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미래 - 왜 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월터 카우프만 지음, 이은정 옮김 / 동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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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문학의 미래] 죽은 인문학자의 살아있는 일침

 

 

 

 

http://der_insel.blog.me/120147407226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였던 월터 카우프만의 1977년 작, 생각보다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책으로 저자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 책 뿐 아니라 월터 카우프만의 저서는 대학 도서관들에 원서들은 제법 소장되어 있는 편이나 그 동안 번역된 게 손꼽을 정도다. <인문학의 미래>는 그의 30여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문학과 인문학 교육에 외치는 쓴 소리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각종 대학도서관을 비롯하여 이 책의 원서를 소장하는 곳이 거의 없으며 미리내에서 낸 번역서는 소장 도서관이 제법 많은데, 13년 전 이남재 교수가 번역한 이 번역서는 '수많은 오역과 낯 뜨거운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이라는 혹평을 들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죽은 인문학자의 명서를 제대로 된 번역으로 21세기에 살리고 알리겠다는 동녘과 이은정 교수의 의욕을 보고 새 번역본이 무척 궁금해졌다.

 

 

 

제목을 봤을 때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현상 진단과 대안에 대한 담론을 다룰 것이란 일반적 기대와 달리 <인문학의 미래>는 인간형의 고찰과 고등교육에서의 교수법, 독서와 출판에 대한 것까지 다루며 논의의 범위가 상당히 넓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러한 접근과 기술이 가능한 것은 저자가 철학자이자 교수, 번역가, 서평가, 편집자, 시인 등 다양한 이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의 위기가 시작되는 시점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오늘날 인문대학이 겪는 시련이 세계 제 2차 대전을 기점으로 대학교육이 재편되면서부터라고 분석하는데 전후, 수많은 대학이 생기고 교수가 부족해 60년대까지 박사 미 소지자도 쉽게 교수가 될 수 있던 것이 불과 십몇년 만에 미국만 매년 2000명 이상의 백수 인문학 박사를 내는 상황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다소 놀랐다. 68혁명에 대한 저자의 평가도 흥미로웠다.

 

 

첫 장 '네 가지 유형의 마음가짐'은 이 책의 논의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바탕이 되는 장으로 저자는 네 가지의 인간형을 제시한다. 기존의 이론과 시대의 상식을 뒤집는 새롭고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통찰가형, 기존의 연구들과 자료들을 정리하고 계승하며 학파 중심적으로 활동하는 사변가형, 어떤 사상과 이론도 틀릴 가능성을 항상 염두하며 비판적 견지와 무지의 자각을 강조하는 소크라테스형, 시류를 중시하며 지금 당장 팔릴 것을 생산(연구·집필 등)에 집중하는 저널리스트형이다. 이 유형들이 어떤 건 무조건 좋고 어떤 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월터 카우프만의 문제의식은 현재의 교육과 사회가 이러한 유형들이 균형 있게 공존하지 못하고 사변가형과 저널리스트형 인간들만 주로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2장과 3장은 책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특히 흥미를 가지며 주의 깊게 볼 부분이다. 전자는 독서방법론에 대해 후자는 서평·번역·편집에 대해 다루는 장이다. 2장에서 월터 카우프만은 인문사회과학의 핵심을 독서로 꼽으며, 대부분의 학생들이 잘 읽는 법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교수들과 학자들은 각자의 극단적인 독서법을 고집하는 현실에 개탄한다. 그러면서 고전 독서법을 중심으로 성서해석적 독서, 독단론적 독서, 불가지론적 독서, 변증법적 독서 네 유형의 독서법을 설명하며 변증법적 독서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서평의 정치성과 번역과 편집에 있어 윤리와 주의할 점을 논하는 3장은 독자들을 각성시키는 '위험한 진실'인 동시에 이 작업에 얽혀 있는 인문학계에 대한 자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견이 양심을 이끌어낼지는 모르겠지만 새겨 볼 고언임엔 분명하다.

 

 

월터 카우프만이 정의하는 인문학의 범위는 종교, 철학, 예술, 음악, 문학, 역사 여섯 분야이다. 4장과 5장은 교수법과 교육프로그램의 모색과 현재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과 방향잡기라면 마지막 장은 학제 간 연구로 마무리하며 인문학의 생존법에 대해 총정리하며 끝낸다. 고등교육에서 현저하게 소홀히 다뤄지는 종교 교육을 시작으로 철학과 문학 등 다양한 강의안들을 제시하는 4장을 읽으면서 프로그램 참고 뿐 아니라 양서 리스트를 얻어갈 수 있다. 5장과 6장은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정리하며 책 전체에서 인문학의 위기와 미래에 대해 가장 충실히 다루는 장이다. 월터 카우프만이 인문학의 생존을 위해 강조한 것은 통찰가형이나 소크라테스형도 많이 나올 수 있기 위한 교육의 개혁과 학제 간 연구를 통한 인문학의 가치 강화이다.

 

 

역자는 이 책의 주요 독자를 인문학자(대학 교수와 그 외 연구자들)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만큼 이 책이 일반인 독자를 대상으로 했다기에 다소 수준이 높고 저자의 비판 방향이 학계와 교육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유리된 주제도 전혀 이해 못할 만큼 어려운 내용도 아니기에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이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이번 동녘에서 출간된 <인문학의 미래>는 번역에 신경 썼음을 강조하였는데, 길고 복잡한 구조의 문장이 많은 걸 감안할 때 가독성에 꽤 신경쓴 듯 보인다. 또 본문에 언급된 출판물이 단행본·잡지·장편인지 논문·단편·미술작품인지 기호를 달리 해 구분한다거나 문맥에 따라 'Bible'을 성서와 성경으로 바꿔가며 번역하는(그래서 헷갈릴 수 있지만) 섬세함이 있다. 또 카우프만이 정리한 참고문헌을 일일이 대조에 국내 번역 여부를 써놓은 것도 독자를 위한 상당히 세심한 배려다.

 

 

<인문학의 미래> 출간 이후에도 인문학은 계속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인문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데, 월터 카우프만이 '자살'이라 표현했던 것처럼 이러한 위기에 인문학 스스로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 않나 싶다. 아이러니한 것은 출판계 같은 경우 '인문학 열풍'이 불고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인문학적 가치를 강조하며 융합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순수인문학 교양서들은 점점 가볍고 쉬워진다. 인문학을 사랑하지만(그래서 취미로는 더없이 환영이지만) 전공은 꺼리는 요즘 세태를 반영한 것일까. 출간한지 30여년이 넘은 이 죽은 학자의 외침이 이젠 무의미하고 추억 저편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일침이 된다는 사실에 저자의 혜안에 탄복하면서도 몹시 씁쓸하고 아팠다.

 

 

몇 달 전 들었던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어느 유명 인사가 자신이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한 이유는 그 시대엔 문과 가면 밥 굶는다는 말이 돌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는 60년대 초반 생이었고 그들의 대학시절을 우리 세대는 참 낭만적이다 여겼다. 지금은 더 상황이 좋지 않다. 수능이 끝났고 수많은 문과 학생들이 전공 선택을 고민하는 때이다. 그들에게 진로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없으면 무난하게 경영학과를 가라 비겁한 조언을 던지는 기저는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자신의 아들을 인쇄소에 맡기는 P의 무력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표류하고 있는 인문학, 그럼에도 인문학을 계속 가르쳐야 하고 인문학은 발전해야 하며 인문학의 희망을 보고 싶다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인문학의 미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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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인생
제이시 두가드 지음, 이영아 옮김 / 문학사상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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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인생]

어떤 이유로도 누군가의 삶을 갈취할 수 없다!

<도둑맞은 인생>은 특이하게도 책 속에 따로 목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물론 여러 소제목으로 나뉘어져 18년간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일반적 서술과 심리적 독백이 교차되고 다양한 사진들과 일기들이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어,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제이시의 의식과 심리의 흐름을 따라가게끔 되어 있다. 여전히 심리치료를 계속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작가는 그런 사정을 밝히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의 어린이들이 호환마마전쟁보다 무서워했던 것은 불량불법비디오보다 아마 유괴였지 않았나싶다. 대한민국 3대 미제 사건 중 2개인 이형호군 납치사건과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같은 해에 일어났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방송에서도 언제나 아이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심지어 말하지 않아도 아는 모 제과의 초코빵의 뒷면에도 실종된 아이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으니 군것질 한번을 하면서도 이 친구들이 하루빨리 돌아오길 빌며 자신도 조심해야겠다고 또 다짐했던 시절이었다. 국적은 다르지만 제이시 두가드 역시 1991년에 11살, 1990년대 초반 어린이였고 지금은 30대 초반의 학부모세대가 된 이들의 친구이다.

 

 

[p.027]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후 나는 솔방울을 모으고 있다. (…) 심리치료사와 나는 결국 내 집착을 해결했다. 솔방울은 필립에게 납치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내 손에 닿았던 것이다. 딱딱하고 끈적끈적한 솔방울은 18년 동안 강금당하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꽉 쥐었던 자유였다.

[p.055] 언젠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엄마를 꼭 껴안고 놔주지 않는 것, 두 번째로 꼭 하고 싶은 일은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것이다.

[p.068] 처음 발견되었을 때 나는 어떤 책도 쓰지 않겠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떠들썩한 사건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뒤늦게 알았다. 책 <도둑맞은 인생> 자체는 올해 7월에 출간(원서)되었으나 2009년 세상에 알려졌던 일이다. 11세의 여자아이를 유괴해 18년간 감금하며 두 아이까지 낳게 한 충격적인 사건, 자유를 찾고 가족과 다시 만난 후 계속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제이시 두가드는 대필 작가 없이 직접 자신의 18년 생활을 고백한 에세이를 펴냈다. 비슷한 시기에 8년간의 유괴감금 생활로부터 도망쳤고 역시 자신의 얘기를 책으로 펴낸 오스트리아 여인 나타샤 캄푸쉬가 있었다. 그녀는 책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겪은 사건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선정적이고 비뚤어진 시선에 대해 분노하며 언급을 거부했다. 그에 비해 미국 여인 제이시 두가드는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을 보여주며 그런 반응들을 감내한다.

 

 

이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것은 제이시의 유괴와 성노예 생활에 유괴범 필립의 아내인 낸시가 적극 가담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부부는 복지시설에서 일하다 만난 사람들로, 낸시는 계속 그 일을 한다. 밖에서는 평범하고 선한 이웃의 모습으로 살지만 실상은 마약중독자에 유괴범들, 남편의 변태적 성 취향과 성 학대를 방관하면서 어린 제이시두가드에게 연적으로서 여성으로서 묘한 질투감을 느낀다. 몇 해가 지나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게 되는 필립의 어머니 팻도 마찬가지다. 거짓 사연으로 소개되었고 나중에 치매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제이시를 '불편한 진실'로 느끼면서 침묵한다. 한편 필립은 성범죄 전과로 직장에서 잘리고 감옥에 있다가 보호감찰처분을 받아 주기적으로 보호관찰관이 집을 드나들었는데 마당에 있던 별채(제이시가 갇혀 있는)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점은 참 의아하다.

 

 

[p.058] 그는 내가 자기의 성 문제를 치료해주고 있는 거라고 말한다. 그 '문제'로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대신 나를 데려왔으니 내가 자기를 도와주면 남들을 해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p.184] 그를 용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해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지금, 그를 용서할 권리가 내게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남은 일생 동안 이 문제와 씨름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우리가 한 가족이기를 바랐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저 흉내만 내고 있었을 뿐이다.

[p.245] 팻은 내심 나를 싫어하고,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 같다. 우리가 그녀에게 얘기해준 적은 없지만, 그녀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들의 일면을 보여주는 게 바로 나라는 걸 아는 것이다.

 

 

필립은 자신의 성취향이 사회에 문제가 되는데 고치지를 못한다면서 제이시를 통해 제 2의 범죄를 막고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며 그녀의 삶을 앗아간 것을 정당화한다. 그는 일종의 복음주의자로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며 가족들에게도 세뇌와 강요 수준으로 가르치는데, 자의적인 해석과 그릇된 신앙으로 자신의 범죄와 제이시 두가드와의 만남을 주의 뜻으로 정당화한다. 나중에 마약중독 수준과 왜곡되고 광적인 신앙이 더욱 심해져 환청을 듣는 필립은 자신의 인쇄사업과 그를 통해 구축했던 고객 망을 이용해 사이비 교단을 만들고 선전물을 배포한다. 제이시는 필립이 인쇄사업을 했고 자신이 보조를 했다고 밝히지만 처음부터 종교 활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일이 제이시 두가드가 자유를 찾게 되는 기회가 된다.

 

 

 

어떤 이유로도 누군가의 삶을 빼앗을 수는 없다. 이름도, 가족들의 축하와 훈육 속에 2차성징을 겪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는 즐거움도, 딸에게 엄마소리를 듣는 당연한 권리고, 또래들과 똑같이 학교를 다니고 자라며 평범하게 사는 것도 제이시는 모두 도둑맞았다. 너무 오랫동안 폐쇄된 공간과 인간관계 속에 필립에게 세뇌당해 정서적으로 불안정했고, 어린 나이에 강간과 출산 등으로 몸도 허약하고 키도 작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도 해체되고 딸과 언니를 잃은 슬픔에 고통스러워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이 무려 징역 431년(낸시는 징역 36년, 주정부의 배상금 2천만 달러 추가)의 어마어마한 형기를 선고받은 것이 아닐까 한다.

 

 

[p.086] 첫해가 지난 후에는 상황이 바뀌어서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시작했다. (…)  <스타트랙>에서 마음에 드는 점은 우주에는 여전히 범죄가 일어나고 있지만 지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구가 깨끗이 청소되었다는 것이 좋았다. 내게는 없는 것 같은 미래였기에 특히 좋았다.

[p.181] 고등학교 운동장을 걷다 보니, 잃어버린 내 인생이 새삼 서글퍼졌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질투와 시기심까지 느껴졌다. 나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렸어야 했다. 하지만 강제로 빼앗겼다.

 

 

우려했던 대로 제이시의 사건이 보도된 후 언론과 대중들의 관심은 끔찍했다. 처음 필립 부부의 체포 후 경찰에 보호된 제이시가 혼란스러운 틈에 특종에 목마른 기자들은 제이시를 용의자를 변호하는 스톡홀름 신드롬 환자로 몰아붙였고 제이시 사건을 소재로 성인영화를 기획하려던 일도 있었다. 쇄도하는 각종 TV·잡지의 인터뷰 제의가 과연 제이시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그러나 그녀는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고 그 배경엔 가족들의 전적인 지지와 도움이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제이시가 왜 굳이 책을 쓰고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가십으로 왜곡하기 쉬운 내용들을 여과 없이 담았는지 생각하였다. 그녀는 현재 유괴 등 깊은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을 위한 JAYC재단(Just Ask Yourself To care3)을 운영한다. 제이시의 바람처럼 그녀의 용기 있는 고백이 담긴 이 책이 사회고발하고 아픔 있는 사람을 어루만질 수 있길.

 

 

 

- 초판1쇄 교열상태 good

- <도둑맞은 인생>은 철저히 제이시 관점에서 보고 겪은 18년을 기술한 것으로, 종합적인 정황은 나와 있지 않다. 본 서평의 일부 내용은 책에 있지 않은 신문 기사 검색 등을 통해 삽입한 것임을 밝힌다. 

 

 

더 자세한 서평은 블로그로) http://der_insel.blog.me/120147022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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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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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주는 위로, 그리고 공감

  

얼마 전 올 초 미국에 번역된 <엄마를 부탁해> 영문판이 2011 아마존 문학·픽션 부문 올해의 책 베스트 10, 종합 베스트 100에 선정되었다는 기사가 났다. 신경숙, 80·90년대 주목할 여성작가였던 그녀는 <엄마를 부탁해>를 세계 31개국에 판권을 팔며 명실상부 요즘 대한민국 문학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그런 신경숙 작가가 <리진>,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세 장편 집필에 집중했던 지난 8년을 뒤로하고 6번째 단편집을 냈다. <모르는 여인들>, 8년간 작가가 가장 침울하거나 내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틈틈이 썼다는 이 일곱 편의 단편들은, 신경숙 특유의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문체에 위로받고 싶은 독자들에게 그리고 오랫동안 그녀의 단편집을 기다렸을 독자들에게 반가운 연말선물이 될 것이다. 

지난 팔 년 동안 써놓은 작품들을 모아 읽으며 내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 작가의 말 中

 

<모르는 여인들>은 이 책에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 중 하나이다. 제목이나 작가의 문체로 봤을 때 여성들의 이야기만 담겼을 것이라 오해하기 쉽지만 엄밀히 말하면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웃들)’의 이야기에 가까운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남녀 모두 섬세하고 여성적인 감은 있지만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남’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동시대적인 공감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말처럼 일곱 개의 단편이 서로 다른 시간대에 쓰인 별개의 소설임에도 무언지 모를 정서적인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번 신간 단편집 <모르는 여인들>엔 [세상 끝의 신발], [화분이 있는 마당], [그가 지금 풀숲에서], [어두워진 후에], [성문 앞 보리수], [숨어 있는 눈], [모르는 여인들] 일곱 단편과 문학평론가 권희철의 해설, 작가의 말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 단편들(시간순 정렬/숫자는 책에 실린 순서임)

2. 화분이 있는 마당 -「문학수첩」2003년 가을(원제: 그 여자에 관하여)

3. 그가 지금 풀숲에서 -「창비」2004년 여름

4. 어두워진 후에 -「문학동네」2004년 가을

6. 숨어 있는 눈 -「문학과사회」2004년 가을

5. 성문 앞 가로수 -「세계의문학」2005년 여름

7. 모르는 여인들 -「문학동네」 2008년 여름

1. 세상 끝의 신발 - 「문학과사회」2009년 여름

[세상 끝의 신발]과 [화분이 있는 마당]은 일곱 단편 중 가장 연결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아버지와 낙천이 아저씨가 신발로 얽힌 인연을 소개하며 시작되는 [세상 끝의 신발]은 인터뷰어인 주인공 ‘나’가 낙천이 아저씨의 부고를 듣고 잠시 일을 접어둔 채 고향으로 내려가며 겪는 이야기다. 처음 순옥언니의 딸을 보게 된 ‘나’는 초상을 치르며 아버지와 낙천 아저씨, ‘나’와 처녀(순옥의 딸)에서 ‘나’와 순옥언니로 다시 ‘나’와 인터뷰이 발레리나로 생각의 화제를 돌리며 독자들에게 신발 이야기를 들려준다. [화분이 있는 마당]은 실연으로 식이와 언어에 장애가 생긴 인터뷰어 ‘나’가 후배 K의 부탁으로 대신 집을 돌봐주면서 어떤 여자의 도움으로 장애를 고치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는 없는 존재더라 하는 이야기이다. 일종의 괴담인데도 공포보단 훈훈함으로 다가오는 묘한 매력의 단편이다.

 

[지금 그는 풀숲에서]와 [어두워진 후에]의 주인공은 남자다. [지금 그는 풀숲에서]는 자신의 교통사고를 통해 자기의 삶과 어머니를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와 외계인손증후군에 걸린 아내의 왼손에 시달리다 생각에 빠지는 이야기가 서로 얽힌 듯 평행선을 그리는 듯 이중적으로 움직인다. [어두워진 후에] 유영철과 김길태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극악무도한 ‘살인이 직업인 인간’과 그 때문에 가족을 잃은 ‘남자’의 방황과 치유를 그렸다. 특히 [어두워진 후에]는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중 가장 이성 간의 관계를 통한 삶의 환기성이 강한 작품으로, 주인공 ‘남자’가 만나는 ‘여자’는 짧은 만남이지만 낯선 이에게 거리낌 없는 환대를 베풀며 자신을 여는 독특한 인물이다.

[숨어 있는 눈]은 이 책에 실린 단편 중 가장 이질적이다. 동물(고양이)이 출연하는 유일한 단편이기도 하거니와, 실종된 A를 찾는 ‘당신’에게 독백하고 있는 화자 ‘나’의 이야기로 인물 간의 직접적인 대면이 없는 유일한 단편이다. [성문 앞 보리수]와 [모르는 여인들]은 아득한 시간이 지나 만난 이들이 서로의 삶을 각성하는 이야기다. [성문 앞 보리수]가 한때는 삼총사로 붙어 다녔지만 서로 다른 공간에 사는 세 여자의 이야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밝혀지는 근황과 심리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아는 아주머니의 얘기로 시작하는 [모르는 여인들]은 남편을 간병하는 ‘나’가 옛 연인이었던 채의 편지를 받고 만나게 되고 그가 들려주는 그의 아내와 가정부 아주머니의 특별한 유대, ‘나’와 채 각자 혹은 서로의 이야기를 담았다.

나는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어지면 그 사람 신발에 발을 몰래 넣어보고 싶다. - [세상 끝의 신발] 中(p.26)

그는 간신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 생각했다. - [그가 지금 풀숲에서] 中(p.85)

이십대보다는 삼십대가 좋았고 삼십대보다는 사십대가 된 지금이 나쁘지 않다. - [모르는 여인들] 中(p.231)

지독한 세속적 일상 속에서 신화적인 체험을 길어 올리는 미학적 시선 - 정여울(문학평론가) 

앞서 언급한 정서적 유사성 외에 <모르는 여인들>에 수록된 일곱 단편들의 공통점은 현재 시점 혹은 중심 사건 외의 인물의 사연을 삽입한다는 것과 중후반부를 꿈결 같은 모호성으로 처리한다는 점이다. [세상 끝의 인물]의 소년병과 발레리나, [모르는 여인들]의 마라톤 아주머니, [숨어 있는 눈]의 몇몇 고양이들 등 어떤 면에 있어서는 거리를 던지며 이야기 속 세계가 확대되는 것이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이러한 편린처럼 지나갔던 존재들도 소설 속에 어우러져 의미를 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직간접적으로 꿈이나 의식, 환상 등을 통해 분위기를 전환시키거나 결말을 맺는 방식은 신비감마저 느낄 정도로 담담했던 일상들을 승화시키고 여운을 상승시키거나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행간의 구멍을 마련한다.

각각의 단편들을 서로 연결하며 마치 연작소설처럼 이 단편집을 즐기고 해석할지, 독립적으로 한 편 한 편에 집중하는 감상을 할지는 독자의 몫이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 때론 상처받고 때론 위로와 도움을 받으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다져나간다. 역으로 우연이든 의도였든 자신이 타인에게 준 영향들도 많다. 그리고 이러한 살면서 겪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일상’이란 이름으로 묶어 명명한다. 매우 담담한 어조로 들려주는 다양한 타인들의 이야기, 전혀 자신과 관계없는 모르는 사람들이고 픽션인 걸 알면서도 이들의 일상을 훔쳐보고 생각에 잠기며 가슴 속에 따스한 물이 차오름을 느낀다. 3년 전 우리가 전혀 관계없는 남의 엄마 ‘너의 엄마’의 이야기에 울고 웃으며 위안을 받았다면 이번엔 여러 단편을 통해 확장된 다양한 타인들의 군상이 선물처럼 마음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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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까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가 드디어 80권을 돌파했다. 수많은 출판사들이 세계문학전집을 내고 있지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중 그들과 차별되고 이건 꼭 사야 될 것 같은 책들은 뭐가 있을까.  

80권에서 5권 추려내기!! 특유의 예쁜 편집도 그렇고, 다른 출판사는 내지 않은 작품들을 소개한 것이 많아서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다 사고 싶지만 일단 위시리스트를 줄이고 줄여 '모두 다른 이유와 다른 언어'라는 주제 하에 선택한 이섬의 위시리스트 다섯책을 소개해본다!! 이 때문에 이유나 언어가 겹쳐 눈물을 머금고 뺀 것들도 있어 완벽하게 선호도 베스트5는 아니지만!! 아래 책들도 모두 정말 읽고 싶고 놓치기 싫은 책인건 매일반.

일단 빠듯한 주머니 사정에 예산을 줄여보고프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소장용으로 양장본을 선호하는데 나는 반양장본이 읽기도 편하고 소장하는데 특별히 나쁜 것도 못 느끼겠고 가격도 더 저렴해서 반양장본으로 골라봤다.(참고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은 모든 책이 양장본과 반양장본으로 출간되어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피아노 치는 여자 / 엘프리데 옐리네크(독일:독일어

추억의 책 / 노벨문학상 수상작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미하엘 하케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원작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매우 인상깊게 봐서 원작소설도 서둘러 찾아 읽었던 기억이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나중에 이 책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줄이야. 이 책은 문학동네에서만 번역한 책인데 1997년 이병애 역으로 낸 책(내가 읽었던 책은 이 책이었다)을 세계문학전집 안에 포함시키면서 새롭게 펴낸 것이다. 지금 읽으면 처음 읽었을 때 감흥과 어떻게 다를지 추억에도 빠져보고 싶은 책.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5   
인공호흡 / 리카르도 피글리아(아르헨티나:스페인어

소재 / 제3세계문학 

올해 인상 깊게 읽은 책 중 '더러운 전쟁'을 소재로 한 아르헨티나 소설이 있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리스트를 보던 중 이 시기에 출간된 다른 작가의 아르헨티나 소설이 있길래 반가워서 책 소개글을 열심히 읽었다. 이 책 역시 문학동네에서만 번역한 책,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리카르도 피글리아의 소설이고 그의 문제작인데 실험적인 작법 속에 시대적 배경도 녹아 있는 건지 직접 책을 읽지 않는 이상 정체를 모르겠고, 궁금해 안달 나 꼭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또 지금은 제3세계란 단어를 쓰는 게 무의미한 시대지만 비교적 많이 번역되지 않은 라틴문학에 대한 관심도 꾸준하기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2   
한눈팔기 / 나쓰메 소세키(일본:일본어

자전소설 / 원제에 충실한 제목

일본 (근대)문학을 앎에 있어서 나쓰메 소세키를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길 위의 생>이란 출간된 적이 있지만 <도련님>이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만큼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진 않았다. 타출판사의 번역본보다 문학동네 번역본을 더 기대하며 마음이 가는 이유는 제목처리에 있다. 나는 출판사가 번역하면서 임의로 제목을 바꾸는 것보다 원제에 충실한 것을 선호하는데 이 책의 원제 道草은 한눈팔기란 뜻이기 때문이다. 한편 작가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근간이 될만한 나쓰메 소세키의 가장 자전적인 소설이란 점에서 무척 끌린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절망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러시아:러시아어

명작가의 초기작/러시아어판 완역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 작가이지만 러시아어와 영어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내가 접했던 그의 소설들은 <롤리타> 등 그가 영어로 쓴 작품들이었고, 러시아어로 쓴 책들은 대부분 초기작인데다가 접해본 적이 없었다. <절망> 같은 경우 그의 초기 대표작이자 그의 러시아어 작품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책인데 이 작품은 러시아어판과 영문판(나중에 그가 손수 번역해 발표한)이 있다. <절정>의 러시아어판 번역(게다가 완역)은 이번의 문학동네가 처음. 작가 소개에서 말로만 듣던 전설적인(?) 명작을 문학동네 덕에 이번에 담뿍 즐기고 싶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2   
더버빌가의 테스 / 토마스 하디(영국:영어

고전명작/명번역에의 갈망   

<더버빌가의 테스>는 토마스 하디의 대표작이자 필독도서급의 고전명작임에도 불구하고 번역하기 까다로운 작품으로 유명하고 그래서인지 좋은 번역본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작품일수록 좀더 좋은 번역으로 읽고 싶은 법. 영미문학의 경우 좋은 번역본 발표를 2005년에 한 후 업데이트가 없는데 2005년까지의 가장 좋은 번역본으로 평가받은 것은 김보원 역이었다. 올해 이 번역본이 개정판이 나오긴 했는데 문학동네의 번역본이 테스의 사투리 사용까지 신경 쓰는 등 기존 번역본들과 차별화되는 부분들이 많아보여 새로운 <더버빌가의 테스> 최고 번역본으로 떠오르는 게 아닌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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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6일 - 유괴, 감금, 노예생활 그리고 8년 만에 되찾은 자유
나타샤 캄푸쉬 지음, 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3096일]
어떤 픽션이나 이론서에도 없는,
유괴 피해자의 용기 있는 고백




서평원문: http://der_insel.blog.me/120141956826

그녀를 처음 안 것은 뉴스를 통해서였다. 아마 이 책의 원서 출간 즈음일 것이다. 금발의 젊고 건강해 보이는 한 아가씨가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었다. 8년이 넘게 유괴·감금된 사연의 주인공이란 걸 알고 놀랐고 당당한 모습과 자기의 아픈 경험을 책으로 정리해 낸 용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번역본이 출간되었고,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책을 구매했다가 저자의 나이를 보고 한 번 더 놀란다. 수많은 유괴·감금 사건이 일어나지만 대부분 피해자가 살해되는 결말이었다.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학술용어도 있고 그를 소재로 한 영상이나 소설, 혹은 변태애로물들이 종종 나오기도 했다. 또 스톡홀름 신드롬은 아니어도 유괴를 소재로 한 범죄학 책이나 소설들도 꽤 많다. 그러나 이들은 실화를 소재로 하든 안 하든 제 3자의 시선에서 사건을 재구성하고 분석·평가하는 것이 지배적이었고, 피해자의 시선으로 하거나 피해자가 직접 목소리를 낸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타샤  캄푸쉬의  <3096일>은 매우 신선하고 소중한 기록이다. 
 

 


왜 하필 내가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을까? 그는 왜 나를 선택했고 가두었을까? 이 질문들이 그때쯤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질문에 매달리고 있다. 그 범죄의 이유는 답을 찾는 게 절망적일 만큼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 유괴에 어떤 의미라도 있기를, 나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분명한 논리가 있기를 원했다. 우연히 나를 습격한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있기를 바랐다. 단지 한 남자의 정신병과 충동 때문에 나의 청소년기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p.84

 

<3096일>은 먼저 자신이 유괴되기 전까지의 삶을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8년 반의 감금생활 동안 그녀는 자신이 유괴된 날짜와 유괴 당시의 하루와 심리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자신이 유괴된 이유를 알기 위해 고분 분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괴 전 그녀의 자아정체성을 형성하고 유괴 후 그녀가 자신을 놓지 않은 힘이 된 가족과 성장배경은 중요하다. 예상치 못한 어머니의 늦은 임신으로 인한 탄생, 사람은 좋지만 유흥에 빠져 있던 친부와 놀던 혼란스러움, 복잡한 가족사에 따른 애정결핍감, 할머니에 대한 애착, 유치원과 학교생활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들 등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서 유괴되기까지의 삶을 하나둘 정리해본다. 그리고 그것과 유괴를 연결해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나타샤가 유괴된 1990년대 중후반에는 유럽에 각종 끔찍한 유아유괴사건이 판을 쳤고 일부는 아동포르노산업과 관련되기도 하였다. 나타샤도 뉴스를 봐서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10살 꼬마 나타샤는 자신이 145cm에 45kg의 통통한 몸매에 얼굴도 예쁘지 않고, 금발 머리도 아니기 때문에(나타샤는 어릴 때 연한 갈색 머리로 자라면서 머리색이 바뀌었고, 지금도 전형적인 금발은 아니다) 유괴의 대상이 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등교길에 나타샤는 유괴되어 집과 멀리 떨어진 스트라스호프의 좁은 지하방에 갇힌다. 기분 나쁜 냉기와 습기, 어둠과 벌레와 싸우며 그녀는 그 곳에서(윗집이라 부르는 범인의 공간까지 세계가 확대되기는 하지만) 어린이에서 사춘기 소녀로 그리고 성인여자로 성장되게 된다. 몇 년은 거울조차 보지 못하면서. 

 


지금 내 앞에 인간성이 결여된 한 사람이 서있었다. 겉모습은 부서질 듯 보이고, 그의 눈빛은 한 연약한 인간을 향하고 있었다. 현실 세계에서는 낙오자이며, 작은 아이를 억압하는 것으로 힘을 과시하려는 인간. 연민을 느끼게 하는 광경이었다. -p.127

넌 이제 가족이 없어 내가 너의 가족이야. 내가 너의 아빠고 엄마고 할머니고 언니인 거야. 너에겐 내가 전부야. 너에겐 이제 과거란 없어. 내 옆에서 더 좋은 것을 가지게 될 거야. 넌 정말 운이 좋아. 내가 널 받아들이고 너를 잘 보살피고 있으니까. 내 말만 들어. 내가 너를 만들었어. - p.131

 

유괴범은 성인남자이고 피해자는 여자아이, 장기간의 감금을 통한 일종의 양육(사육?)을 행한다는 점에서, 실제로도 그런 사건들이 있었기도 하기에 사람들은 흔히 성노예 관계로 접근하려 한다. 실제로 나타샤가 탈출하고 나서 언론들은 자극적인 기사를 원하며 그런 쪽의 내용을 취재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녀는 범인과의 성적 관계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피했으며 이 책의 서술을 봤을 때도 그런 것과는 거의 거리가 멀다. 어린이였을 때는 비교적 호의적이었지만 월경이 시작되고 감금이 장기화되면서는 그녀의 조그만 흔적도 못 참아 삭발시킬 정도로 결벽이 심해지며, 혹독한 다이어트와 노동을 시키고 옷도 제대로 입히지 않고 툭하면 폭행을 일삼는다.

 


자신의 인생의 8년 반 동안 만난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그녀가 범인과 지내며 범인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그녀는 살기 위해서라도 범인을 이해하고 알기 위해 애써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폭력의 강도는 높아졌지만 범인이 그녀에게 속내를 털어놓거나 경계를 푸는 일이 조금 많아진다(나중엔 같이 외출까지 한다). 범인은 끝까지 자신의 유괴 동기를 밝히진 않지만, 그녀가 자신으로부터 절대 도망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면 자유를 주는 대신 끝까지 계속 같이 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범인은 그녀의 이름을 뺏고 삶을 뺏으며, 자신의 이상적인 시나리오에 맞춰 나타샤가 반응하고 살기를 원한다. 이러한 범인의 심리는 유괴범과 장기감금의 일반적 분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흔히 이럴 경우 피해자는 정신 전반이 붕괴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나타샤는 이겨낸다.
 


나타샤는 절망이 극에 달해 감금생활 동안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결국 나타샤는 삶을 선택하고 탈출에 성공해 자유를 찾는다. 8년 반, 동안이었던 30대 중반의 남자(범인)가 40대 중년이 되고, 10살의 아이가 19세의 성인이 될 만큼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러나 도망쳐 주민의 도움을 받아 경찰서까지 가기까지의 과정도 힘겨웠던 것처럼, 그녀는 탈출해서 지금까지 자신을 향한 또 다른 폭력과 전쟁 중이다. 그녀의 존재는 이 유괴사건이 제대로 수사되지 못한 원인이었던 수많은 경찰스캔들을 끄집어냈으며, 세간의 무섭도록 열렬한 관심은 동정을 가장한 기만이었다. 또 그녀의 경험과 감정을 단순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일축하려는 학계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해야 하였다. 
 


차라리 죽기를 갈망했던 나타샤가 결국 삶을 택하자, 그런 나타샤에게 끊임없이 삶을 강요하며 나타샤와의 이상적인 동거를 꿈꿨던 범인은 자살을 택한다. 이는 목차와 출판사가 제공한 책 소개에도 나와 있는 정보이고 나타샤 캄푸쉬 사건을 검색해도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독서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천인공노할 스포일러 행위는 아니다. <3096일>의 핵심은 신문과 방송이 보여주는 사건의 표면적인 사실관계가 아니라 피해자 스스로 달력을 얻어내 날짜를 새고 일기를 기록하며 버틴 8년 반의 생생한 경험담이다. 한편 역자 후기에도 언급이 없어 왜 책날개에 나타샤 캄푸쉬 외에 2명의 사람이 더 소개되는지 무척 궁금했는데 책의 저작권 정보 면을 확인하고 알았다. 엄밀히 말하면 <3096일>이 나타샤만의 수기는 아니고 나타샤의 인터뷰 녹취록과 일기를 토대로 전문작가가 정리한 것이다.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 중에서도 나타샤가 겪은 일은 언론의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큼 특별하고 심각한 사건이었다. 살아있다는 이유로 범인보다 그녀가 주목받고 신상이 공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개명하고 멀리 떠나 살라고 권하는 것처럼 24살의 나타샤가 탈출 이후 지금까지 시달렸고 앞으로도 견뎌야 할 세상의 편견은 엄청나고 잔인하다. 대중들은 알 권리를 가장해 그녀에 대해 집요하게 캐고선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자기 자신을 믿고 놓지 않으며, 탈출 4년 후 자신의 감금 경험을 모두 정리해 책으로 발표한 그녀의 침착함에 감탄하고 응원한다. 나타샤의 용기 있고 귀중한 고백이 유괴 피해자들을 좀 더 바르게 이해하고 편견을 지우는 데 한 역할을 했음 한다. 그리고 그녀의 남은 삶은 누구보다 행복하고 평범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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