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인문학 1 - 현실과 가상이 중첩하는 파타피직스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1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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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1]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키워드 ‘파타피직스’

 

 

 

 

어느새 ‘디지털’이라는 낱말은 낡은 것이 되었다. ‘디지털’이라는 말을 듣기 힘들어진 것은 디지털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로 아날로그 매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 p.007

 

‘인문학 위기’란 결국 텍스트에 기초한 고전적 인문학의 위기다. 정보의 저장 및 전달의 매체가 달라졌다. 과거에는 책이 사람을 형성했다면 오늘날 인간의 의식은 영상으로 빚어진다. 텍스트 중심의 인문학은 이제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 속에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이는 이미지에 기초한 새로운 유형의 인문학을 요청한다. - p.008

 

미디어는 세계와 인간을 매개하면서, 동시에 그 둘을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세계와 인간은 미디어와 더불어 공진화한다. 이렇게 변화한 세계는 과거와는 다른 ‘존재론’을 요구하며, 그렇게 변화한 인간은 과거와는 다른 ‘인간학’을 요구한다. - p.009

 

저자는 현재를 포스트디지털 시대로 규정하고, 포스트디지털시대의 디지털인문학은 기존의 디지털인문학과 다른 프레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든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키워드는 ‘이미지’다. ‘이미지를 못 읽는 자가 미래의 문맹자가 될 것’이라는 그의 촌철살인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니콜라스 카 등 디지털 트렌드 전문가들의 분석과 궤를 같이 한다. 이 책의 아이디어는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의 논문에서 시작하였다. 기본적으로는 2008년부터 ‘디지털 미학과 미디어 미학’을 주제로 기술미학연구회와 함께 진행했던 각종 연구와 토론, 원고들을 바탕으로 하나 이번에 단행본화하면서 대폭적으로 수정, 가필하였다. 미학자인 동시에 이 시대 대표적인 논객으로서, 특히 PC통신에서 트위터까지 온라인매체를 십분 이용해왔던 그이기에 더욱 이러한 주제를 잘 파고들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지 인문학1>은 크게 두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미술작품 감상을 통한 포스트디지털예술과 이미지미학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동향과 풍경들이다. 그를 통해 궁극적으로 ‘디지털 혹은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을 구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자 ‘이미지 인문학’이다. 제목에서 알아차릴 수 있듯 이 책은 한권으로 끝나는 책이 아니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키워드가 다르다는 점-1권의 키워드는 ‘파타피직스’, 2권의 키워드는 ‘언캐니’-을 제외하면 각 권의 구성은 유사하다. 다만 1장과 3장 때문에 <이미지 인문학1>이 좀 더 개관적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면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 ‘파타파직스’는 무엇일까. 프랑스 작가 알프레드 자리가 주창한 개념으로 일종의 사이비 과학을 의미한다.

 

 

‘상상력’으로 설명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디지털 시대의 주요 키워드는 메타포, 하이브리드, 하이퍼텍스트 등이었다.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영역과 여지가 거의 없어진 시대, 끊임없는 변주와 새로운 매체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창조자들의 숙명이다. 이러한 논의가 있은 지는 불과 수십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진중권의 분석에 따르면 그 시대도 벌써 종언했으며 지금의 디지털 시대는 완전히 다른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미지 인문학1>을 읽으며, 과거 구디지털 시대는 모더니티와의 결별이 아닌 모더니티와 현재의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교두보로서의, 일종의 포스트모더니즘 ‘이행기’는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하였다. 진중권의 지적처럼 메타피직스(형이상학)와 메타포(은유)가 구디지털 시대만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은가.

 

 

[1장 中] 첫째 전설에서는 인간이 가상으로 걸어 들어가고, 둘째 전설에서는 가상이 현실로 튀어나오고, 셋째 전설에서는 가상이 살아 움직인다. 이 세 가지는 이미 기술적으로 실현되었다. 이 첫째 마술을 우리는 ‘가상현실’이락 부른다. 이른바 ‘몰입기술’을 통해 현실의 주체는 가상의 세계에 입장한다. 둘째 마술은 ‘증강현실’이라 불린다. 여기서는 영상인식, 위치추적 등을 통해 가상의 좌표를 현실적 좌표와 매치함으로써 가상이 현실적 공간에 중첩된다. 셋째 마술은 ‘인공생명’이라 부른다. 오늘날 이미지는 ‘진화 알고리즘’을 통해 스스로 증식하고 진화한다. 디지털 이미지는 살아서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이미지다. - p.063

 

[2장 中]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사진은 지표성을 잃었다. 디지털 사진은 복제가 아니라 생성이나 합성의 이미지다. (...) 디지털 사진은 현실의 ‘사본’이 아니다. 그것을 여전히 ‘재현’이라 부른다면 그것이 재현하는 현실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컴퓨터로 만들어진 합성 이미지는 우리 현실을 열등하게 재현한 것이 아니라 다른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 우리의 현실은 이미 현재와 잠재가 어지럽게 뒤섞인 혼합현실이다. ‘가상현실’은 어느새 ‘현실가상’이 되고 있다. - p.109

 

[3장 中] 과학과 기술을 전유한 상상력이라는 면에서 파타피직스는 과학과 기술을 적대시하던 과거의 낭만주의적 상상력과는 구별된다. 외려 과학과 기술을 상상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빌렘 플루서가 말하는 ‘기술적 상상력’애 근접한다. 다만 이 기술적 상상력을 진지한 목적이 아니라 지적 농담에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파타피직스의 본질을 이루는 과학기술과 시적 상상력의 융합은, - p.125

 

[4장 中] “디지털 이미지는 전통적 사진의 시각적 사실주의보다 열등하지 않다. 완벽하게 사실적이다. 오히려 너무 사실적이다.” 디지털 이미지의 과도한 선명함은 (...) “인간의 시선보다 더 완벽한 어떤 다른 시각”, 즉 “컴퓨터의 시각”에서 나온다. 컴퓨터의 눈으로 세계를 재현하는 것은 그저 재현의 옛 방식을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 리얼리즘을 지향하든 포토리얼리즘을 지향하든 디지털 이미지가 보여주는 현실은 언제나 ‘낯설게’ 나타난다. 그것은 디지털 이미지가 전통적 사진을 모방하는 데서 벗어나 이미 고유의 미학을 추구하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 p.253

 

[5장 中] 미디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디지털은 사진의 기록적 성격을 파괴한다. 이로써 조롱당하는 것은 역사,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주의 의식이다. (...) 역사는 상징계에서 상상계로 거처를 옮기고 있다. 사실은 허구로, 증명은 날조로, 진리는 오락으로 대체된다. (...) 관거에 역사는 해방된 미래를 위해 피억압자의 기억을 조직하는 행위였으나, 디지털 부족에게 과거는 사극의 재료요, 미래는 SF의 배경일 뿐이다. 역사는 무엇인가? 그것은 환상의 재료, 허구의 배경이자 농담의 소재일 뿐이다. - pp.312~313

 

플루서의 지적처럼 디지털 시대의 상상력은 ‘기술적 상상력’이다. 그리고 파타피직스가 도래한 디지털 시대의 심화기, 탈지디털 시대는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는 파타포의 세계이다. 실제로 지어지지 않을 가설적 건축 프로젝트 ‘아키그램’이나, 존재하지 않는 대학의 교수를 자처하며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의 음악작품을 발굴해 발표하는 작곡가 피터 시켈레, 만화의 주인공을 예언자로 모시는 패러디 교회 ‘서브지니어스 교회’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중권이 포스트디지털 시대, 파타피직스의 예로 드는 것 중 상당수가 20세기(심지어 초중반까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디지털 이전의 포스트디지털적 특성, 시대 구분의 무의미성, 진중권의 안내에 따라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면면을 확인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역시나 동시대를 스스로 정의할 수는 없는 건지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의 무책임할 만큼 광범위하고 근본 없음처럼 탈디지털 시대의 특성 역시 가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의 중첩 속에 생동하고 있는 (역사의)‘흐름’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미지 인문학1> 책 전체도 하나의 파타피직스 놀이처럼 여겨질 정도다. 흥미를 돋우는 예술 작품 해석,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설명, 그래서 다루는 주제와 내용을 감안했을 때 생각보다 대단히 편하게 읽게 되는데 얼마만큼 많이, 정확히 이해하느냐는 독자의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일 듯싶다. 모든 인문학이 그러하듯.

 

 

어쨌든 <이미지 인문학1>을 통해 누구나 얻어갈 수 있는 보편적인 것들이 있는데, 가장 꼽을 수 있는 것은 (물론 해외 예술가와 작품 예시도 많지만) 한상필, 이명호, 정홍섭, 안상석 등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과 현재 트렌디한 예술작품의 감상법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2권이 궁금해지게 하는 ‘언캐니’ 개념과 ‘게이미피케이션’이라는 대중적 파타피직스 놀이 개념을 들 수 있다. 두 개념 모두 관련 단행본이 예정되어 있다는 공통점(전자는 <이미지 인문학2>, 후자는 <게이미피케이션-게임의 미학>)이 있다. 한편 책을 읽으면서 편집에도 눈이 갔는데 주제상 총천연색에 수많은 이미지 자료가 삽입될 것은 예상했지만 본문 안에 QR코드를 넣어 독자의 하이퍼텍스팅을 유도하는 것이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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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혁명사 - 자유를 향한 끝없는 여정 쿠바 바로 알기
아비바 촘스키 지음, 정진상 옮김 / 삼천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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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혁명사] 가능성인가 실패인가, Dynamic Cuba!

 

 

 

작년 아버지의 중남미 여행 준비를 돕고 후기를 들으면서 느꼈던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생각보다 지리적·외교적으로 먼 곳이고, 생각보다 위험하고 여행에 제약이 많으며, 의외로 한국이 상당히 좋은 나라라는 점이었다. 국회의원이나 정부 관료가 연수차 중남미를 간다고 하면 무조건 ‘외유성’으로 모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행 후 아버지 소감 중 지구 반대편이라 그런가, TV에서 우리나라 등 아시아 뉴스가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새삼 그들과 우리가 먼 나라였음을 느꼈다는 얘기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역시 해외토픽이나 스포츠, 중요하거나 심각한 사건사고가 아니면 뉴스에서 접할 기회가 별로 없다. 오히려 식자재로 가장 많이 접하는 듯하다. ‘제3세계’란 말이 익숙하던 시절도 있었다.

 

미국에서 대중 여론이 학문 분석과 차이가 나는 사안 가운데 쿠바혁명만큼 격차가 두드러진 경우는 드물다. 쿠바혁명은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 미국 학생들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건 중 하나다. 내가 가르치고 학생들에게,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을 꼽아 보라고 하면 어김없이 나오는 답변이 피델 카스트로라는 이름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카스트로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는 거의 똑같다. 카스트로를 묘사하기 위해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동원하는 수식어는 ‘위험한’, ‘사악한’, ‘나쁜’, ‘독재자’ 따위가 대부분이다. 여론조사는 미국 국민들도 대체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견해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인 조사 대상자의 98퍼센트는 피델 카스트로를 알고 있으며, 82퍼센트는 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쿠바혁명에 관한 진지한 연구는 대부분 피델 카스트로라는 인물보다는 쿠바혁명의 과정과 정치, 사람들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 p.12

 

<쿠바혁명사>의 첫 장이며 이 책의 기저를 이루는 문제의식이다. 미국의 우방국이자 이념 차이로 분단한 우리의 쿠바 인식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몰이해와 무관심은 더욱 심하다. 우리나라 못지않게 의료보험이 잘되어 있는 나라, 카스트로가 장기 독재한 공산국가 정도 이미지 아니면 카리브 해, 모히또, 시가 등 문화적·소비적 측면에서 쿠바를 알고 있다. 체 게바라? 2000년 국내에 체 게바라 평전이 출간되었는데 한 5년 정도 웬만한 당시 대학생들은 끼고 다닐 만큼 유행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체 게바라 정신에 대한 깊은 관심과 동조라기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 조롱과 상업적 측면에서 패션 아이콘화된, 피상적인 자유 등 몇 가지 껍데기만 취하며 그를 소비할 뿐인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에겐 그래도 체 게바라인 걸까. 저자의 지적처럼 쿠바혁명은 정치, 역사 등 거시적인 관점이 아니면 피델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생각할 텐데, 그래서 쿠바를 이루는 수많은 군상 중 하나로 체 게바라가 삽입되는 원서와 달리, 삼천리의 한국어 번역본은 알베르토 코르다가 찍은 체 게바라 얼굴에 쿠바의 모습을 담은 표지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이런 해석도 틀린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외국인이고 단명한 혁명 실패자였지만, 쿠바사회에서 체는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한 신화적 존재이다. 저자 아비바 촘스키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노엄 촘스키의 딸로 미국 세일럼주립대학의 역사학부 교수이다. 7개 국어를 구사할 만큼 명민한 그녀는 아버지처럼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넓은 시선에 서슴없이 미국을 비판한다.

   

쿠바에서는 체 게바라의 이미지를 마주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어린 학생들은 “우리는 체처럼 될 거야!”하고 외치면서 학교 수업을 시작한다. 체 게바라는 몇 가지 이유로 누구보다도 신화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다른 혁명 지도자들과 달리 체는 본디 쿠바인이 아니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 의사로서 자기 조국을 떠나 혁명적 대의에 삶을 바쳤다. 그는 또한 게릴라 전쟁의 사회주의의 목표 및 성격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자신의 사상 흔적을 남긴, 어떤 의미에서는 혁명적 철학자였다. 그는 모든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여겨지던 1960년대 초 쿠바에서 진행된 가장 급진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경제개혁에서 라틴아메리카에 이르는 혁명운동들과의 연대를 상징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볼리비아 산악 지대에서 자신의 혁명이론을 전파하려고 애쓰다가 1967년 끝내 순교자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하여 체의 이미지는 수십 년 동안의 혁명 권력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타협을 연상시키기보다는 혁명 초기 시절의 무한한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면서 영원히 남게 되었다. - pp.60~62

   

그런 그녀에게 미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쿠바와 그 혁명사를 다루는 일은 당연한 과업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쿠바혁명을 정치사 중심이 아닌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종교, 문화 등 사회문화사의 관점에서 다양한 쿠바 사회의 면면을 파헤쳤다. 2011년 출간된 책이지만 쿠바혁명 55주년인 올해, 그녀의 쿠바혁명 분석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자유를 향한 뜨거운 여정’과 ‘새로운 인간’으로 요약할 수 있는 쿠바의 혁명과 사회주의는, 소련식 사회주의 실험의 완벽한 실패와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보며 오랜 고민에 빠져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마지막 끈이다. 또 비슷한 운명공동체인 라틴아메리카에서 약간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매력적인 관심대상이다.

 

<쿠바혁명사>는 현재 쿠바의 인구통계학적 배경과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며 시작한다.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처럼 작은 섬나라 쿠바 역시 원주민에 정복 백인과 아프리카 노예들이 더해져 독특한 문화정체성과 다양한 인종구성을 갖게 된다(한 가지 의문인 것은 번역서에 제시된 수치와 문맥이 잘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타인지 독자의 문제인지 궁금하다).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르페데스, 안토니오 마세오, 호세 마르티가 이끄는 20년간의 독립전쟁으로 수백 년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미군정이 실시되고 그 이후에도 반세기 이상 미국의 정치·군사·경제적 영향은 계속된다. 그런 상황에서 바티스타의 독재정부가 집권하고 그를 축출하기 위해 벌어진 1959년 1월 혁명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쿠바혁명이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로 상징되는 1959년 혁명 사상은 68혁명을 비롯한 20세기 중후반 전 세계 곳곳의 대안적혁명적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여기까지의 얘기가 <쿠바혁명사> 2장까지의 내용이다.

 

 

총 9장으로 구성된 <쿠바혁명사>는 사회주의 실험(경제;3장), 외교(3,4장), 문화(6장), 사회(7장), 1990년대 이후의 쿠바의 행보와 과제(8,9장)로 나눠 다양한 관점에서 1959년 이후의 쿠바를 그린다. 혁명 전 쿠바는 종속적 발전국의 전형이었다. 단기간에 병폐를 잡는 데 사회주의 급진 개혁이 최선의 대안이었다. 쿠바의 개혁은 복지에 가장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그 외 사회주의적 실험들은 큰 어려움을 겪는다. 쿠바의 사회주의는 소련과 따로 또 같이 노선을 간다. 쿠바는 냉전시대 소련과 미국 모두의 개입 하에도 휘둘리지 않았던 강하고 독특한 국가이다. 책의 중반부를 차지하는 국제·외교 부문 역시 흥미롭다. 반공정책을 밀어붙이는 미국은 쿠바민 이민장려정책을 펼치는데, 과거부터 미국 흡수를 원했던 상당수 쿠바 백인들이 환영한 것은 물론이고 피 델 카스트로 역시 이를 적극 장려하면서 이민자와 본국 간의 커넥션 양상은 쿠바 정치 사회 분석에 중요한 주제가 된다.

 

 

쿠바혁명은 소비에트의 독단과 단절할 수 있는 혁명의 사례를 세계에 제시하여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혁명적 변화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쿠바는 아프리카에 군사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그리고 제3세계 곳곳에 의료, 기술, 교육 원조를 통해 혁명 50년에 걸쳐 진보적, 좌파적, 혁명적 운동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p.160

 

쿠바가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국가와 차별화되는 특징으로 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 사회주의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문화의 수단화, 이념화에 빠져 말살시킨다는 것이다. 쿠바 역시 혁명 초기 사회적 리얼리즘을 종용받았다. 그러나 곧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 등 자유롭고 활발하게 문화가 꽃핀다. 이는 쿠바혁명의 문자해득운동 강조와 ‘새로운 인간’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문학, 영화, 춤, 음악, 스포츠, 음식 등 어느 것 하나 쿠바적이고 찬란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쿠바혁명에서 취약한 것도 있었다. 인종차별과 페미니즘, 동성애에 관한 부분이다. 페미니즘과 동성애는 진보적 운동이나 약간 성격이 달라 그런 것도 있지만 쿠바사회의 은근한 보수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90년대 이후 쿠바혁명의 양상은 달라진다. 주원인은 소련의 붕괴와, 피델 카스테로의 하야다. 소련의 기조에 무조건 따르지 않았지만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고 소련과의 무역 및 원조관계가 쿠바 경제 30년을 지탱하였다. ‘특별시기’로 불리는 1993년에서 2006년까지는 쿠바의 시련기이자, 급변기이다. ‘특별시기’는 다시 2003년을 기점으로 시장 개방과 각종 정책 실험 및 개혁을 추구하는 ‘마무리 전략’ 시기와 그를 제한하거나 되돌리는 등 재정비하는 ‘재집중화’ 시기로 나누어진다. 2006년 건강 악화로 47년의 집권을 뒤로 하고 피델 카스트로가 물러나지만 동생 라울에게 권력이 이양되면서 여전히 독재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정치적 평가를 떠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벌어진 혁명의 결과가 더 긴 독재란 건 참 아이러니다.)

 

 

쿠바의 55년 혁명사는 결코 이상적이고 성공적이지 않다.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겪고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자신들의 독특한 사회주의를 구축하고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마르크스 이론 실현의 불가능성을 아직 인정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쿠바는 절대 그들이 원하는 완벽한 열매가 되지 못한다. 진행 중인 실험체로서 가능성과 아이디어의 보고로서 기능할 뿐이다. 아비바 촘스키의 <쿠바혁명사>는 쿠바혁명과 현대 쿠바 반세기를 이해하는 개괄서로 안성맞춤이다. 번역을 맡은 경상대 정진상 교수는 이 책 번역과 함께 <쿠바식 민주주의>도 번역하였고 역시 삼천리에서 곧 출간될 것이다. 그가 2010년 번역한(그 역시 삼천리) <쿠바식으로 산다>와 함께 쿠바혁명55주년 기념 ‘삼천리 쿠바3부작’에 도전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끝으로 <쿠바혁명사>의 읽을 의의에 대해 책을 마무리하며 쓴 저자의 말을 옮기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나는 쿠바혁명의 경험을 요약하거나 그것에 관한 전반적인 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혁명은 거칠고 대담하고 실험적이고 다양했다. 그것은 때때로 불리한 환경 아래에서 전진해 왔다. 그것은 전에 없었던 사회·경제적 평등을 창조했으며, 가난한 제3세계 나라가 자기 국민들을 먹여 살리고, 교육하고, 보건의료를 제공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보여 주었다. 그것은 놀라운 예술적·지적 창조성을 이끌어 내기도 하고, 한편으로 숨 막히는 관료제를 만들어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유’를 제한하기도 했다. 또한 그것은 경제적 저발전을 극복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보여 주었다. 쿠바혁명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낙관과 비관적 전망을 동시에 갖고 있지만, 대체로는 장래가 궁금하게 한다. 우리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고자 한다면, 쿠바혁명을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은 출발점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 pp. 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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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소녀 반다 - 거울아 거울아, 내 모습을 어디로 가져갔니? 글로연 그림책 6
시우바나 지 메네제스 글.그림, 김정아 옮김 / 글로연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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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뱀파이어 소녀 반다]

그림책이 문학상을 받은 까닭은 : 모두를 홀리는 괴상한 그림책

 

반다는 뱀파이어지만 피를 싫어합니다. 채식주의라 피부는 초록색입니다. 뱀파이어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습니다. 반다는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없어 속상합니다. 그래서 반다는 슬픕니다. 자신의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뱀파이어가 가진 불멸의 생명 따윈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반다의 곁에 늑대소년 토니가 찾아옵니다. 토니의 눈엔 반다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토니는 반다와 정반대로 거울에 흉한 자기 모습이 비치는 게 고민이라, 반다의 슬픔을 잘은 알 수 없지만, 반다를 사랑하는 마음은 분명합니다. 토니의 고백에, 토니가 묘사하는 자신의 모습에, 반다는 더 듣고 싶어 귀를 쫑긋대며 앞으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함께 하고 사랑하는 한, 반디와 토니는 행복할 것입니다.

동물이나 영아들에게 거울 실험을 많이 한다. 거울의 반사 속성을 이해해서, 자신을 비롯해 거울 속에 비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아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지능이나 발달 가늠척도이다. 뱀파이어기 때문에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 것을 비관하는 소녀를 소재로 한 <뱀파이어 소녀 반다>도 그런 의미에서 일차적으로 영유아 대상 성장발달그림책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반다가 최소 유치원생 이상 나이라는 점, 꽤나 로맨틱하다는 점 때문에 아이부터 어른까지 전 연령이 공감하고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뱀파이어 소녀 반다>는 주독서층을 한정하기엔 아까운, 여러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는 매력적인 그림책이다. 그래서일까, 실제 이 책은 2008, 그림책 관련 상이 아닌 포르투갈어권 문학 최고상인 자부치상을 수상하였다.

 

뱀파이어 소녀에, 늑대인간 남자친구까지 등장해서인지 <뱀파이어 소녀 반다>의 삽화는 꽤나 그로테스크하고 어둡다. 그런데 그 이야기만큼은 따스하고 달콤해서, 삽화도 수긍이 가고 귀엽게 느껴진다. 뱀파이어인데 채식주의라 얼굴까지 초록색이 된다니, 제법 유머도 있다. 처음 이 책을 보며 눈에 들어 온 것은 시작 부분 반다가 거미줄 한 가운데서 몽크의 <절규>를 보는 한 표정과 몸짓으로 허우적거리는 장면과, 반다가 관 속에 웅크려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왠지 모르게 외롭고 수렁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전자는 그렇다치더라도 자고 있는 반다는 몹시 평온해 보이는데 말이다. 반다에게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삶이 아무 의미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만큼 심각한 문제이다. 그런데 드디어 방법이 생긴다.

 

토니처럼 흉한 자신의 모습이 싫어 거울보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뱀파이어 소녀 반다>는 거울 속에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이나 사랑스러운 존재이며 행복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뱀파이어 소녀 반다>는 한창 거울이 신기하고 자기 인지를 시작하는 아이들에겐 그런 즐거움을 느낄 수 없어 괴로웠던 반다와 자신을 비교하며 생각할 시간을, 반다와 토니 또래의 아이들에겐 기발한 상상력의 짧은 이야기를 느낄 시간을, 삶에 지치고 마음이 점점 메말라가는 어른들에겐 귀여운 사랑이야기에 웃음 지을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나에서 너를 거쳐 우리와 사랑으로 확대되는 그림책, <뱀파이어 소녀 반다>는 누구나 흠뻑 빠질 캐릭터와 스토리텔링이 있는 매력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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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샤쓰 눈이 깊은 아이 문학을 보다 1
방정환 글, 이일선 그림 / 눈이깊은아이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만년샤쓰] 창남이가 만년샤쓰를 입은 사연은

어려운 시대, 유쾌하게 함께 이겨내는 창남이

시대를 초월하는 교훈, 본받을 그의 매력과 미덕

누구든지 샤쓰가 없으면 추운 것은 둘째요, 첫째 부끄러워서 결석이 되더라도 학교에 오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같이 제일 추운 날 한창남 군은 샤쓰 없이 맨몸, 으으음 즉 그 만년샤쓰로 학교에 왔단 말이다.

-본문

 

 

고등보통학교 1년급 을조 한창남(현재 중1;일제 강점기에는 오늘날 중고등학교를 통합한 개념인 5년제 고등보통학교 체계였다), 비행사 안창남과 이름이 비슷해 비행가란 별명을 가진 창남이는 시원스럽고 유쾌한 성격에 인기가 많다. 선생님께도 넉살 좋게 농담을 건네며 항상 학급을 웃음바다로 만드는 창남이는, 철봉을 좀 못하는 것 말고는 연설도 잘하고 토론도 잘하는 등 다재다능하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창남이는 사실 넉넉한 형편이 아니다. 이십 리도 넘는 길을 걸어 학교를 오고, 옷이고 모자도 다 헤어졌다. 하지만 한 번도 얼굴 찌푸리거나 불평하는 법이 없다.

 

그도 모자라, 굽이 완전히 분리되어 악어처럼 입 벌리는 신발을 신고 오질 않나, 맨몸에 교복 저고리만 입고 오질 않나(이 사건으로 창남이의 별명은 비행가에서 만년샤쓰로 바뀐다), 교복 바지 대신 구멍 뚫린 조선 겹바지에 맨발로 온다. 궁금하다 못한 선생님이 묻는다. “어째 그리 없어지느냐? 날마다 한 가지씩 없어진단 말이냐?” 그 뒤로 뭉클한 창남이의 선행 사연이 이어진다. 온 마을에 불이 나서 모두 불탄 집도 있는데 우리 집은 반밖에 안 탔으니 어머니와 나 당장에 입을 옷 한 벌씩만 남기고 이웃에 나눠졌다는 이야기, 창남이는 그도 모자라 교복바지도 남 주고 벌벌 떠는 어머니에게 사실은 두벌이 있다 거짓말하고는 셔츠에 버선까지 벗어줬단다.

 

동화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가슴 한편을 툭치는 결말처리가 마음에 들었다. <만년샤쓰>는 방정환이 몽견초란 필명으로 1927<어린이> 3월호에 발표한 동화이다. 거의 90년 전 이야기니 할아버지도 넘어 최소 증조할아버지뻘은 되는 창남이인데 지금 우리 아이들도 배울 점이 많고 친구하고 싶은 아이다. 1927년이면 일제 강점기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지만 그래봤자 수탈받는 식민지 국민이었고 고달픈 시대였다. 그런 시대를 창남이처럼 밝고 건강하게 이웃과 연대하며, 자신을 잃지 않으며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다. 책마루가 임프린트 눈이깊은아이의 첫 그림책으로 <만년샤쓰>를 선택한 것도 이러한 시대를 초월하는 교훈성 때문이리라. 최대한 원문을 살리되 오늘에 맞게 다듬은 문장과 이일선의 익살스런 삽화가 어우러져 즐겁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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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미나의 기적 - 잃어버린 아이
마틴 식스미스 지음, 원은주.이지영 옮김 / 미르북컴퍼니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필로미나의 기적;잃어버린 아이]

한 모자의 평생으로 드러낸 가톨릭과 아일랜드의 추악한 과거

 

 

 

가톨릭에서 성가정은 평신도의 의무이다. 임신과 출산은 축복이고 피임과 낙태는 죄악이다. 원리주의 입장에서는 사후피임약을 살인도구로 몰고, 성폭행에 대해서도 예외를 두지 않아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대에 맞춰, 교리도 융통성 있게 바꾸지만 한계가 있다. 때문에 교도들은 성생활에 대해 모순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모성은 존경받지만, 동정녀 마리아를 제외한 미혼모는 죄인이다. 섹스는 주님이 빚은 신체와 영혼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쾌락행위나, 그것을 기쁘게 즐겨도 될지 번식을 위해서만 거룩하게 임해야 하는지 죄의식과 물음이 늘 짓누른다. 결론은 육욕을 ‘적절히’ 통제하고 기본 교리에 최대한 충실하라는 것인데 그 ‘적절히’의 정도가 항상 고민이다. 성소공동체의 사목이 절대적으로 미혼자인 신부와 수녀에 달려 있기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009년 영국에서 출간된 소설 <필로미나의 기적;잃어버린 아이>는 이러한 가톨릭의 성과 생명윤리에 대한 교리에 대해 재조명하고, 그와 관련해 1950년대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가톨릭의 과오를 짚었다.

 

 

열여덟, 자연의 섭리는 그녀와 그의 얼굴과 몸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한창 예쁘고 발랄한 청춘남녀가 첫눈에 반해 헤어지기 싫어 함께 밤을 보냈다. 누구도 가르쳐 준 적 없는 행위를 본능적으로, 감정에 충실해 즐겼고 그 한밤으로 아기가 생겼다. 배가 불러오는 걸 알아차렸을 땐 이미 아이 아빠와는 헤어진 지 오래고 찾을 수도 없었고, 확실한 죄의 증거를 품은 아이 엄마는 가족과 동네에서 내쳐져 자선 수녀원에 보내졌다. 타락한 여자는 어디로도 갈 곳이 없다. 수녀원에서 조용히 아이를 낳고, 참회와 노역으로 난잡한 성품과 음란한 육욕의 죗값을 치르며, 지인들의 기억에서 잊힐 만큼의 시간이 지날 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100파운드를 내면, 노역 없이 바로 수녀원을 나올 수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1950년대 이러한 강제 노역에 동원된 아일랜드 미혼모는 1만 명에 이르며, 평균 나이는 23세였다. 그녀들은 가톨릭 미혼모 시설에서 아이와 3년의 인생 포기하는 각서를 쓰고, 각종 노동에 시달렸다. 그녀들이 올린 수익과 정부 보조금, 그리고 아기들을 판 돈은 고스란히 가톨릭의 재산이 되었다.

 

  

  원장수녀는 자신이 잔인한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는 그녀에게 자선의 임무를 맡겼고, 그녀는 그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선악의 경계는 너무나도 명확했고,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은 육체적인 사랑이었다. -p.24

 

  죽은 산모와 아기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근처 들판에 있는 묘비 없는 무덤에 묻혔다. (...) 흉측한 모양에 평범한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교회에서는 죄지은 여자들이 거주하는 곳에 안락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 3년 동안 갇혀 있어야 하는 이 기숙사 (...) 태양이 세상을 환히 비출 시간에도 방 안은 항상 어두컴컴했다.

  소녀들은 숀 로스 수녀원에 도착한 그날 입고 있던 옷을 모조리 버려야 했다. 그리고 수녀원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거친 청 제복을 입었다. 제복은 헐렁한 자루처럼 생겼는데 그들이 지은 죄의 수치스러운 징후인 부푼 배를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발에 상처가 날 정도로 묵직하고 딱딱한 나막신을 신었다. 머리카락은 서캐가 생기지 않도록 짧게 잘랐고, 코바늘뜨기를 한 빵모자로 머리를 가렸다.

  소녀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본명이나 고향조차 발설해서는 안 되었다. 이곳에서 소녀들의 삶은 비밀과 외로움, 수치심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소녀들은 말 그대로 가족과 사회를 위해 ‘격리’되었다.

  기숙사 소녀들의 하루는 매일 새벽 여섯 시, 수녀원의 직원이 불을 켜고 침대에서 나오라고 외치는 고함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으면 담요를 홱 걷고 거칠게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소녀들은 보육원으로 가 아기들을 보살핀 다음, 여덟 시에는 미사에 참석했다. 임신하거나 갓 아이를 출산한 백여 명의 비쩍 마른 소녀들이 말없이 컴컴한 복도를 비척비척 걸어 내려가 수녀원 성당으로 향했다. 매일 아침마다 한명 혹은 그 이상이 미사를 드리는 동안 기절했는데, 수녀들은 이를 고의적인 반항으로 간주해 벌을 내렸다.

  미사가 끝난 후 소녀들은 일을 시작했다. 각자 세 가지 일 중 한 가지를 맡았다. 세 가지 일이란 수녀원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일, 보육원에서 아기와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일, 혹은 수녀원의 세탁실에서 빨래를 하는 일이었다. 소녀들이 가장 바라는 일은 부엌일이었다. 고되고 근무 시간도 긴 일이지만, 음식 부스러기를 몰래 훔쳐 변변찮은 식사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육원에서 일하는 소녀들은 길고 하얀 로브를 입은 보육 담당 수녀들과 수녀들이 고용한 일반인 직원의 감독을 받았다. 그곳에서는 밤낮으로 일하며 쉴 새 없이 아기들을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 주어야 하고, 아이 어머니를 불러 모유 수유를 하도록 해야 했다. 수녀들은 아기가 먹을 식량을 절약하기 위해 적어도 1년간은 모유 수유를 하도록 지시했으며, 대개는 1년 이상 계속되었다.

  세탁실 일은 가장 인기 없는 일이었다. (...) 세탁실 안에는 물통들이 석탄불 위에서 펄펄 끓고 있었는데, 지치고 땀을 뻘뻘 흘리는 여자들이 시트와 수녀복, 수감자들의 제복 더미를 가져와 부글부글 끓는 물속에 던져 넣었다. 한 번에 몇 시간 동안 나무 막대기로 김이 펄펄 나는 물통을 휘저어야 했으며, 맨손으로 젖은 리넨을 만지다 보니 손은 거칠고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 수녀들은 소녀들에게 비벼 빨고 비틀어 짜고 다림질을 하는 것이 그들의 영혼에 묻은 도덕적 때를 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지만, 이 세탁일은 또한 수녀원에 수입을 안겨 주는 일이기도 했다. 성당이 정말로 영혼을 구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돈벌이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세탁실의 오전 근무는 짧은 점심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끝이 나고, 어머니들은 그때 짬을 내어 아이들을 보러 갈 수 있었다. 오후 근무를 마친 후에도 저녁에는 건물 안을 청소하고 그 밖의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뜨개질과 바느질 시간이었다. 소녀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입을 옷을 직접 만들어야 했고, 덕분에 많은 소녀들이 대단한 재봉사 수준의 솜씨를 터득하게 되었다. 라디오나 책도 없었지만, 보육원에서 아기와 함께 앉아 있거나 주간 휴게실에서 젖을 뗀 아기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시간은―소녀들이 아기와 가까워질 수 있고, 평생 동안 남을 어머니와 자식 간의 끈끈한 정을 쌓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가슴속에 이러한 사랑을 허락해 주는 것은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빼앗아가는 것보다 더 잔인한 것 같았다. -pp.32~35

 필로리나는 해산할 때 아기가 다리부터 나오는 바람에 더욱 상처와 통증이 컸지만 죗값을 씻기 위해 진통제 한 알 먹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필로리나는 아기가 죽을까봐 무서웠고, 젖 먹던 힘을 다해 산 아기 앤터니를 낳았다. 로스크리 수녀원에서 죽은 아기와 산모들은 근처 들판에 묘비 없이 아무렇게나 묻혔다. 필로미나는 매일 앤터니 만나는 시간을 기다리며 3년을 버텼고, 아들 앤터니는 사랑스러운 아이로 하루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컸다. 그런데 앤터니의 이 사랑스러움이 비극이었다. 앤터니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애교 있게 뽀뽀하며, 한 살 어린 여자아기 메리를 친동생처럼 끔찍하게 여겼는데, 그 모습을 보고 메리를 입양하러 온 마지가 앤터니도 함께 입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3년이 지나면 아기와 함께 집으로 갈 수 있다고 철썩 같이 믿은 필로미나는, 예외 없이 친권 및 양육권 포기 각서 서명을 강요받고 절망한다.

아일랜드의 사생아들은 입양할 부부가 가톨릭 신자고, 아이 역시 신자로 키우겠다고 약속하면 최고 2000파운드까지 받고 팔았다. 표와 사회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정부와 정치인들은 침묵했고, 무분별한 여권발급과 유리한 법 개정으로 적극 협력하기까지 하였다. 주 고객은 미국이었다. 유명 배우부터 자국에서 입양 결격 판정을 받은 문제 가정까지, 엄연한 인신매매를 죄의 씨앗을 성가정의 품으로 보내는 거룩한 사업이라 정당화하였다. 생모와 자식을 강제로 생이별시키는 것은 죄인과 죄의 씨앗이 받을 당연한 처벌이라고 여겼고, 종교의 반인륜적 행위에 조금의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앤터니와 메리는 중하위층과 노동자층이 많은 공화당 텃밭 지역인 미국 록퍼드에 입양되었다. 독일계 집안이었고, 이미 네 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 닥 헤스는 의사였으며, 헤스 부부 역시 오랜 공화당 지지자였다. 이름을 그대로 쓴 메리와 달리 앤터니는 마이클로 이름을 바꿨다.

 

너 진짜 엄마 기억해? 진짜 엄마.

우리 진짜 엄마들은 우리가 나쁜 아이라 우리를 버린 거야.

진짜 엄마들은 우리를 미워한 거야. 그래서 우릴 멀리 보낸 거야. 나 오늘 나쁜 짓을 해서 엄마가 나한테 화냈어.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착하게 굴어야 돼. 만약 엄마가 우리가 얼마나 나쁜 아이인지 알게 되면, 엄마도 우리를 미워할 거야. 그리고 우리를 멀리 보낼지도 몰라.

그러니까 항상 착하게 굴어야 해. -p.132

 

마이크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을 좋아했고, 사람들을 실망시킬까봐 두려워했다. 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것을 금세 알아차리고 괴로워했다. - p.141

 

모든 고아는 거부당해 본 경험이 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p.182

 

고아는 전체 인구의 고작 2~3퍼센트밖에 안 되지만, 정신 병원과 소년원, 특수학교 수감자 중 30~40퍼센트를 차지하지. 또한 고아들은 비행, 성적인 방종, 알코올 중독에 빠질 확률이 높아. 고아는 중독에 빠지기 쉬워. 자신의 인생에서 빠진 것, 혹은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는 것을 벌충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지. 고아는 항상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길 바라지만, 항상 언젠가는 자신이 거부당할 거라 생각하지.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고 자신이 아무 데서도 적응할 수 없다고 생각해. 생모에게 거부를 당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신을 거부할 거라고 생각하지 자네 아들은 새 부모가 자신을 버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내내 순종하고 따르면서 살아온 거야. 그러다 이제는 항상 말썽을 부린다고 했지. 그건 ‘당신이 날 버릴 거란 사실을 알아. 그러니까 내가 먼저 당신을 버릴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 이러한 행동을 ‘시험’이라고 하는데 꽤 극단적인 상황까지 나아갈 수 있지. 이런 두 가지 성향을 모두 가진 부류는 항상 인생을 망치지. 신뢰와 친밀감, 섹스와 관계 형성에 문제가 있어. 인생의 반은 기존의 사회에 적응하며 평범한 인생을 살려 안달하고, 또 반은 충동과 중독에 빠져들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지. -pp.196~198

 

마이크와 직접 일하는 동료들도 교육받은 점잖은 사람들로, 공화당이 전국적으로 일으키고 있는 편집증적인 동성애 혐오에 조금도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여성과 동성애자를 위한 평등권이나 낙태에 반대하는 운동조차 지도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저 유용한 아이템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이러한 캠페인에 보수적인 성격의 종파 신자들은 열광했고, 단순 무지한 사람들은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이크는 그러한 위선을 이해했다. 당론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목표는 단 하나, 바로 언제 어디서나 공화당 당원을 당선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소수자 집단을 희생시키는 정책이라도 다수의 득표만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채택되었다. 따라서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나 광신자 등의 소수를 제외하면 공화당을 운영하는 운영진들은 대개 재선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 실용주의자들이었다. - p.390

 

마이크는 생모를 찾지 못한 것에 상처를 받은 것 같았어. 그래서 아일랜드라는 실낙원에서 자신이 추방당했다고도 생각하고, 그 때문에 고통받기도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때문에 안심도 되는 모양이야. 마이크는 한 번도 자신이 헤스 가의 일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그러니까 그에게 아일랜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환상 같은 곳이야. 스스로 포근하게 감싸 주는 담요 같은 곳. -p.395

 

그는 동성애를 혐오하는 정당에 소속된 게이이자, 뿌리 깊은 확고함의 세계를 살아가는 뿌리 없는 고아였기 때문이다. -p.420

무려 520여 페이지에 걸쳐 1952년부터 현재까지 필로미나의 사연을 추적하는 <필로미나의 기적>은 무척 독특한 형식과 발상의 소설이다. 휴먼드라마의 형태로 전형적인 사회고발소설을 썼고, 굳이 장르를 구분하면 ‘논픽션소설’이라 칭해야 할 것처럼 소설이면서 소설이 아니다. <필로미나의 기적>은 실화를 소재로 하였다. 일단 책 속의 모든 인물이 실명이며, 한 장이 끝날 때마다 현재 시점에서의 작가 마틴 식스미스가 등장해 저널리스트적이고 직접적인 코멘트를 덧붙인다. 그리고 제목과 달리 <필로미나의 기적>은 필로미나보다 마이클(앤터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필로미나와 함께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며 수집했던 자료들을 토대로, 입양 이후의 마이클의 삶을 재구성하고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마이클은 입양 트라우마로 발현 가능한 특이한 기질―불안정한 애착 형성과 관계 능력,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가 낳은 자기학대와 완벽주의, 중독 충동과 변태적 탐닉 등―의 전형을 보여준다. 게이인 공화당원이었다는 것은 화룡점정이다.

  앤터니가 1955년 12월에 로스크리를 떠난 후, 필로미나는 이 주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수녀들은 그녀를 더블린에서 출발하는 페리에 태워 눈앞에서 치워 버렸다. 1956년 1월 14일부터 그녀는 리버풀 외곽의 비행소년을 위한 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예수 마리아 성심수녀회는 수십 년간 옴스커크 소년원을 운영해 왔다. 몇 세대 동안 죄를 지은 소녀들이 그곳에서 소년들을 돌보며 하느님께 진 빚을 갚아 나갔다. 필로미나는 자신의 일을 싫어했다. 그녀는 소년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들의 운명 또한 동정했지만, 기회가 생기자마자 소년원을 떠났다.

  1958년 1월에 필로미나는 간호사 훈련을 받은 뒤 런던 북쪽에 위치한 세인트올번스의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그녀는 힐 엔드 병원의 정신병자들을 위해 일하면서 정신적 트라우마가 남기는 끔찍한 영향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신이 돌보는 사람들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녀는 자신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인 폭력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동안에도 그녀는 매일같이 잃어버린 아이를 떠올렸고 꿈속에서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리버풀과 세인트올번스에서 보낸 지난 12년간 그녀는 고통과 상실감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서랍 한 개에 그곳에서의 기억을 가득 채워 넣었다. 아눈치아타 수녀가 브라우니 상자에 넣어서 준 조그마한 흑백 사진과, 아이가 처음으로 신었던 신발과 오랫동안 쓰면서 다 해진 크롬 버클이 달린 가죽 벨트, 한 웅큼의 까만 머리카락을 필로미나는 성물처럼 아꼈다. -p.514

<필로미나의 기적>에서 ‘기적’은 우리가 번역하며 우리 정서대로 덧붙인 것이다. 원제(The Lost Child of Philomena Lee)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소설은 ‘기적’보다 ‘존재’에 중점을 둔다. 초반부와 후반부에서 필로미나의 삶을 빠르게 보여주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하염없이 마이클의 삶을 보여준다. 마치 아일랜드의 정책과 가톨릭이 개인의 인생을 어떻게 바꿨는지 똑똑히 보라고 시위하는 듯한 모양새다. 휴먼드라마로선 전혀 반전 없이 예측한대로 전개되고, 작가가 저널리스트지만 소설의 형식을 빌려 좀 더 극적인 문체로 썼음에도 전반적으로 담담하고 이성적이다. 그럼에도 필로미나의 사연이 겨냥하는 실체는 세간을 술렁이게 하였고, 1950년대 벌어졌던 이 추악한 과거에 대해 작년 2월 아일랜드 총리 엔다 케니가 공식적으로 사과 표명을 하였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마이클이 게이에 모순적인 삶을 살게 되고, 양가족과 절연하고 생모를 찾는다는 점에서, 입양아에 대해 갖는 주요 편견을 강화하는 또 다른 사례가 될까 약간 걱정은 된다. 책과 영화 모두 국제적으로 히트했기에 더욱 걸린다.

 

   

필로미나는 자신의 비밀을 50년 동안 가슴에 묻고 애써 잊으려 하지만 실패하였고, 마이클은 입양된 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사려 애썼지만 평생 자신의 뿌리를 궁금해 하고 그리워하였다. 천륜과 본능은 두 사람을 기적적으로 스쳐 지나게 하고, 기이한 인연으로 서로의 흔적을 찾게 하였다. 한 개인의 용단이 사회를 흔들고 역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그의 삶 자체가 생생한 증거가 되었다. 우리 정서 식으로 해석하면, 기적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존재와 삶 자체가 기적이다. 여전히 수천 명의 아일랜드 여자와 그녀들의 잃어버린 아이들이 서로를 찾고 있다. 작가는 그렇게 긴 서술로 채워 온 이 소설을, 미완성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후속을 염두에 둔 듯 한 애매한 서술로 결말짓는다. 동전의 양면처럼 소설과 영화가 서로의 틈을 메우고 있지만, 여전히 작가가 언급한 소재는 이야기되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할 말처럼, 필로미나 사건이 안은 이슈와 교훈은 우리 시대가 매듭지어야 할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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