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없는 환상곡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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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손가락 없는 환상곡] 슈만에 휘감긴 청춘과 광기 
 

"슈만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를 전편에 배치하여 교묘하게 엮어낸 이 작품은 그에 대한 오마주이자 불완전한 청춘군상에 대한 보고이며, 음악으로 상징되는 ‘완벽’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갈망을 다룬 수작이다."             - 출판사 서평 中 
 
 
  
  

'나'는 음대 피아노과를 중퇴하고 의대에 입학해 지금은 의사로 일하고 있다. '나'는 의대 재학 시절엔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편지로, 의대졸업 후엔 음대 동기에게 구두로 어떤 소식을 전해 듣는다. 고등학교 동창인 나가미네 마사토가 피아니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나가미네는 고등학교 시절 사고로 손가락이 잘려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한 것은 이 소식을 전한 친구들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과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나'는 이 미스터리에 대해 30년이 다 되어가도록 침묵했고 애써 부정하였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는 나가미네 미사토를 잊을 수 없었고, 수기를 쓰며 지난 날을 회고하기 시작한다.
 


'나'가 그렇게 나가미네 미사토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그가 '나'의 청춘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나'가 슈만에 빠지고, 어쭙잖은 음악평론을 쓰고, 뒤늦게 입시를 준비해 재수까지 하며 음대에 진학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나가미네와 함께 했던 자신의 청춘시절을 어제일처럼 또렷히 기억하며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누구에게나 청춘은 잔인하고 불완전하지만 아름답다는 것을 반증하듯, 시간 앞에 육체는 쇠락하지만 청춘의 감정과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음을 반증하듯 중년인 '나'의 수기는 생생하고 풋풋하다. 

<손가락 없는 환상곡(원제: 슈만의 손가락)>은 2010년 슈만의 탄생 200주년과 일본 최대 출판사인 고단샤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책이다. 제목처럼 이 책은 이슈만의 생애와 음악에서 소설 설정의 모티브를 얻거나 적극적인 인용을 하면서 전개된다. 실제로도 고등학교 때 이후로 50대인 지금까지 음악을 하고 있는 작가는 피아니스트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소설을 완성했는데, 그래서 이 책은 작가가 슈만에게 헌정하는 오마주의 결정체인 동시에 어느 정도 자전성이 가미된 청춘 독백이기도 하다. 원제가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슈만의 존재를 강조했다면 번역 제목은 손가락과 환상곡의 주체인 작중 인물에 주목한 느낌인데 어떤 관점에서 감상해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손가락 없는 환상곡> 속 슈만의 음악들

아래 언급된 작품들은 작중 연주되는 곡들만 추린 것으로 실제론 더 많은 슈만과 타 음악가의 음악을 만날 수 있다. 

p.019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op.54
p.035 다비드 동맹 무곡집 op.6
p.124 피아노 소나타 제2번 사단조
p.141 환상곡 다장조
p.150 리더크라이스
p.202 피아노 소나타 제3번 바단조 '관현악 없는 협주곡' op.14
p.267 천사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유작)



* 책의 뒷표지에 있는 QR코드를 찍으면 시공사 장르문학 블로그의 '슈만의 곡으로 읽는 <손가락 없는 환상곡>' 포스트와 연결되니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도 감상을 배가시키는 한 방법일 것이다. http://m.site.naver.com/00WX0 

   

오쿠이즈미 히카루는 경력이나 작품 수에 비해(1986년 등단) 국내에는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1994년 작 <돌의 내력>만 몇 년 전 번역되었기에 국내 독자에겐 낯선 작가이다. 가장 최근작인 <손가락 없는 환상곡>은 작년 일본의 각종 도서차트에 오르고 관련 음반이 나오며 폭발적인 반응이었는데 국내 반응은 어떨지 궁금하다. 이 책의 장르를 음악소설, 청춘소설, 미스터리소설 정도로 논할 수 있는데, 놀라운 것은 이 소설이 장르문학이 아닌 순수문학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미스터리·스릴러적 요소를 가미하고, 몽환적이고 탐미적인 문체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서 장르문학보다 장르성이 강한 독특한 순수문학 작품이다. 


음악, 청춘, 미스터리를 종횡무진 오가고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이 소설의 다채로움은, 매력인 동시에 보는 관점에 따라 약점이 되기도 한다. 작품의 얼굴이 많아 다양한 측면에서 소설을 해석하고 즐기기 좋은 작품이지만 그래서 어느 쪽으로도 강하게 집중하질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 소설을 전적으로 장르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아쉬움이 더 클 수 있다. 하지만 순수문학으로 보면 특이하고 실험성 강한 의미 있는 작품이고, 즐길 거리가 다양한 것은 분명 미덕이다. 한편 옮긴이의 말과 참고문헌은 작품 이해에 도움을 주며 이번 번역판엔 한국 독자를 위해 작가가 따로 서문을 써 인상 깊다.

 

서술의 격정이 절정에 치달을 때 '나'의 수기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 불완전한 틈 사이로 자잘한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들의 판단을 흐리면, 그 모든 것을 뒤집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슈만을 걷는 이 청춘과 광기의 환상곡은 오쿠이즈미의 히카루의 유미적 문장에 날개를 단다. 슈만의 광적 추종자로 행보조차 슈만을 닮았던 나가미네와 그런 나가미네를 동경하며 그의 비밀을 알고 의문을 품는 '나', 30여년 만에 봉인을 풀고 좇는 환상곡의 손가락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 음악을 소재로 청춘의 불안과 완벽에의 집착을 어우른 소설 <손가락 없는 환상곡>, 여러모로 묘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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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의 본심 - 승진, 해고, 보너스의 은밀한 함수관계를 결정짓는
윤용인 지음 / 알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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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장의 본심]
사장·상사·직원의 마음 모두 엿볼 수 있는 13800원짜리 직장생활 천기누설
 
 
 
 

출간 한달도 채 되지 않아 4쇄를 찍는 기염을 토하고 있는 책이다. 심상찮은 인기를 보면서 역시 사람의 마음은 다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분통이 터지고 궁금해 답답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이 책, 제목도 심상찮거니와 책 소개도 솔깃하다. '지각을 밥 먹듯이 하고 뺀질뺀질한 동기가 너보다 연봉이 더 많은 이유 알아? 누가봐도 능력 있는 박 과장 대신 무능력한 최 과장이 왜 먼저 승진했을까? 너네 사장님 혹시 이런 모습 보이지 않니?...'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가며 궁금해 미칠 것 같다. 단돈 13,800원에(할인해서 살 수도 있다!) 사장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비기를 친절히 알려주겠다니. 밑져도 본전, 해볼만한 도박이다.

 

<사장의 본심>은 시공사의 실용서 브랜드 알키에서 펴낸 책으로 노매드 윤용인 사장이 쓴 책이다. 창업 10여년차 현직 사장이 속시원히 털어놓는 사장의 심리를 논하는 것이 이 책의 표면적 주제지만, 좀더 들여다보면 사장·상사·직원 모두를 아우르는 전방위 직장생활 코칭서이다. 이 정도 투자로 사장의 마음만 알아도 감지덕지인데 완전 꿩먹고 알먹고 횡재가 따로 없다. 이런 구성과 자신감이 가능한 이유는 저자가 그 모두를 경험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장의 본심>은 저자가 자신의 경력만큼 쌓인 노하우를 일로 만났던 다른 사람들의 사례를 뒷받침해 논하는 회심의 역작이다. 기왕 견뎌야 할 밥벌이의 지겨움, 지금에서 좀더 나아지길 원한다면 이 책이 피와 살이 될 것이라 굳게 믿어보며 정독해보자.

 

머리말과 맺음말을 제외하면 크게 다섯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첫장은 사장들이 즐겨쓰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그 속뜻을 알려준다. 두번째 장은 사장들의 공통적 속성을 말하며 특히 살풀이 수준의 장시 '사장이 돼서야 알게 된 사장에 대한 오해'는 압권이다. 세번째 장에서 다섯째장까진 그외 직장생활에서 흔히 맞닥드리는 상황에 대한 조언들이다. 각 장의 구분이 명확하진 않기 때문에 그냥 쭉 읽어가면 된다. 저자가 회사 사장이기 이전에 글을 쓰던 사람이다보니 문장이 착착 감기고, 삽화도 많고, 분량도 270쪽 정도라 깔깔깔 웃으며(속이 좀 뜨끔해 웃는 게 웃는 게 아닐 수는 있겠지만) 읽을 수 있다.

  

독자에 따라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기업마다 규모가 다르고, 사람마다 다 성격이 다른데 이 책에서 제시하는 팁들과 사장에 대한 설명을 스테레오 타입으로 여길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이 설명할 수 없는 각종 돌발변수와 답이 없는 개성들도 있긴 하겠지만, 직접 읽어보면 공감되는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니고 어떤 조직에서건 통하는 기본적인 속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장의 본심>을 통해 독자들이 얻어갈 수 있는 소득은 그것이다. 특히 지금의 직장생활에 있어 매너리즘에 빠져 뭔가 자극이나 조언이 필요한 분들께는 한번쯤 읽어보라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또 비단 사회인 뿐 아니라 지피지기 백전백승을 원하는 취업준비생에게도 요긴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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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 송 1 - 운명의 바퀴가 돌다
로버트 매캐먼 지음, 서계인 옮김 / 검은숲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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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완송] 죽음의 땅에 봄은 반드시 온다, 디스토피아 속에 움트는 날개짓

  

 

제 3차대전 발발, 소련의 핵미사일 공격으로 미국은 초토화가 된다. 처음엔 주요 도시가 붕괴되고 그 다음은 주요 군사기지가 폭파되었으며 그 다음은 소도시와 지방 공업지대 마지막은 아직 공격받지 않은 곳을 샅샅이 뒤져 공격한다. 가공할만한 파괴력도 그렇지만 가장 문제는 방사능, 미국 전 국토가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생명이 살 수 없는 불모지대가 된다. 소설의 초반부는 각 장 앞에 시간의 변화와 여러 장소가 표시되며 시시각각 변하는 위기의 전시상황을과 앞으로 이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주요 인물을 묘사한다. 그리고 문제의 핵 공격, 시간은 더 이상 무의미해지고 각 장 앞에 시공간 표시도 사라진다.
 

몇 달 전 로버트 매캐먼의 <소년시대>가 번역되어 독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입소문을 타고 있다. 시공사는 곧바로 동 작가의 <스완송>을 6월 번역·출간하니 로버트 매케인의 팬들에겐 올해가 반가울 것 같다. <스완송>은 로버트 매캐먼의 1987년작으로 환상문학계의 최고상이라 할 수 있는 브램 스토커상을 수상하며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의 작가 인생에 명성과 인기를 안겨다 준 작품이다. 원고지 5000매(약 15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나 마치 연속극을 보는 듯한 흥미진진하고 스펙타클한 전개라 한동안 빠져 읽을 소설, 긴 열대야를 견딜 재미거리를 찾는 독자에게 추천해볼만한 책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길게 내러티브를 이어나가면서 전체적인 스토리 집중력을 떨어뜨리지 않은 작가의 재주가 감탐스럽다. 

 

냉전 시대에 쓰여진 소설이다보니 미국과 소련의 대립각이 분명한 시대를 그리고 있고 소련의 공격으로 미국이 멸망하는 것으로 그린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화염과 방사능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 고분분투한다. 누구는 지하방공호로 대피하고 누구는 집에 꼼짝없이 있으며 버틸만큼 버틴다. 누구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무작정 차를 몰고 달린다. <스완송> 같은 소설을 종말소설이나 세기말소설로 분류하는데 3차 대전이란 소재로 핵의 위험성을 고발하고 종말 이후 전형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리면서 아비규환의 인간사를 표현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끔찍하고 무겁다. 그러나 이 책의 매력은 그로 그치지 않고 판타지를 더해 냉혹한 현실에 조금 숨통을 튀어준다는 것이다. 

 

흔히 앞으로 또다시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핵전쟁으로 지구가 초토화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원전 피폭이나 원자폭탄 피해 사례를 본 적은 있어도 핵전쟁의 피해가 얼마나 될 것이라고 정확히 짐작하지는 못한다. 작가는 생물개체마다 방사능 저항성이 달라서 많은 생명체들이 죽겠지만 누군가는 살고 좀더 시간이 지나면 그 환경에 맞춰 진화해 새로운 생태계를 형성할 것이라고 설정하였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살아남는 사람들은 대개 피폭 후유증으로 화상을 입고 피부 변이로 종양범벅의 신체로 변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소설의 초반부가 끝나면 이런 남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장장 7년에 걸친 생존 여정을 그린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이 책의 주인공은 스완이라는 소녀이다. 전쟁 당시 어린 꼬마였고 피폭으로 가족들을 잃지만 자신은 겨우 숨쉬고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해괴하게 변한 몰골로 성장한다. 이 소녀의 비밀이 무엇이고 이 소녀에게서 나타나는 변화가 이 음울한 시대를 해쳐나갈 열쇠가 된다.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끼리도 약탈과 살인을 일삼고 영원히 희망의 미래는 오지 않을 것 같은 7년의 시간, 과연 어떻게 될지는 직접 진득하게 소설을 즐기면서 확인하길. 20년 이상 전 소설이라 지금 읽기엔 기본 설정 같은 게 조금 우스운 면도 없지만 작가의 뛰어난 통찰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책이었고, 묘사나 전개는 지금 읽어도 흥미진진하다. 지금이라도 영화로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 스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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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 350년 동안 세상을 지배한 메디치 이야기
김상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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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올해의 영리한 경제경영서

심리에세이가 아닙니다. 350년 동안 세상을 지배한 메디치가를 다룬 경제경영서!

  

 

신간 목록에서 제목만 보고 심리에세이인지 알고 넘겼던 책이다. 그런데 며칠 전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큰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고, 그 자리에서 멈춰서서 한숨에 다 읽을만큼 간만에 몰입했던 책이다. 이미 삼성경제연구소의 추천도서나 CEO들이 꼽은 추천도서로 독자들의 관심을 한창 받고 있으니 이제 와 호들갑 떠는 것이 무색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책에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 주체는 서양사에서 4세기에 걸쳐 주도권을 잡고 그만큼 많은 영향을 미친 한 가문, 메디치가이다. 저자는 메디치가의 성공 요인을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며, 이 책을 통해 메디치가의 역사와 교훈을 논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은 요즘 경제경영서의 자기 진화 경향을 반영하는 전형적인 책이다. 그래서 기존의 경제경영서와는 다르다. 굳이 경제경영과의 연관성을 따지자면 이 책의 내용이 경제사나 성공·처세술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문서적이라고 봐도 될만큼 인문학적 성향이 강하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 설명은 저자가 본문에서 경영학과 인문학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읽어볼 것) 게다가 저자는 신학자이다. 주로 르네상스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책을 쓰면서 가끔 르네상스와 경영을 연결하는 책을 냈는데,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역시 그런 맥락에서 출간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여러모로 매우 영리하다. 총천연색의 풍부한 사진 자료와 300쪽 미만의 짧은 분량, 가독성 높은 문장과 짤막짤막하게 끊고 넘어가는 편집이다. 철저히 대중의 눈높이에 맞췄다는 느낌, 어떤 독자든 부담 없이 읽기 좋은 책이다. 일반 독자에겐 올해에 읽을만한 경제경영서나 하룻밤에 읽는 메디치가 이야기 차원에서 추천을, 욕심 많은 독자에겐 앞으로 수많은 경제사, 메디치 관련 독서에 앞선 입문서로 추천해본다. 찾아보면 아예 저자가 이 책을 가지고 강의한 동영상 강의도 판매(6500원)하고 있는데 현재 책을 구매하면 동영상 강의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하니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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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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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랜만에 이덕일의 책을 들다 

나는 이덕일의 책을 독이 든 성배처럼 여긴다. 이덕일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특히 초기작 시절에는 매우 저돌적이었고 피를 토하는 듯한 극적인 문장이 강해서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이덕일의 책은 한국사와 관련한 어떤 주제에 대해 깊이 들어가고자 할 때 그 어떤 책보다 쉽고 재밌게 입문서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이덕일의 사관은 학계 소수설이거나 그를 넘어 음모론에 가까운 부분도 꽤 많은지라 그의 주장에만 경도되면 위험하다. 비전공자인 일반인 독자로서 역사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흥미로 얼마나 많은 책을 읽게 될까를 고심하면 그의 책은 아주 달콤해 보이나 망설이게 된다. 어쨌든 그는 현재 한국사 분야에서 가장 핫한 작가임은 분명하다. 출간하는 책마다 쉽게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충성스러운 매니아도 많은 한편, 책이 화형식을 당할 정도로 안티가 극렬하니, 이런 작가도 드물다. 학이불고의 마음으로 오랜만에 이덕일의 책을 들었다.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며 얼마나 변했을까.


[윤휴와 침묵의 제국] 잊혀진 이름 윤휴, 그를 다시 찾다



윤휴는 (...) 사망 3백 년이 지난 지금도 지워진 이름이 되었다.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고 있는 우리 시대는 그를 살해했던 시대보다 나은가.
윤휴는 지하에서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 본문 中에서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국정교과서(7차 개정판)에서 윤휴의 이름은 딱 두 번 언급된다. 하나는 정치사에서 숙종 때 청의 정세 변화를 염두에 두어 북벌을 다시 제기한 인물로, 다른 하나는 문화사에서 성리학이 교조화(절대화)되는 시기 주자와 다른 관점에서 유학을 바라본다는 이유로 당시 집권층인 서인(노론)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나마 한줄 정도의 설명밖에 되지 않으나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북벌론에 대해 송시열, 효종, 윤휴로 구분하는 반면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윤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북벌도 송시열과 효종을 묶어버린다. 나머지 행간에 대해 학교에서 배우는 양은 철저히 교사의 재량과 문제집 풀이 양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그것이 평생 습득하는 국사 지식의 거의 전부가 된다. 지금의 학생들은 그나마 형편이 낫다. 이전 세대로 갈수록 사실 자체가 잘못되거나 일편향의 국사를 배워왔기 때문이다.

  
<윤휴와 침묵의 제국>이 출간되었을 때, 인터넷 댓글을 읽으며 윤휴를 이름조차 모르는 독자들이 많음에 새삼 놀랐다. 이덕일은 이 책에서 교과서에 윤휴의 북벌론을 송시열이 주장한 것으로 둔갑해 있다고 하니, 사실이라면 나보다 윗세대 중엔 이렇게 배운 분들도 있었나보다. 다시금 학창시절 국사 공부에 대해 생각했다. 필자 역시 사정이 탁월하게 나은 것은 아니다. 서로 정견은 달라도 윤휴를 존중하고 교제했던 송시열이 어떻게 윤휴와 틀어지고 제거하게 되는지 그리고 사후의 회니시비 정도에 대해 간략하게 알 뿐이다. <윤휴와 침묵의 제국>은 윤휴에 대해 단독적으로 다룬 책(논문·학술서 제외)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앞으로 관련 서적 출간의 기폭제가 되길 바라며 반가웠다. 또한 이 책은 저자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출간 10년 후 자답이기도 하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는 출간된 지 너무 오래되었는데 인기는 여전해 개정판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으로 아쉬움을 조금 달랠 수 있을 듯하였다.

조선 후기의 사문난적이 정말 학문적 위험성보다 정치적인 이유로 희생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지배적이라 윤휴와 박세당에 대해서 대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접하면서 충격적인 것은 (10년 전에만 그렇고 지금은 안 그런지 몰라도) 윤휴가 후손들마저 입에 올리기 꺼리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치명적인 허물이 있는 조상에 대해서도 잘했다 큰소리치는 마당에 이런 인물을 후손이 신원하려 애쓰지 않는다니 저자가 전하는 얘기가 사실인가 싶었고, 그래서 더 책 내용이 궁금해졌다. <윤휴와 침묵의 제국>은 역시 이덕일이구나 싶게 매우 강하고 단호하게 서술한다. 철저하게 윤휴는 선이고 송시열은 악으로 봐, 천하동례에 입각해 택군 입장이었던 서인의 정치관을 조선 후기에 사대부 사이에 팽배했던 사상이자 신권이 강한 반증으로 인정하기보다 죽어야 마땅한 생각으로 평가한다. 오늘날 친일-친미로 연결되는 기득권의 뿌리가 송시열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윤휴와 침묵의 제국>을 읽으며 가장 흥미진진했던 부분은 피를 말릴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당시 국내외 정세였다. 그걸 아니 윤휴의 주장이 좀 더 이해가 되었고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그 시대 주요 사건들이 왜 일어났는지 아귀가 맞춰졌다. 윤휴가 역사에 휘말린 것은 벼슬길에 오른 불과 6년, 끝까지 관직을 고사하고 산림으로 사는 게 어쩌면 더 나았지 싶다. 아무리 포의 시절 상소와 저술로 주장한 개혁안은 너무나 급진적이었고 드디어 그 이상을 실현할 기회가 왔지만 철저히 방해받고 좌절된다. 이덕일은 윤휴를 조선시대 ‘다양성’의 표상으로 그린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조선시대의 다양성 종말이며 침묵의 시대 시작으로 평가한다. 윤휴의 사상이 최선이고 바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침묵은 광기와 독단의 시대를 부르는 바, 이덕일이 주장하고 보여주는 윤휴의 삶과 죽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 준다. 

이 책 한 권으로 윤휴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했다 만족할 수도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앞으로도 윤휴에 대한 재조명이 계속 이루어지고 다양한 책들이 쏟아져 그런 이 책의 내용적 아쉬움을 채워졌음 빈다. 어쨌든 윤휴에 대한 입문서로 읽기엔 괜찮은 책이다. 최대한 많은 사료에 입각해서 서술하려는 엿보이며 글도 특유의 개성은 남아 있으나 더 객관적이고 유해진 편이다. 또 많은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총천연색이다. 다만 다 좋은데 편집이 급히 이루어졌는지 오타나 비문이 있으니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한편 이덕일은 평소 자신이 가장 주목하는 조선시대 인물로 평소 유성룡, 윤휴, 정조 세 사람을 꼽았다. 출판 간담회에서 어떤 정설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면 논쟁을 하는 게 아니라 개인을 공격한다는 말에서, 확대해석일지 모르나 저자가 특히 윤휴에 대해선 자신을 투영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조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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