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항 1 버지니아 울프 전집 1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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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출항1,2] 나비, 바다를 딛다

 

 

 

 

 

 http://der_insel.blog.me/120160562721

 

수심을 모르는 나비는 바다가 무섭지 않다. 스물넷 아가씨 레이첼에게 산타마리나행 출항은 전아가 뒤흔들리는 충격이었다. 가정교사에게 수업 받고, 자수나 피아노 연주 같은 취미를 갖고, 가끔 집 근처를 산책하는 등 조신하게 자라다가 결혼하는 것이 당대 귀족 딸들의 삶이었다. 딱히 교우도 없는데다 아버지와 고모들의 과보호 속에 자란 레이첼은 더욱 세상과 사람에 무지하였다. <출항>은 버지니아 울프의 첫 장편소설로, 주인공 레이첼에게 자신을 많이 투영했다. 10번을 넘게 고치며 무려 11년에 걸쳐 완성한 <출항>, 처음 쓸 때 레이첼 또래였고 역시 미혼이었던 작가는 30대의 주부가 되어서야 레이첼을 놓을 수 있었다. 레이첼을 통해 그녀는 어떤 꿈과 생각을 담았던 걸까.

 

 

울프의 문학적 관심은 인간 내면 심리와 육체적 고통, 새로운 시도, 여성 해방 등이었다. 그러나 재밌게도 울프는 작정한 이 역작을 가장 트렌디한-당시 유행하던 가정/연애/여행 소설-방법으로 풀어간다. 데뷔작부터 대놓고 파격이 아니라 기성 문학의 틀 안에 본의를 삽입하며 은근한 변형을 꾀하는 전략적 타협을 한 것이다. 순진무구한 귀족 아가씨의 해외여행과 로맨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에 엘리트와 보헤미안이 한꺼번에 덤비는 삼각관계까지 <출항>의 외형은 완벽한 연애소설이다. 하지만 전개 과정과 결말 처리, 세밀한 레이첼의 심리 묘사, 레이첼과 환경(주변 인물) 간의 대비를 통해 작은 혁명을 도모한다. 그래서 <출항>은 연애소설이면서 성장·계몽소설이기도 하다.

 

 

<출항>의 배경이면서 울프 문학 세계의 기저인 빅토리아 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울프는 양 대전이 관통하는 시기에 작품 활동했던 현대 작가이다. 하지만 스무 해 가까이 빅토리아 시대를 경험했고, 시대의 흔적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앞서 말한 <출간> 당시 문학 트렌드는 빅토리아 시대 문학의 여전한 유행이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 제국주의 시대의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가장 풍요롭고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이 시대가 아이러니하게 영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이고 여권은 퇴보했던 시절이다. 활동은 더 제한되고 부인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며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남성 작가로 위장해야 <제인 에어>나 <워더링 하이츠> 같은 ‘위험한’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시대, 수많은 여성들이 자살했다.

 

 

열세 살부터 죽을 때까지 울프를 괴롭혔던 정신병, 발병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지만 여섯 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가족사가 깊은 트라우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후기 빅토리아 시대와 일치한다. 울프에게 빅토리아 시대는 온 몸에 새겨진 모순과 고통의 기억이고 문제의식의 시작이었다. 작가로서 커리어의 시작인 <출항> 집필에 들어가는 때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인 것은 과연 우연일까. 윌로우비에서 체일리까지 <출항> 속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각각 시대의 편린들을 담고 있다. 인물의 관념성이 강하기 때문에, 레이첼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레이첼의 단계별 게임 퀘스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출항>은 무밭을 찾아 바다를 딛는 나비의 날갯짓 같은 소설이다.

 

 

서평으로 문예 활동을 시작했던 울프는 20대 초반에 이미 독서 편력이 상당한 상태였다. 170여 개의 역자 각주의 대부분이 책 얘기일 정도로, <출항>에서 울프는 책들의 나열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울프 문학의 지향점과 대척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레이첼은 여자이기 때문에 고등 지식은 배울 수 없다. 독서도 소설책이나 사교생활에 지장 없는 정도의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랬던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그녀가 내적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되는 책은 입센의 희곡들(정신적 각성)과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지적 성숙)다. 그러나 주변인물들이 그녀에게 권하는 책은 제인오스틴, 이유는 ‘남자처럼 글을 쓰지 않아 영국의 가장 위대한 여성 작가’이기 때문이다.

 

 

레이첼은 자신에 대해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이성의 뻐꾸기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리처드에게 기습 키스를 당하고 나서도 그 느낌이 어떤지 상대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 모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생각들을 정리하고 벌벌거린다. 그래서 레이첼의 첫사랑이 더욱 특별하게 보인다. 산타마리나에서 레이첼은 두 남자를 만난다. 허스트는 스물넷에 집안 좋고 똑똑한 완벽남이고 그녀에게 기번을 알려주지만 당대 남성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스물일곱에 700파운드의 연 수입으로 글 쓰며 지내는 소설가 지망생 휴잇은 자유분방하고 양성적인 독특한 인물인데 여권 등 여러 면에서 레이첼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끌린다.

 

 

그러나 환상적 동지가 되겠다 싶은 기대와 달리 레이첼과 휴잇의 사랑은 ‘무서움’, ‘고통’ 등의 단어로 표현된다. 그들의 관계와 연애는 대단히 기괴하고 특이하다. 두 남녀는 끔찍하게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 도망치려 하고, 끊임없이 생각을 나누고 스스로 고민하며 확인과 혼란을 반복한다. 조력자(헬렌)의 도움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각성하는 봉건 여성 레이첼은 이 단계부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한계는 결말을 통해(자기의지는 아니지만) 더욱 분명해진다. 물결에 전 나비는 지치고 시리다. <출항>의 결말은 울프가 고집했던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현실성 있고 여운이 있지만, 울프도 레이첼도 이 여자들은 왜 이렇게 아플까 일호 부아가 난다(현실의 울프는 공교롭게도-작품 때문은 아님- <출항> 집필 전후 모두 자살을 기도한다).

 

 

울프 문학을 3기로 나눴을 때 초기와 말기는 기존의 전통적 소설 특성이 강하고 문학성으로도 대표작에 비해 저평가 받는다. 그런 점에서 <출항>은 울프 소설 중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의식의 흐름 등 울프 특유의 문체와 기법이 <출항>에서 엿볼 수 있지만 개성이 강하지 않고 구성과 전개도 평이하다. 다른 울프 소설처럼 <출항> 역시 작품의 매력은 문장에 있다. <출항>의 스토리텔링과 인물 설정은 너무나 전형적이고 단순하다(비슷한 장르를 썼던 앞선 시대 작가들의 작품보다 퇴보한다). 번역은 역자가 울프 전공자답게 크게 거부감 없으면서 영어와 울프 문체의 특성과 늬앙스를 잘 살린 편이다. 문장 감상에 더욱 주력하도록 돕기 위함일까, 솔은 친절하게 책 뒤에 등장인물을 전부 정리해(때문에 스포일러 피해가 있지만) 독자의 수고를 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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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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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수영을 위하여]

너와 나를 위한 김수영 ; 자유정신과 자기다움

 

http://der_insel.blog.me/120160369424

 

 

 

 

이 책의 프롤로그가 마뜩지 않았다. 작년, 저자는 한 대학에서의 강연에서 김수영의 시 <김일성 만세>를 읽었다. 그리고 청중들 대부분의 표정에서 불쾌감을 읽었고 이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가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증이라 해석하였다. 너무나 간명하게 인과 관계를 단정하는 이 ‘철학자’의 명쾌함이 조금은 놀라웠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논의의 편의를 위해 단순화시킨 문장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저 대목은 (책 전체를 지배하는) 이 책의 얼굴이자 미래였다. 이 에피소드는 책을 시작하는 ‘문제의식’이고, 전개 내내 놓지 않는 ‘기제’이며, 앞으로 반복할 ‘행동’이다. 결국 어떤 책보다 자유를 강조하고 김수영을 바로 보겠다는 책이지만, 이 책 속에서 편협하다고 비판하는 (김수영에 대한) 평론들과 마찬가지로 ‘저자의 프레임’에 입각한 또 다른 김수영 론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프롤로그는 또한 독자로서의 한계를 인지하게 했다. 독자 역시 자신의 프레임으로 대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자유롭게 자유를 쓰고 읽지만 자유로우면서 자유롭지 않다. 김수영을 만나기 위한 첫번째 각성은 서러운 모순이었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배경지식이 있어야 할까. 늘 시를 가슴으로 읽어오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시인의 삶과 철학을 알면 좀 더 그의 시를 잘 읽을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자신 있게 경애를 말하기 위해 시인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기도 했다. 이런 마음을 한번쯤 품었던 독자라면, 김수영의 전 생애와 그의 작품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서술되어 있고 부록으로 작품집이 달려 있는 <김수영을 위하여>가 무척 당길 것이다. 또한 인문학 강연 수강이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사치인 이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책이다. <김수영을 위하여>는 저자가 홍대 상상마당에서 김수영을 주제로 2시간 반씩 10회 강의했던 것을 강의 원고와 녹취록을 정리하여 책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부록까지 500여 페이지 남짓의 책으로 유명 철학자가 한 1500분의 강의내용을 단숨에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짜릿하다. 한편 이 책은 편집자를 부각시킨 것이 특이하다. 저자와 나란히 지은이와 만든이로 표기된 것만큼 책 속에서 저자와 완전히 대등한 비중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본 책의 노랑 섹션과 부록 전체만큼은 저자 강신주의 책이 아니라 편집자 김서연의 책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는 <김수영을 위하여>를 통해 김수영이 죽은 지 반세기가 넘도록 그의 인문정신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정신적 결핍과 병폐를 꼬집는다. 그리고 김수영스러움의 본질을 ‘자유’로 정의하며, 있는 그대로의 김수영을 읽으려고 한다. 우리가 김수영하면 0.1초 만에 떠올리는 <풀>은 그의 마지막 시였다.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했다. 처녀시를 부정했고 진정한 처녀시를 고민했다. 3개 국어를 능숙하게 했고, 연극을 하다가 시로 전향했지만 시·산문·평론·번역을 종횡무진하였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 분단과 독재 등 질곡의 근현대사를 체험한 산증인 세대 중에서도 포로수용소 생활 등 극단적인 경험을 하였다. 개성은 그대로나 작품 세계가 상당히 다채롭다. (…) 저자는 독자가 그의 해설과 편집으로 나열되고 조합되는 김수영과 김수영스러움을 담뿍 빠져 즐기고 있을 때, 이 책이 철학자가 철학적 관점으로 썼다는 점을 주지시켜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벤야민과 들뢰즈, 바르트와 칸트 등 수많은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저자 스스로의 해석도 제시하면서 독자의 사유와 감상이 더욱 풍부해지도록 돕는다. 김수영은 자유에 ‘이만하면’이란 수사는 붙을 수 없다고 했다. 자유정신은 결핍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온 몸으로 하는 자신다움에의 투쟁,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던 부분이다.

 

 

첫발부터 채인 당황스러움에 내내 긴장과 의문으로 독서해야 했다. 김수영은 허울일 뿐 강신주를 위함이 더 도드라지진 않을지, 이 논의의 귀결(우리가 부족한 김수영의 인문정신-자유정신-의 본질)이 어떻게 될지 말이다. 저자가 모더니티나 민족주의, 참여시인 등 어느 한 면에 초점을 맞추어 김수영을 평가하는 평론가들을 비판했듯이 김수영을 관통하는 것은 자유와 자기다움 그 자체다. 1960년대의 김수영이 남과 북 모두를 비판했고 당시 사회의 크고 작은 불위들에 쓴소리를 했다. 또한 우리가 김수영의 정신에 도달하지 못한 것엔 개인의 자세적 측면 뿐만 아니라 김수영이 50여 년 전 고민하고 비판했던 패악과 악습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도 포함된다. 김수영이 그랬듯 이념과 이해, 제도 등을 떠나 언제나 자유를 위협하는 부당함을 예민하게 알아채고 그에 맞서 싸울 수 있으며 자기다움을 위한 투쟁을 쉬지 않는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예상과 달리 일반론적이고 온건한 전개였고, 저자와 만든이와 대상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제목처럼 김수영을 위함에 충실했다. (은근히 기대했던) 태풍 같은 충격과 각성이 더 없었던 것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내내 있던 (뭔지 모를) 불편함과 체증을 일소하는 에필로그 덕분에 마음이 참 다습고 개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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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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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그리스인 조르바>를 구입하면 미니북을 증정하고 있다. 무려 만부나 제작했단다.

반양장이고 쪽수가 600쪽으로 늘어나는 것을 제외하면

표지와 구성(목차,서지사항 등)이 본책과 동일하다.

 

[그리스인 조르바] 자유가 무어냐고 묻는 이의 벗

 

 

 

*) 이 글은 서평보다 독서록에 가깝게 쓴 저열한 글이다. 그래서 서평자 자신을 이르는 '나'가 마구 튀어나온다. 그런데 <그리스인 조르바>의 화자 역시 '나'로 표기되기 때문에 혼란을 방지하고자 후자의 '나'는 '화자'라는 단어로 임의로 대체해서 쓰겠다.

 http://der_insel.blog.me/120159477423

 

 

따사로운 햇살 가득한 쨍쨍한 날씨, 슬슬 피부가 달아 짜증이 나려할 때 바다가 보내주었을지 모르는 바람에 반갑고 새파란 하늘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다. 수다쟁이 아낙들이 가져온 음식을 먹으며 그 왁자지껄한 골목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나도 과부를 희롱하는 것 같고 서로 부둥킨 살내음이 느껴져 면구스럽다. 갈탄광에서 땀 흘리는 사내들과 어울려 호기롭게 웃기도 한다. 그렇게 크레타 섬의 건강한 일상에 한껏 동화되다가 정신을 차리면 더러는 얼굴 앞과 뒤로 누군가의 정수리내와 입김이 스멀대는 출퇴근길 지하철 안, 더러는 혼자 밥을 먹던 식당 안 혹은 방 안 책상이나 침대이다. 그리고 책장을 덮는 순간 다시 이번 달 대출상환금은 문제 없을까라든가 주말에 짝꿍이라 뭐할까라든가 하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고민들에 구속된다.

 

 

가장 최근에 자유에 대해 내린 결론은 단어로 치면 ‘죽음’이었고 이미지로 치면 최인훈의 <광장> 속 중립국으로 가는 배 안이었다(20대 초반이었다면 그에 피의 이미지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더해졌을 것이다. 자유를 위해, 자유의 이름으로 죽어나간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살아있는 한 인간은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언제나 제약 하 제한된 자유의지다. 가족, 생업, 학벌, 욕망, 건강수준 등 수많은 구속이 살아있는 우리를 옭아맨다. 이런 논리대로 절대자유가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동경심은 생기지 않는다. 구속이 황홀하다. 이들이 삶의 당위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개인의 모든 인위적 행위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지극히 개똥철학이지만 이러한 결론으로 삶의 자세도 바뀌었고, 자살에 대한 입장도 확실하게 정리하게 되었다. 벌써 몇 년 전 일이다.

 

 

자유의 문제는 파고들수록 형이상학적이기도 하거니와 당장의 일상에 치이고 배가 고플 땐 쉽게 떠올리기 힘들다. 그런 핑계로 나는 꽤 오랫동안 자유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던 때에 이 책을 만났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내내 자유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했다. 조르바의 존재는 ‘살아 있는 자유’ 그 자체, 그는 인간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최대의 자유를 보여준다. 카잔차키스의 분신이기도 한 작중 화자가 그와의 만남을 통해 크게 각성하듯 나 역시 조르바를 접하고 그의 행보 면면을 보면 볼수록 흥분하였다. 앞서 말한, 몇 년 전에서 갱신되지 않은 나의 자유관을 일거에 깨뜨리거나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며 본문에서 해설까지 480쪽의 페이지를 넘기는 이 시간을 즐겼다. 참 오랜만에 서아일체되어 치열하고 끊임없이 책과 문답하였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음식, 술, 여자와 춤)는 그의 건강하고 왕성한

몸에서 사라지거나 둔화되는 날이 없었다. -p.182

우리에게는 그토록 편리한, 자질구레한 덕성이 그에겐 없었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만족을 모르는 극히 불쾌하고 위험한 덕성뿐이어서 이런 상태가 그를

극한과 지옥의 나락으로 끊임없이 충동질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pp.222-223

 

 

화자의 표현대로 조르바는 어떤 구속도 인지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특별한 거처 없이 오만 동네를 떠돌며 숙식을 해결하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사람들을 사귄다. 65세지만 청년의 정력과 정신으로 노인의 육체를 초월한다. 그는 늙은 우리들에게 숨겨진 소년소녀를 깨울 줄 아는 사람이고, 죽은 영혼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조르바의 시대와 그리스는 정치적 혼란기였고 전쟁이 관통한다. 그러나 <그리스인 조르바>에선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현대 초의 어느 날이란 생각은 들지만 묘사되는 풍경들이나 조르바의 삶은 탈 시대적이다. 조르바의 현자성을 더욱 강조하고 이야기의 본질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한 카잔차키스의 의도적 전략이었을까. 아무튼 그 자자한 명성이 이해되고, 참으로 유쾌하면서도 철학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이를 위험하게 받아들인 측도 있다. 금서에 오르기까진 않았지만 <그리스인 조르바> 역시 신성모독을 이유로 교황청과 정교회의 미움을 산다.

 

 

책상물림 글쟁이던 화자가 갈탄채취사업을 하러 크레타 섬에 가던 중 조르바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훗날 그에 관한 책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내용처럼 조르바는 실존인물이고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삶과 그를 직접 만나 겪었던 경험을 한 권의 책으로 박제했다. 카잔차키스가 34살에 갈탄채취 인부를 고용하려다 만나게 된 조르바, 그렇다고 그들이 소설 속의 화자와 조르바가 아니듯 실제의 카잔차키스와 조르바의 만남은 시대적 격동과 정치성에 노출된다. 카잔차키스는 호로메스, 니체, 베르그송과 함께 자신의 인생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조르바를 든다. 하지만 소설 속 조르바가 비범하지만 일반인인 것처럼 실제 조르바 역시 카잔차키스가 우연히 만난 기인일 뿐 널리 알려진 위인은 아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란 작품의 존재가, 그리고 현재 그의 딸이 생존해있고 카잔차키스 기념관에 조르바가 보낸 편지가 있다는 사실 정도가 그의 존재를 증명할 뿐이다.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의 등장인물 나가사와의 입을 통해 <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읽는 사람이면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내게 그런 작품이 있다면 이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 책을 읽게 된 결정적 계기도 한 조르바 삼독론자의 얘기 때문이었다. 모 라디오 방송에 시인이자 달(문학동네 임프린트 중 하나)의 대표인 이병률이 출연한 적이 있는데 평생 한 권의 책만 볼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고르겠냐는 질문에 언젠가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배 위에서 이 책을 독서법을 달리하며 3번 읽었다면서 단 한권의 책만 읽을 수 있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를 선택하겠다는 그의 말이 참 솔깃했다. 그리고 일독 후 받은 느낌과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의미로 다가오거나 다시 찾게 하는 문장들 때문에 다시 읽기가 기대된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내 스스로가 더욱 이 작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이독삼독할 것이다. 그리고 믿는다. 조르바는 자유가 무어냐고 묻는 이에게 늘 기꺼이 찾아와 벗이 되어 줄 것이라고.

 

 

뒤늦게나마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고 행운이다. 그리스 현대문학을 접할 수 없는 우리에게, 카잔차키스가 있어서 그리고 열린책들 덕분에 영역본 중역인 건 아쉽지만 적어도 그의 작품은 전부 읽을 수 있어 다행이다. 해외에선 그를 철학자(사상가)로 보는 시각도 많다. 카잔차키스는 평생 소위 ‘3단계 투쟁’으로 명명되는, 영혼의 편력과 투쟁에 매진했다. 그 최종의 본질은 자유와 자기해방이었다. 종교를 넘나들고 온갖 곳을 여행하고 물질과 비물질 등 모순개념을 탐구한 흔적들을 문학으로 남겼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런 카잔차키스의 자유관과 문학성향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일독하는 내내 생각했던 자유, 결국 <그리스인 조르바>의 결말에서 상념들이 엉클어져 나의 마지막 자유관을 고치지 못했다. 하지만 미미한 성과일지언정 큰 울렁임과 수없는 고민들은 결코 무의미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번엔 미처 찾고 깨닫지 못한 '조르바의 자유'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며,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생각해본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ν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Den elpízo típota, den fovúmai típota, eímai eléftheros.)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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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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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나면서 주요 대형 출판사들이 일제히 헤밍웨이 작품 번역에 들어간 것에 낭비라고 못마땅한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자본력과 기획력으로 번역해줬으면 하는 국내 미소개 외국 문학 작품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특히 <노인과 바다>는 아무리 지금껏 정식 판권본이 없다고 해도 수십년 간 무수한 번역본이 쏟아져 나왔던 작품이기에 소식만 들어도 또 헤밍웨이야, 또 <노인과 바다>야라고 질리는 감도 없지 않다.

 

누구나 원전을 판권 확보 없이 마음껏 쓰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도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만, 자기 출판사만의 번역본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도 작업을 선택하곤 한다. 그 번역본의 결과물이 타 출판사보다 양질이라면 금상첨화. 그리고 이미 번역본이 많은 유명 작품을 또 번역한다는 것은 대박은 커녕 레드오션 중 레드오션이지만 작품 자체의 명성 때문에 어떤 번역본이든 어느 정도 판매는 보장되기 때문에 은근히 안정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첫 문단에서 언급한 이유로 올해부터 나오는 <노인과 바다> 번역본들은 기존의 번역본이 많음에도 원점에서 출발하는 것과 비슷한 경쟁을 한다. 단기적으론 얼마나 빨리 출판했고 마케팅을 잘했는지 등이 관건이다. 그리고 독자(소비자)들에게 더 어필하기 위해 외형적인 스펙에 신경 쓴다(특히 후발주자일수록 불리하므로 더).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땐 얼마나 본문의 번역이 오역 없이 잘 되어 있는지가 승자의 관건이 될 것이다.

 

2012년 <노인과 바다> 전쟁에서 두번째로 출전한 문학동네 선수. 출간일에서도 해설 양이나 번역자 인지도 및 전문성에서도 타 출판사본의 스펙을 이기지 못해 불리했다. 물론 섹시한 표지 때문에 고정 충성층을 확보하고 있긴 하지만, 고정 충성층은 가진 타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도 몇 있다. 외모 무기에 예약판매로 승부를 건 문학동네의 단기 마케팅 전략의 꽃은 영문 원서 증정이다. 예약판매자 전원과 초기 구매자 선착순에게 증정되는 이 원서(아쉽지만 2월7일 현재 전량소진)는 국역판과 같은 디자인과 문장(물론 영문)으로 컬렉션 가치를 더욱 높인다.

 

<노인과 바다> 작품 자체에 대한 서평은 따로 글을 썼기에 문학동네본의 주요 특징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쓴다.

노인과 바다 작품 리뷰>> [노인과 바다] 투쟁하는 모든 존재에게 보내는 불멸의 우화 

 

 

<노인과 바다>의 영어 원서는 그 동안 스크리브너사가 독점 출판하였다. 그러나 이 출판사는 지난 반세기 간 여러 번 판형을 바꿔 쇄를 거듭했을 뿐 오탈자(누가 봐도 명백한)를 방치하였다. 문학동네는 번역의 원전을 스크리브너사 2003년판으로 삼았는데, 지금 증정하는 한정 원서는 스크리너사 2003년판 원문 그대로가 아니라 편집부에서 검토해 그 오탈자를 모두 고친 버전이다. 혹시 읽으면서 오타 또 찾아내면 문학동네에 신고하시길.

해설에서 차별점은 연표에 청새치로 찍은 사진 정도. 그 외엔 분량이나 내용이나 무난하다. 본문을 압도하는 장문의 해설, 논문 수준의 개인적 연구가 많이 반영된 해설 수록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은 선호할 듯.

 

슬슬 번역에 대한 말들이 인터넷에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헤밍웨이는 최대한 단문에 형용사·관형사 등 수식어구를 배제한 하드보일드 문체를 지향한다. 그래서 굉장히 깔끔하고 짧다. 문제는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언어와 문법 차이를 극복하면서 헤밍웨이의 문체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는 우리말로 표현하기 위해서 원문에 없는 단어를 첨가하거나 임의로 문장을 나눠서 번역해야 헤밍웨이스러운 간결한 문장에 말이 되게 번역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을 선택할지는 절대적인 번역의 질보다 독자의 취향과 번역관에 더 달려 있다.

 

아무래도 보름 차이로 출간되었고 가장 최근 출간본이기 때문에 민음사와 문학동네의 번역본을 서로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민음사의 번역본과 비교해 문장의 길이가 좀 더 길고 부드러운 문체이며 번역투가 심하다는 평을 한다. 다르게 해석하면 전자가 헤밍웨이의 문체와 우리말스러움에 초점을 둔 번역이라면 후자는 원전주의를 택했다고 볼 수 있어 두 출판사 각 번역의 특성 차이일 뿐 무조건 단점으로 몰아 붙이긴 힘들다고 생각한다. 물론 민음본도 번역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고 문학동네본도 원전 문장을 임의로 쪼개거나 첨언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가독성과 건조함은 포기하는 대신 원문대로 번역하려 한 느낌,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영어 문장이 절로 겹쳐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다 이번 주 서평책을 <노인과 바다>로 정하면서 번역본을 몇 개를 읽었는지 모르겠다. 소장한 <노인과 바다>만 여섯 권이니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살핀 것과 어릴 적 읽었던 것까지 합치면 휴. 그런데 문학동네본을 읽던 중에 한 단어에서 멈췄다. dolphin을 만새기로 번역했고 역자의 말에서도 이 부분을 이 번역본의 핵심으로 꼽은 것이다. 읽다가 멈칫한 이유는 dolphin을 돌고래가 아닌 만새기로 표현한 번역본을 처음 봤기 때문. 

 

만새기: 조기강 농어목 만새기과 / 감성돔: 조기강 농어목 도미과 / 돌고래: 포유강 고래목 돌고래과
국어사전과 학명으로 보면 명백히 다르게 구별되는 어종이 영어사전과 스페인어사전으로 들어가면 골치아파진다.

dolphin: 돌고래, 만새기
dorado 영어사전으론 만새기 스페인어사전으론 흑도미의 남성형
delfin 스페인어사전으로 돌고래,만새기
흑도미=감성돔의 북한어
감성돔 영어사전으론 black porgy 스페인어사전으론 dorado

너무 궁금해서 돌고래와 만새기 중 뭐가 맛없나로 검색해보기까지 한다.

원문 전체에 구체적인 설명 없이 노인이 다랑어 다음에 잡은 고기가 dolphin으로 표기하고 유일한 단서는 dorado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역자도 충분히 헷갈릴만한 부분이라 생각하였다. dorado의 주석도 이인규 역은 만새기의 스페인어 표현이라 달았으나 타 번역본은 돌고래의 스페인어 표현이라 달았다.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내가 편집적 기억한 감이 없지 않았다. <노인과 바다>는 리얼리티 면에서 스페인어 단어와 묘사가 잘못된 부분이 꽤 있는 작품이라기에 디테일에 그렇게 집착해 읽지도 기억하지도 않고 넘겼던 것이다. dolphin에 대해 책 속에 묘사들이 몇 있고 porpoise란 단어가 나오기도 해서 그걸 감안하면 만새기쪽에 더 마음이 기운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이미 학계에서 결론난 부분이었고 이에 대해 문학동네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글을 올렸다.

 

만새기에 대한 얘기 뿐 아니라, 이번 '책장' 포스트에 언급한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의 <노인과 바다> 번역본 검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이번 번역의 뒷얘기도 알 수 있다.

dolphin, 돌고래야 만새기야? 『노인과 바다』번역에 대하여 (::문학동네::)

dolphin, 돌고래야 만새기야? 『노인과 바다』번역에 대하여 2탄! (::문학동네::)

<노인과 바다> 역자 관련, 개인소장용 자료 풉니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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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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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뜬다] 태양이 지면 다시 뜰 뿐, 잃은것은 없다

 

 

 

두 가지 의의에서 탐독했던 책이다. 하나는 청년 헤밍웨이를 만나고 싶었고 다른 하나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에 사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8주 만에 초고 완성, 6개월의 집필 끝에 완성했다고 전해지는 헤밍웨이의 첫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뜬다>, 헤밍웨이가 인기작가로 발돋움한 출세작이자 그의 문학의 원형(신인 시절의 작품들을 뒤로 하고 이 소설부터 빙산 이론과 하드보일드 문체 등을 확립한다.)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1926년에 출간된 이 소설 때문에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란 개념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후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헤밍웨이 또래 세대(1890년대 출생자; 특히 지식인과 예술가)를 정의하는 당연한 용어가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 생각했던 1920년대 미국의 이미지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나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 같은 모습이었다. 전쟁과 사회에 대한 환멸, 화려한 뉴욕, 지극히 일상적이고 잡기적인 탐닉들, 자유분방한 청년들과 잦은 파티들, 재즈의 유행 등 말이다. 당대 문화계의 거물이자 청년 헤밍웨이의 중요 멘토였던 스타인은 <태양은 다시 뜬다>의 제사(題詞)로 “You are all a lost generation.”라는 문장을 썼다(그녀가 창조한 말은 아니지만). '길 잃은', ‘잃어버린’, ‘망쳐버린’의 부정적 뉘앙스가 담긴 이 말은, 후에 이 세대를 분석하면서 내리고 정의한 복잡한 설명들보다 ‘언제나 젊은 애들은 답이 없는’ 만고불변의 관념처럼 단순 당시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은근히 비꼬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일 때문이었을까, 스타인과 헤밍웨이의 돈독했던 관계는 그다지 오래 갔다고 하진 않는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말년에 30년도 지난 일을 다시 꺼내 글을 쓴다.(미완성 유작 <이동축제일(1964)>/국내엔 올해 <파리는 날마다 축제>란 제목으로 이숲에서 초역). 헤밍웨이는 반박의 의미로 스타인의 제사 아래 구약성경 전도서의 한 대목을 덧붙인다. 그리고 거기서 책의 제목도 딴다. '태양은 다시 뜬다(The sun also rises)'고. 로스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은 현대 미국 문학의 중심점이었다. 학창시절 디킨스, 스티븐슨, 키플링 등의 문학을 배우고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파리에서 플로베르, 스타인, 파운드, 조이스 등에 영향 받고 습작하며, (프랑스 문학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문학을 흡수해 미국에 전한다. 그리고 미국 문학의 입지와 독자성을 높여 오늘날 현대 미국 문학을 공고히 다지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헤밍웨이 청년시기의 배경지식을 알고 나면 케네디가 왜 헤밍웨이를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기록자이자 이들을 불후의 세대로 끌어올렸다고 표현했는지 십분 이해된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시작이면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러한 명명을 반박하기 위해 쓴 작품인 <태양은 다시 뜬다>, 기대감에 책을 펼치고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역으로 기성세대를 공격하는 것도 없고, 젊은 세대들의 가치와 생명력을 피력하는 것도 없고, 그렇다면 언젠가 태양은 다시 뜨겠지 하고 열심히 읽었으나 기다리는 것은 지극히 열려 있는 결말이다. 게다가 내용은 위에 언급했던 1920년대 미국 문학과 젊은이들의 모습들에 대해 흔히 떠올리는 전형이다. 파리로 친구들이 모여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놀고 떠들고 남녀 관계가 얽힌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도 철저히 대사 위주의 보여주기 기법으로.

 

 

<태양은 다시 뜬다>는 읽는 내내 헤밍웨이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참 많다. 주인공들의 일상과 여행 자체가 헤밍웨이의 파리 시절을 압축하고 있는 것처럼, 파리에 오만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주인공들의 여행 종착지는 헤밍웨이가 첫 아내와 세 번이나 여행 갔던 스페인의 팜플로나다. 주인공 제이크는 헤밍웨이처럼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매년 여름마다 스페인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의 친구인 빌과 콘은 작가다. <태양을 다시 뜬다>는 ‘아무리 분석해도 작품의 본질을 다 담지 못한다’는 호평을 받은 작품, 그만큼 젊은 작가들 특유의 패기와 혁신성이 엿보이는데다 온갖 은유에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절판된 적 없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작품 중 하나이고, 글로 묘사된 브렛의 패션이 엄청난 유행이었으며, 이 소설 때문에 팜플로나의 투우가 유명해져 방문객 규모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는 출간 후일담들에 다소 고개가 갸우뚱했다. 다른 독자들은 다 쉽게 읽었던 건가?

 

 

물론 마음먹으면 충분히 단순하고 흥미 위주로 접근할 수 있다. 참전 중 부상으로 고자가 된 주인공 제이크는 자신의 상황에 애써 태연한 척 하면서도 애인 브렛과의 육체적 관계 문제로 고민이 많다. 안 그래도 브렛은 두 번의 결혼 경력에 약혼자가 있어 제이크가 늘 불안해하는데 나중엔 친구 콘이 자기 애인과 헤어지고 밀월여행을 다녀오질 않나 투우사 로메오와도 사랑에 빠지니 미칠 지경이다. 이렇듯 <태양은 다시 뜬다>는 제이크 시점의 1인칭 소설로 큰 사건 없이 여행과 사랑을 주제로 전개된다. 헤밍웨이가 추구한 문학이 완성되는 마지막 장편 <노인과 바다>와 시작이었던 이 첫 장편 <태양은 다시 뜬다>의 미묘한 특징 차이를 비교하거나, 욕도 하고 종이를 뚫고 나오는 주인공들의 젊음과 청춘의 고민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 소설을 읽으며 얻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한편 이 책은 헤밍웨이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 뿐 아니라 평소 역자 선호도에 대해 재고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문학 번역은 해당 언어와 문학을 전공한 교수 번역을 가장 선호하는 독자로서, 영문학자는커녕 전공자도 아닌 일반 전문번역가가 번역한 한겨레의 <태양은 다시 뜬다>를 선택한 이유는 이 작품을 번역하며 수많은 자료 조사를 하며 비전공자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역자의 노력이 느껴진 번역본이었기 때문이다. 역자는 스톤백 교수의 <태양은 다시 뜬다> 연구를 중심으로 지도와 사진 자료를 수록하며, ‘순례 모티브’와 그 외 배경지식(기본 해설, 연보)을 담은 45페이지 가량의 해설을 썼다. 또 210개의 각주를 원문 단어와 함께 본문과 함께 수록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높였다.

 

 

이 작품을 단순 당대 트렌디 소설로도, 사랑에 관한 모든 것으로도, 제임스와 주변 인물들의 일상과 심리를 통해 전후세대, 고국이탈자로 불렸던 1920년대 젊은이들이 불안·고민·실존주의적 탐구로도, 산티아고 순례처럼 종교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즉 <태양은 다시 뜬다> 역시 건조하고 행간이 많아 다양한 감상이 가능한, 전형적인 헤밍웨이 작품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 관심 있다면 서평이나 논문 읽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반드시 각자의 감상을 찾길 바란다. ‘다시 뜨는 태양’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다. 혹자는 제이크의 존재 자체나 낚시나 투우로 상징되는 소설 속 몇 에피소드들이 좌절치 않고 전진하는 희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으론 헤밍웨이는 어떤 거창한 반론이나 의미 부여보다는 그저 당시 청춘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자신 세대의 존재를 증거하고 영원으로 남기는 것이 스타인의 명명에 대한 대답이었을지도 모른다. We were here, 우리가 여기 있었노라고.

 

 

더 보기>> http://der_insel.blog.me/12015196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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