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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1 ㅣ 버지니아 울프 전집 1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출항1,2] 나비, 바다를 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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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을 모르는 나비는 바다가 무섭지 않다. 스물넷 아가씨 레이첼에게 산타마리나행 출항은 전아가 뒤흔들리는 충격이었다. 가정교사에게 수업 받고, 자수나 피아노 연주 같은 취미를 갖고, 가끔 집 근처를 산책하는 등 조신하게 자라다가 결혼하는 것이 당대 귀족 딸들의 삶이었다. 딱히 교우도 없는데다 아버지와 고모들의 과보호 속에 자란 레이첼은 더욱 세상과 사람에 무지하였다. <출항>은 버지니아 울프의 첫 장편소설로, 주인공 레이첼에게 자신을 많이 투영했다. 10번을 넘게 고치며 무려 11년에 걸쳐 완성한 <출항>, 처음 쓸 때 레이첼 또래였고 역시 미혼이었던 작가는 30대의 주부가 되어서야 레이첼을 놓을 수 있었다. 레이첼을 통해 그녀는 어떤 꿈과 생각을 담았던 걸까.
울프의 문학적 관심은 인간 내면 심리와 육체적 고통, 새로운 시도, 여성 해방 등이었다. 그러나 재밌게도 울프는 작정한 이 역작을 가장 트렌디한-당시 유행하던 가정/연애/여행 소설-방법으로 풀어간다. 데뷔작부터 대놓고 파격이 아니라 기성 문학의 틀 안에 본의를 삽입하며 은근한 변형을 꾀하는 전략적 타협을 한 것이다. 순진무구한 귀족 아가씨의 해외여행과 로맨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에 엘리트와 보헤미안이 한꺼번에 덤비는 삼각관계까지 <출항>의 외형은 완벽한 연애소설이다. 하지만 전개 과정과 결말 처리, 세밀한 레이첼의 심리 묘사, 레이첼과 환경(주변 인물) 간의 대비를 통해 작은 혁명을 도모한다. 그래서 <출항>은 연애소설이면서 성장·계몽소설이기도 하다.
<출항>의 배경이면서 울프 문학 세계의 기저인 빅토리아 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울프는 양 대전이 관통하는 시기에 작품 활동했던 현대 작가이다. 하지만 스무 해 가까이 빅토리아 시대를 경험했고, 시대의 흔적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앞서 말한 <출간> 당시 문학 트렌드는 빅토리아 시대 문학의 여전한 유행이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 제국주의 시대의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가장 풍요롭고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이 시대가 아이러니하게 영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이고 여권은 퇴보했던 시절이다. 활동은 더 제한되고 부인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며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남성 작가로 위장해야 <제인 에어>나 <워더링 하이츠> 같은 ‘위험한’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시대, 수많은 여성들이 자살했다.
열세 살부터 죽을 때까지 울프를 괴롭혔던 정신병, 발병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지만 여섯 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가족사가 깊은 트라우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후기 빅토리아 시대와 일치한다. 울프에게 빅토리아 시대는 온 몸에 새겨진 모순과 고통의 기억이고 문제의식의 시작이었다. 작가로서 커리어의 시작인 <출항> 집필에 들어가는 때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인 것은 과연 우연일까. 윌로우비에서 체일리까지 <출항> 속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각각 시대의 편린들을 담고 있다. 인물의 관념성이 강하기 때문에, 레이첼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레이첼의 단계별 게임 퀘스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출항>은 무밭을 찾아 바다를 딛는 나비의 날갯짓 같은 소설이다.
서평으로 문예 활동을 시작했던 울프는 20대 초반에 이미 독서 편력이 상당한 상태였다. 170여 개의 역자 각주의 대부분이 책 얘기일 정도로, <출항>에서 울프는 책들의 나열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울프 문학의 지향점과 대척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레이첼은 여자이기 때문에 고등 지식은 배울 수 없다. 독서도 소설책이나 사교생활에 지장 없는 정도의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랬던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그녀가 내적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되는 책은 입센의 희곡들(정신적 각성)과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지적 성숙)다. 그러나 주변인물들이 그녀에게 권하는 책은 제인오스틴, 이유는 ‘남자처럼 글을 쓰지 않아 영국의 가장 위대한 여성 작가’이기 때문이다.
레이첼은 자신에 대해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이성의 뻐꾸기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리처드에게 기습 키스를 당하고 나서도 그 느낌이 어떤지 상대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 모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생각들을 정리하고 벌벌거린다. 그래서 레이첼의 첫사랑이 더욱 특별하게 보인다. 산타마리나에서 레이첼은 두 남자를 만난다. 허스트는 스물넷에 집안 좋고 똑똑한 완벽남이고 그녀에게 기번을 알려주지만 당대 남성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스물일곱에 700파운드의 연 수입으로 글 쓰며 지내는 소설가 지망생 휴잇은 자유분방하고 양성적인 독특한 인물인데 여권 등 여러 면에서 레이첼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끌린다.
그러나 환상적 동지가 되겠다 싶은 기대와 달리 레이첼과 휴잇의 사랑은 ‘무서움’, ‘고통’ 등의 단어로 표현된다. 그들의 관계와 연애는 대단히 기괴하고 특이하다. 두 남녀는 끔찍하게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 도망치려 하고, 끊임없이 생각을 나누고 스스로 고민하며 확인과 혼란을 반복한다. 조력자(헬렌)의 도움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각성하는 봉건 여성 레이첼은 이 단계부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한계는 결말을 통해(자기의지는 아니지만) 더욱 분명해진다. 물결에 전 나비는 지치고 시리다. <출항>의 결말은 울프가 고집했던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현실성 있고 여운이 있지만, 울프도 레이첼도 이 여자들은 왜 이렇게 아플까 일호 부아가 난다(현실의 울프는 공교롭게도-작품 때문은 아님- <출항> 집필 전후 모두 자살을 기도한다).
울프 문학을 3기로 나눴을 때 초기와 말기는 기존의 전통적 소설 특성이 강하고 문학성으로도 대표작에 비해 저평가 받는다. 그런 점에서 <출항>은 울프 소설 중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의식의 흐름 등 울프 특유의 문체와 기법이 <출항>에서 엿볼 수 있지만 개성이 강하지 않고 구성과 전개도 평이하다. 다른 울프 소설처럼 <출항> 역시 작품의 매력은 문장에 있다. <출항>의 스토리텔링과 인물 설정은 너무나 전형적이고 단순하다(비슷한 장르를 썼던 앞선 시대 작가들의 작품보다 퇴보한다). 번역은 역자가 울프 전공자답게 크게 거부감 없으면서 영어와 울프 문체의 특성과 늬앙스를 잘 살린 편이다. 문장 감상에 더욱 주력하도록 돕기 위함일까, 솔은 친절하게 책 뒤에 등장인물을 전부 정리해(때문에 스포일러 피해가 있지만) 독자의 수고를 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