중심, 권위주의적

가치 중심의 비전과 도덕성

민주적 

 지지기반

 정치 냉소주의자

비정치적 유권자

 비판적 시민

번스의 패러독스

    

정치는 깨어있는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정부가 돌아가는 작동원리를 모르는 사람이 정치에 동원되는 걸 중우정치라고 한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는 중우정치로 흐르게 한다. 몇 년전 안철수의 현상이 한국정치에 불때만 해도 안철수의 한마디 한마디가 감동과 공감을 가져와 매스컴에 회자되곤 했었다.  하지만 안철수의 거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번 총선에서 안철수가 가장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단 한가지였다. 여야의 밥그릇 싸움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인한 중도보수의 선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민주주의의 첨병인 미국에서조차 끊임없이 포퓰리스트들이 등장하여 선거에 승리하는 것은 바로 매스컴의 발달로 인해 정당의 기능이 약화되고 탈정당화현상이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의 구멍은 다수의 현명한 선택으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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