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물리학 - EBS 다큐프라임
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제작팀 지음, 홍성욱 감수, EBS MEDIA 기획 / 해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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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물리학] 빛으로 엮은 물리학의 역사

 

 

 

상아탑에서의 인문학은 숨만 겨우 부지한 지 오래다. 그럴수록 아이러니하게 문화계와 비즈니스계에서는 인문학이 활개를 치고 있다. 하지만 기초과학·순수과학 분야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이해하기 어렵고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고정관념이 너무 강해서일까, ‘쉬운’을 강조하는 인문교양서의 홍수 속에서 과학교양서는 드문드문 등장한다. 게다가 대다수가 아동청소년 겨냥이다. <빛의 물리학>은 과학서 독서에 대한 오랜 자기반성과 갈증 상태에서 만난 책이었다. 내 안의 과학소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언젠가부터 비문학 독서 중 과학서의 비중이 손을 꼽을 정도가 되었다. 올해는 기초과학순수과학서를 한 권이라도 제발 읽자는 것이 목표였다. 한 달 평균 10권정도 읽고 있는 올해, 반년 동안 읽은 기초과학순수과학서는 <빛의 물리학>이 유일하였다.

 

수신료 납부를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계속 느끼면서 꼬박꼬박 냈던 것은 3%가 EBS 몫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EBS 방송콘텐츠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두터웠다. EBS에서 내놓는 다큐 몇 개만으로도 1년 치 수신료가 아깝지 않았다. 그래서 동명의 6부작 EBS다큐프라임을 단행본화한 <빛의 물리학> 역시, EBS란 이름만 믿고 덮어놓고 읽기 시작하였다. 갈릴레이부터 다중우주론까지 ‘빛’이란 키워드로 엮은 물리학의 역사였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워낙 오랫동안 과학과 멀리 있던 만큼, EBS는 믿으나 나는 믿을 수 없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책을 읽었다. 굉장히 독특한 다큐멘터리였다. 각종 드라마가 삽입되고, 과학과 전혀 상관없는 무용가가 과학자들의 발자취를 찾아 여행을 떠나고 다큐멘터리의 진행과 내레이션 맡았다. 영상은 무척 감각적이었고, 구성은 매우 독특했으며, 그 속에 담은 내용들의 양이 여간 녹록치 않았다.

 

-6장------물리학의 역사는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을 합친, 만물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궁극의 이론을 찾으려는 여정

----- 1장,3장[17C][빛의 속도] 갈릴레이의 상대성 원리: 아무런 힘을 받지 않고 같은 속도로 움직일 때 나를 규정하는 건 상대의 움직임이다.  

- 3장[18C][빛의 색] 뉴턴의 광학: 빛 속에 모든 색깔들이 혼합되어 있으며 각 색깔들은 고유한 굴절률을 가진다.

1장,3장-----------------------------------------빛은 입자다, 빛은 직진한다.------------1장,3장----------------------------[19C] 빛은 파동이다. 빛과 전자기파의 속성은 같다.--1장[20C]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 :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 km이며 일정하다. 상대적인 것은 시간이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시간은 느려진다.

-2장[20C]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 아니라 공간이 휘어지기 때문에 생긴 것이며 모든 공간에 미친다.→시간은 다르고 공간은 휘어져 있다.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주위의 공간을 휘게 만들고, 그 휘어진 공간 속을 나아가고 있는 직진하는 빛은 휘어져 보인다.

1장,2장------------------------------------------------빛은 입자다

-4장,5장[20C] 양자역학: 원자보다 작은 양자의 세계. 에너지는 불연속적이다. 전자는 확률적으로 존재한다.

4장,5장-----------------------------------빛은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가진다.--------4장,5장-----------------세계의 미결정성(불확정성)과 확률성에 대한 상대성이론(N)과 양자역학(Y)의 전쟁/10의 마이너스 33승의 미시세계. 어떤 양자역학자도 아직 양자역학을 마스터하지 못한--------------------------------------------------------------------------------

-6장[20C] 아인슈타인의 통일장이론: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일시키려는 노력(미완)

----------------------------블랙홀의 발견. 양자역학이 중력과 충돌한다는 깨달음/1970년대 양자색역학으로 전자기력·약력·강력까지는 통일이론을 만드나 끝내 중력에서 막힘/중력 개새끼---------------------------------------------------------------------------------------

-6장[20C] 끈이론: 10차원의 세계. 열려 있지도 닫혀 있지도 않고 분리되기도 합쳐지기도 하는 끈이 다양하게 진동해 우주를 만든다.

-6장[20C] 초끈이론: 다섯 개의 끈이론을 통일시키자. 11차원과 M-이론(우주의 모든 물질이 거대한 막Membrane으로 연결되어 있다. 차원과 차원 사이에, 끈이 막에 붙거나 막에서 끈이 생기거나, 막 자체가 차원이 되거나.)

-6장[20C] 다중우주론: 우주는 거대한 막들의 충돌로 탄생. 우주는 여러 개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못 다 이룬 꿈 통일장 이론을 계승 중인 현대물리학----------------

 

6부작 다큐멘터리와 320여쪽의 책으로 <빛의 물리학>이 논하는 물리학의 역사를 요약하면 위와 같다. 얼마나 소양이나 집중력이 부족한 걸까. <빛의 물리학>을 쉽고 잘 만들었다고 호평 일색인 대중들의 반응을 보며, 인지 갈등을 느꼈다. 비전공자에게 진행을 맡겨 그만큼 이 다큐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음을 어필하자, 몇 십 분당 상황극을 넣어 관심을 유도하자, 스토리텔링과 정보제시를 적절하게 혼합하자, 계산적으로는 제작진의 의도와 대중들의 반응을 알겠다. 그런데 누가 봐도 정석적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며, 그 계산적인 요소들이 산만하게 느껴져서 자꾸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올해 EBS다큐프라임 단행본화한 책 2권을 서평하며 공통적으로 얘기했던 것이, 소재와 내용은 좋으나 분량 강박 때문에 동어반복 등 늘어져 버리는 다큐멘터리를 책은 군더더기 없이 잘 요약해 만족스럽다, 책으로 읽으라는 것이었다. <빛의 물리학>도 그런 편이지만 좀 더 다큐멘터리와 책이 닮았다. 다큐멘터리의 산만함과 아쉬운 점이 책에서도 똑같다.

 

   

오히려 이 책의 장기인 현란한 편집과 테크닉을 젖히고, 책 내용을 요약해보며 정보 콘텐츠 위주로 책을 훑어 읽으니 본론이 한 눈에 들어왔고, 그제야 다큐멘터리와 병행해도 만족스럽지 않았던 일독 때와 달리 책이 마음에 들고 내 책이구나 싶어졌다. 참으로 기묘한 인상을 남긴 책이었다. 이렇게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느껴지는 책도 단숨에 매료되는 책 못지않게 좋은 책인지도 모르겠다. 빛이란 키워드로 빛의 속성에 대한 과학자들의 결론을 나열하며 작게는 근현대 물리학으로 크게는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부터 빠르게 물리학의 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인 책이었다. 사진과 예시그림도 많고 EBS다큐책 특유의 눈높이 문체 때문에 (나처럼) 너무 무지렁이만 아니라면 대부분의 대중들이 그랬듯 열광하면서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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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하기 좋은 날 - 클라라의 달달한 바느질 소품 40
정진희 지음 / 시드페이퍼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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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하기 좋은 날] 한 땀 한 땀 포근한 보통날
 
 
 
 
저에게 힘이 되고 좋은 에너지가 되어 준 것은 바느질이었답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펑펑 오는 날도, 햇살이 쨍쨍한 날도…
클라라의 작업실은 늘 '바느질하기 좋은 날'입니다.
- 작가의 말 中
 

'클라라 정진희 저'. 책에서 그 이름을 발견한 순간 무척 반가웠다. 마치 오랜만에 친구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흥분해선 책장을 이리저리 넘겼고, 품에 책을 꼭 안아보았다. 한 2010년 이후로 국내에서 펠트공예나 퀼트 해본 사람 중에 클라라 정진희를 모르는 이가 과연 있을까? 그 이름은 몰라도 디웨이하면 아마 다 ‘아~~~’하며 아실 듯싶다. 대표적인 와이프로거·파워블로거이자 디웨이 대표 디자이너기도 한 클라라 정진희, 다채로운 그녀의 핸드메이드 작업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바느질’이다. 어떤 원단으로든 바늘과 실이 있으면 뚝딱뚝딱, 웬만한 것은 다 만든다. 4년 전 손바느질에 잠깐 빠져 있을 때 그녀를 알았다. 직접적으로 그녀의 블로그를 들락날락하기보다, 이웃블로거의 이웃블로거여서 스크랩 포스트와 친목 포스트로 많이 접해서 친숙하였다. 디웨이 유저였기도 했고 말이다.

 

 

클라라 정진희의 바느질 소품 40개를 단돈 만 팔천 원으로 안다? 그녀의 도안 값을 생각하면, 올 6월 시드페이퍼에서 출간한 <바느질하기 좋은 날>은 거의 주워가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온라인 서점에서 할인구매도 가능한데다 출간 초반 각종 이벤트까지 감안하면 놓칠 수 없는 기회이다. 이 책 덕분에 4년 만에 다시 바늘을 잡게 되었다. 펠트공예 전용 바늘도 잃어버리고, 한 번도 안 쓴 새 기화성펜과 수성펜이 완전히 못 쓰게 될 만큼의 시간이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재료들을 찾아다가 책을 살펴보며 만들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새삼 바느질을 그만 뒀던 이유가 생각났다. 바느질 재미에 푹 빠지면 빠질수록 손바느질의 시간적 비효율성과 재봉틀 소유에 대한 갈망이 커졌고, 주로 날 위한 장난감 위주로 만들었는데 아기용품도 만들고 싶고 남에게도 선물하고 싶고 자꾸 만들고 싶은 것은 많아지는데 현실의 여건이 따라주지 않으니 절로 흥이 사라져서였다.

http://blog.naver.com/isa0814/220026348334

 

 

책을 읽고 나서 작가의 블로그를 찾았다가 책을 읽으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집필 뒷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내용이 이 책에 실린 바느질 도구들이 실제로 작가가 현재 쓰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담았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책을 읽으면서 낡고 흠집투성이인 재단가위를 한참 쳐다보다가 본문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을 만들면서 무엇을 어떻게 사진에 담을지 이리저리 배열하고 순서나 물건을 바꿨을 작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의외로 책 출간은 이번이 처음이라니, 더 힘이 들어가고 고민도 많았을 듯싶다. 인심도 넉넉해서 책에는 40작품이라 표기되어 있지만 2작품이 더 들어가 있다. 도안은 35개인데 도안이 없는 7작품의 본문을 확인하면 단순 사각형 등 굳이 도안이 없어도 본문 속 만드는 법만 보고도 재단할 수 있어 생략한 것으로 추측된다. 도안이 본문 순서와 좀 다른 것은 작품에 따라 도안이 한쪽짜리인 것도 있고 두쪽짜리인 것도 있어, 페이지 편집하면서 부득이하게 배열을 바꾼 것 같다.

 

 01 | 파격적인 책값(40작품-18,000원/할인 가능)

 02 | 다채로운 스펙트럼(천,펠트,가죽,헌옷 등/생활용품,가방,신발,장난감 등)

 03 | 친절하고 세심해(재료,도안,만드는 방법 등 All-in-One)

 04 | 소박한 보통날에 충실한(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쉽고 저렴한 소품들) 

 

01 | 손바느질법이 좀 더 추가되었으면(버튼홀스티치,아플리케 등)

02 | 엄밀히 말하면(42작품,35도안/도안 없는 7작품 도안 없어도 극복은 가능하지만)

03 | 사진이 조금 크거나 설명이 좀더 자세했으면(특히 도안 없거나 난이도 높은 단계 처리시) 

04 | 프롤로그에 재봉 관련 얘기도 있었으면(본문에서 손바느질과 비중이 같거나 이상인데!)

 

 

 

<바느질하기 좋은 날>에 담긴 소품들은 너무 고가의 재료가 필요하다거나, 지나치게 어렵지 않아 좋다. 아이를 위해, 친정엄마에게 선물하려고, 산뜻하게 집안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등 각 작품 설명에 앞서 그 작품과 관련한 작가의 짧은 메모들이 있는데 그 짤막한 글들이 모여 책 전체의 분위기를 감성적으로 만든다. 책의 편집과 사진의 색감도 그런 정서를 돋우는 데 한몫 하는데, 심미성에 치중하다 사진 크기를 너무 줄인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설명처리를 한 것도 있고 바느질 공예의 특성상 글보다 사진에 의지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설명 사진들이 4.4cm*3.2cm다보니 과정이 잘 안 보이는 것들이 많다.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책이긴 하지만, 바느질 완전 생초짜면 막히고 헤맬 수 있다. 또 재봉 비중이 손바느질과 같거나 그 이상인데 바느질 도구에서 부자재까지 다루는 프롤로그에서 재봉 관련 얘기는 전혀 없는 것도 아쉬웠다. 기왕 입문자부터 고급자까지 두루두루 볼 수 있는 바느질 책을 기획했으면 손바느질, 재봉 얘기 모두 있고 바느질법도 버튼홀스티치와 아플리케 등도 추가해서 좀 더 완벽한 가이드가 될 수 있는 프롤로그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쓰고 보니 책의 단점만 부각시킨 것이 아닌가 싶은데 가격, 구성, 내용 등 워낙 훌륭한 책이라 욕심이 나서 해보는 군소리이다. 이런 작가라면 더욱 강력하고 섬세한 차기작을 낼 것 같다고 기대가 되어서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꼭꼭 봉인해두었던 공예상자를 다시 열면서 까맣게 있고 있던 바람이 다시 찾아와 괴로웠지만, 더없이 행복하였다. <바느질하기 좋은 날>은 클라라 정진희의 블로그 이름이기도 하다. 문득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날에 바느질이 하고 싶어지는지. 한편, 취미실용서로 집은 이 책에서 생각지 못한 소득은 ‘바느질하는 마음’을 인지한 것이었다. 바느질을 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거운 적이 있었다면, 시간 죽이기 단순노동으로 느껴지지 않은 적이 있다면, 그 한 땀 한 땀에 사랑을 담아서가 아니었을까. 돌이켜 보면 그 보통날은 포근하고 따스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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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을 오라니 철학하는 아이 1
클레어 A. 니볼라 글.그림, 민유리 옮김 / 이마주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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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을 오라니] 당신의 오라니를 잊지 말아요!

 

산 위에는 늘 산들바람이 불었습니다. 산들바람은 이끼 낀 바위도 어루만져 주고, 비 온 뒤 불쑥 자라난 야생화와 버섯도 흔들어 부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마을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멀리서 보니 마을이 참 작고, 단정하고 조용해 보였습니다. 나는 이 마을이 품고 있는 온갖 삶의 소리를 떠올렸습니다. 내가 배우고 느끼고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 정말이지 나는 아버지의 마을 오라니를 사랑했습니다! - p.51

 

우리나라에서 출신지는 자신의 고향이 아닌 아버지의 고향을 기준으로 한다. 그 때문에 단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지역이 출신지가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문제는 이것이 지역차별과 지연의 근거가 되는 연좌제적 잣대로 사회에서 통용되어왔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뿌리를 찾고 인지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인데,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 있다면 너무 서글프다우리나라 수도 서울은 3대 이상 토박이가 전체 인구 6%에 불과한 곳이다. 그만큼 출신이나 고향의식도 적고 특별한 지역색도 없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가 지방 출신인 부모님보다 뿌리에 대한 갈망과 애착이 더욱 강한 편이다. 본적, 출생지, 성장지 모두 서울이지만 정말 완전한 서울사람일까란 의문, 나름 유창하게 사투리를 쓴다 생각해도 영락없이 아버지의 고향에서 낯선 이방인인 것,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 같다는 생각이 쉽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 아이에게 오라니는 완전한 세상이었고, 삶의 한가운데 서 있게 하는 곳이었다.” 책 끝의 작가의 말에 나오는 구절이다. 클레어 A. 니볼라는 자신이 그림 그리고 글을 쓴 동화 <아버지의 마을 오라니>를 마치며 이 책을 사라져 가는 공동체 삶의 기록이라고 정의하였다. 이탈리아 이민 2세대인 클레어 A. 니볼라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뉴욕인이다. 뉴욕은 서울보다 더 크고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모여 산다. 지중해의 작은 섬 산골 마을, 오라니엔 니볼라가 뉴욕에서 겪지 못했던 자연이 있었고, 공동체가 있었다. 모든 희로애락 마을 안에서 이루어졌고, 모든 음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먹을 수 있었다. 이따금 찾는 오라니에서 친척들과 보내다가 다시 뉴욕으로 오면, 더욱 많은 사람과 발전된 문명이 있지만 무언가가 결핍된 것 같았다. 작가는 궁금해졌다. “저 사람들에게도 자기만의 오라니가 있을까?”

 

동화책, 그림책에 관심이 많아 한권 두권 독파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라가치상 수상작들을 많이 찾아 읽게 된다. <아버지의 마을 오라니>를 짚은 것도 수상 타이틀에 눈이 가서였다. 알고 보니 <아버지의 마을 오라니>는 라가치상 수상작이 아니라 멘션작이었지만, 다른 여러 도서상들을 수상하였다.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나의 오라니는 무엇인지, 아버지 손잡고 아버지 고향에 가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였다. 내가 사는 곳보다 더 큰 도시에서 나의 아버지의 고향보다 훨씬 외진 곳으로 가는 이야기다보니 작가의 경험이 더욱 극적이다. 6촌 이상 먼 친척이나 체험을 가면 모를까 시골과 연결고리가 전혀 없다는 것도 작가만큼 아버지 고향에 애틋함과 감명이 크지 않은 이유인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채우는 벅찬 무언가를 꼭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작가가 한편으론 부러웠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 작가와 함께 읽는 나도 온 마음이 따스함으로 가득 차는 경험을 했지만 그것이 상상이 아닌 작가처럼 실체적 경험이 될 수는 없기에.

 

조선일보 계열 조선에듀케이션의 어린이문학 임프린트 이마주에서 이번에 철학하는 아이라는 그림동화 시리즈를 기획하였다.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물음에 대한 답을 함께 찾는다는 것이 출판사에서 밝히는 시리즈 기획 의도이다. <아버지의 마을 오라니>는 이 철학하는 아이의 첫 번째 책으로 가족 공동체의 소중함을 주제를 붙여 출간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오라니 같은 고향을 가질 수는 없지만, 어느 마을에서나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지키는 도덕과 문화와 정서가 있다. 이웃사촌, 친척, 가족, 사랑, 협동 등을 아이들이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담뿍 느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마을 오라니>의 작가처럼 지금의 나를 있게 하고 떠올리면 행복한 무언가가 있었으면 한다. 우리의 오라니를 지키면서 우리의 아이들도 오라니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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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 - 그리움 많은 아들과 소박한 아버지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박동규.박목월 지음 / 강이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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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 모든 아비와 맏이의 이야기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을 들고 나와 아버지와의 인연을 글로 쓰고자 한 것은 참 오래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그해 내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돋아났고 나는 이 머리카락을 만지며 아버지의 우산 안에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는가를 뼛속 깊이 깨달았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셨는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고 이 생각의 골짜기를 타고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서 글로 남겨보고 싶었다. (...) 아버지의 글 곁에 내 글을 가져다놓은 부끄러움을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살다 가셨다’는 목매인 소리를 하면서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고 살았던 행복을 이제야 고백함을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 박동규(머리말 中)

 

 

 

나의 아버지는 젊을 적에 몹시 아들을 갖고 싶어 하였다. 목욕탕에서 같이 등을 밀 수 있는 인생의 경쟁자이자 벗이자 제자인 당신을 꼭 닮은 동성, 비단 우리 아버지 뿐 아니라 피가 뜨거운 모든 사내의 본능이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매우 이름은 매우 여성스럽게 짓고선,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진 선머슴처럼 나를 키우셨다. 나에게 아버지는 평생의 태산이다. 어릴 적엔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어보는 것이 소원이었고, 내 방황과 성장의 대부분도 아버지를 의식하는 데서 일어났다. 아버지를 단 한번이라도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에게 “제발 책 좀 읽어라 그렇게 무식해서 어디다 쓰니” 따위의 핀잔을 듣는데 언젠가부터 그 소리가 싫지 않아졌다. 영원히 나의 영웅 나의 거인 아버지가 나보다 강하고 똑똑하셨으면 한다.

 

 

대부분의 남자는 얼떨결에 아버지가 된다. 열 달 동안 몸과 마음으로 품으며 차근히 어미가 되어 가는 여자와 달리, 어느 날 갑자기 아내의 임신 사실을 듣고 다시 또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닮은 핏덩이를 품에 안아보게 된다. 처음 똥기저귀를 갈고 밤에도 분유를 먹으며 1일 몇식을 하는지 모르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의존하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인간이 어느 날 삶에 등장한다. 그래서 부모로서의 성장은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고 성질도 약간은 다른 듯 하다. 언젠가 나의 아버지는 내게 그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부모에게 맏이는 ‘함께 처음’ 해본 일이 많아서 자식보다 동지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세상의 모든 맏이들에게, 모든 부모와 맏이 간에는 공통적인 특유의 정서가 있다. 설령 맏이 구실을 못하는 맏이라 하더라도, 맏이는 맏이구나 싶은 다른 형제들과 다른 구석이 있다.

 

나의 아버지는 서른 먹은 딸에게 아직도 종종 아기라고 부르곤 하신다. 남동생은 한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나는 그것이 맏이 구실도 제앞가림도 못하는 내 무능력을 욕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응급실에 실려 갔던 작년 가을,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어떡해요. 우리 아기가 아파요. 많이 아파요.” 손을 떨며 병원에 전화를 건 부모님의 이구동성, 늙고 큰 내가 언제든 당신을 핏덩이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서툴고 어린 부모로 돌아가게 만든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의 ‘함께 처음’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박동규 교수는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를 엮으며 ‘아버지와 아들’을 강조했지만, 아버지 박목월 시인과 영원히 아버지를 그리고 좇는 장남 박동규 교수를 보며, 이 책이 모든 아비와 (성별을 초월한) 맏이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같이 있어도 눈에 가득 담아도 늘 그립고 애틋한 내 아버지를 새삼스럽게 품고 책에 감정이입을 많이 하였다.

 

내 필명은 내 글의 지향을 상징하는 두 명의 시인을 품고 있다. 그러나 정작 내게 시는 좀처럼 가까워질 줄 모르는 콤플렉스다. 박목월 시인 역시 학창시절 문학시간에 배운 몇 시들을 제외하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그저 먼 당신이었다. 친일하지 않은 대표적 시인이라 존경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래서 우습게도 시인으로서의 박목월 시가 아닌 아버지로서 박목월 일기 발췌본으로 그에게 더 먼저 다가간 셈이 되었다. 분명 이 책이 7년 전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제목 같은 내용으로 나온 것으로 아는데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란 제목으로 책을 기획했다는 책 머리말을 읽고 처음에 잠깐 갸우뚱하였다. 알고 보니 제목만 수정해 머리말을 쓴 것이었다. 본문은 같지만 아버지 박목월의 글보다 아들 박동규의 글이 먼저 나오는 것도 재간본의 다른 점이다. 두 분 다 워낙 한국문학계의 거목이다 보니, 부끄럽게도 처음엔 나도 모르게 부자의 문장미를 따지면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반성할 겨를도 없이 내용 자체에 빠져 들어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비와 맏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울림에, 문장 수준의 높고 낮음은 무의미하였다.

 

 

박목월 시인의 일기를 읽으며 내 아버지의 일기를 떠올렸다. 꼼꼼하게 기록한 하루의 소사와 그 정결한 글씨하며, 책벌레 문학청년다운 문장력에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존경했는데, 박목월 시인의 일기를 읽으며 그 생각과 함께 시인은 일기조차 군데군데 시 같은 면모가 있구나 싶었다. 많지 않은 발췌 분량임에도, 소재도 내용도 문장도 별로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도 참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일기들이었다. 박동규 교수의 글과 함께 읽으면 책 속에 일기 외 실린 박목월 시인들의 시들과 잡문들의 배경을 알 수 있어서 더 감흥과 이해가 배가되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모든 자식들을 ‘어린 것들’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훗날 박동규 교수 역시 자신의 자녀를 그리 부르게 되는데, 별것 아닌 호칭인데도 자녀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애정과 안쓰러움 등 복합적인 감정이 함축적으로 묻어나오는 것 같아 가슴에 박혔다.

 

 

‘아버지와 아들’을 주제로 한 공동 저작을, 박동규 교수는 아버지 사후에야 아버지 글 옆에 자신의 글을 나란히 슬쩍 얹는 모양새로 완성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서 아버지에 대한 한없이 수줍고 인간적인 아들의 고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책과 정서는 맏이만이 낼 수 있는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눈물범벅인 내 손을 꼭 잡고 우리 아버지가 내게 해주셨던 말이 있다. 두 가지 일을 모두 겪을 때야 진짜 어른이 될 수 있는데 하나는 부모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친을 모두 잃는 것이라고, 당신은 25년에 걸친 성장통 끝에 마흔 다섯인 오늘 진짜 어른이 된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덧붙였던 말, 스무 살 때 아버지를 여윌 때 단 한 번도 돈 벌이를 해보지 못하고 아프기만 했던 병약하고 무능력한 아버지였지만 당신에겐 온 세계가 무너진 느낌이었다고, 그런데 어머니를 놓아드린 오늘은 슬프지만 제법 견딜 수 있는 것은 이제 당신이 아버지고 아내와 우리 남매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어린 나는 부모가 되는 것은 성인으로 무사히 성장한 인간이 사회를 위해 할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조금 커서는 어떤 인간을 20년 이상 지켜보며, 그의 삶을 도와주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래서 누구보다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지금은 감히 품어볼 엄두가 안 나는 사치가 되었다.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에 멈춰버린 내게, 그냥 여전히 맏이(자식)이기만 할 뿐인 내게 장남에서 장남이자 아버지가 된 박동규 교수와 그 부자의 글이 담긴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은 아버지에서 아이로 다시 그 아이로 이어지며 혈관에 새겨지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진짜 어른만이 남길 수 있는 한 부자의 글 모음을 보며 마지막 책장을 덮던 날, 아버지를 맏이를 어른을 한없이 헤며 꼬박 밤을 지새웠다. 생판 남인 부자의 글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우리 부자를 겹쳐보며 속에 담고 곱씹다 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생각난 김에 아버지 좋아하는 팥찹쌀도너츠나 몇 개 사서 쭐래쭐래거리며 찾아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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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아한 거짓말의 세계 - 광고의 눈으로 세상 읽기
한화철 지음 / 문이당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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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아한 거짓말의 세계] 어쩌다 광고쟁이가 된 남자의 열정회고록

 

 

 

졸업생 열에 아홉이 마케터로 취업하는 전공이었기에, 광고는 형제분야 같이 친근했고 실제로 광고홍보학과와 연계공유하는 전공수업도 몇 있었다. 그런 까닭에 새내기 때 4대동에 들어가려 기를 쓰다가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저지 당한 적이 있는데, 쉽게 미련을 못 버려서 여름방학 때 방송국 마케팅기획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광고 수주와 자체 광고를 제작하는 부서였다. 일하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중대냐는 질문이었다. 4대동에서 주워들은 얘기까지 더해져, 새내기에게 광고업계는 중대-4대동-공모전 필수여야 하는 세계라는 선입견이 생겼다. 학부시절 광고쪽에서 유명했던 선배도 전공은 심리학-국문이지만 역시 4대동 출신이었고 제일기획에 다니던 사촌도 경영학 전공에 영어 네이티브였지만 인턴으로 번역 등 영어 관련 일만 줄창하는 데 그쳤다. 나 역시 우연한 기회에 B2B광고회사에 입사할 뻔 했지만, 제의받은 보직은 광고직이 아닌 전산직이었다. 그 외 주위에 영 광고직이 없다보니 어떤 사람들이 다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은근한 환상이 있었다.

 

 

 

 

좋은 사회학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어쩌다 ‘광고쟁이’가 되었다. 광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PT, 프레젠테이션을 프롤레타리아로 독해할 정도였다. 사회학자와 광고쟁이라는 이 모순된 상황은 지금도 가끔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광고의 어느 언저리에 분명히 있으면서도 광고에서 한 발짝 물러서려는 심리적 저항 같은 것을 느낀다. - p.13

 

나는 어쩌다 광고쟁이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광고를 업으로 삼고 있는 이유는 광고 일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나는 광고가 재미있어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광고를 하면서 광고의 재미를 시나브로 알게 되었다. 가끔 자문해 본다. 처음부터 광고에 나를 맞추려 했다면, 지금까지 내가 광고인으로 살 수 있었을까? - p.23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광고업계는 ‘미친 쟁이’들만의 세계며 광고직 종사자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마케팅 쪽도 그랬다. 성적, 전공 다 초월하였는데 제일 많이 취업되는 부류를 둘 꼽으면 ‘미친 놈’과 ‘각종 언어 능통자’였다. 휴대폰에 미쳐서 뽐뿌도 없던 시절부터 거의 한달에 한번꼴로 바꾸는 애, 전세계를 돌며 립스틱을 사는 애 등등 과 특성상 각종 ‘미친 놈’이 흔해 빠졌는데 학점이 1점대든 2점대든 스펙이 있던 없든 이런 애들은 그 쪽 업계 마케터로 백이면 백 취업했다. 그저 성실히 공부하고 과제량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던 평범한 나는 학교 다니는 내내 이런 아이들이 무척 부러웠다. 마케터를 전공무관으로 뽑는 회사가 많기 때문에 러시하는 다른 인문계열 학생들과 달리, 4년 내내 타고난 남다른 애들을 보다보니 자괴감이 많이 들었다. 유일하게 꿈꾸던 대학원 진학이 좌절된 후 더 이상 전공을 살리지 않은 것도, 무의식 중에 절망이 쌓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광고장이라는 말보다 광고쟁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사전적으로 보면 ‘쟁이’가 아닌 ‘장이’가 맞다. ‘장이’는 대장장이, 석수장이 같은 기술자에게 붙이는 말이다. 15년 넘게 광고를 했으니 광고 기술자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반면 ‘쟁이’는 수다쟁이, 거짓말쟁이처럼 성격이나 버릇 따위에 붙인다. 나는 ‘장이’보다 ‘쟁이’가 좋다. 광고를 잘할 것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 좋다. 동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며, 항상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다. - p.38

 

사회학의 가장 큰 무기는 ‘상상력’이다. 특히 ‘문학적 상상력’이다. 사회학은 방대한 인문학의 여러 분야와 걸쳐 있다. 역사와 가깝고, 철학과 가깝고, 심리학과 가깝다. 문학적 상상력은 통섭의 관점에서 이 모두를 꿰는 황금 실이다. 문학적 상상력의 직관적 통찰을 극대화하는 것이 사회학과 한국 사회의 선택적 친화력을 높이는 길이다. 생활 속으로, 대중 속으로 사회학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가장 유용한 문이 문학적 상상력이다. - p.75

엘베스트의 광고기획자, 대홍과 금강 등 굵직한 회사의 마케터와 광고기획자를 거치고 얘기하면 다 아는 유명 광고들을 숱하게 만들어 온 작가, 그런 그가 PT가 뭔지도 모르고 사회학밖에 모르던 사람이었으며 그런 그가 광고쟁이로 거듭나는 15년과 나름의 광고론을 단행본으로 정리해냈다기에 냉큼 집어들었다. 고정관념을 깨는 인물일지, 광고와 사회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치지 않는 궁금함에 마음만 급해져, 장을 넘나들며 책을 읽었다. <우아한 거짓말의 세계>는 총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2장이 작가 나름의 광고철학이라면 3장은 광고쟁이로서의 출발부터 현재까지 담았다. 그 중간에 있는 2장과 3장을 아우르는 총론적 성격이고 2, 3장과 겹치는 부분도 있다. 결론은 얼떨결에 이상한 광고의 나라에 들어선 앨리스 작가가 부단한 노력으로 광고쟁이DNA을 만드는 것 같지만,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 타고난 기질과 적성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 한번 재밌고 신기하며 이상한 광고업계를 느꼈던 시간이었다.

 

 

 

광고는 거짓말이다. 광고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은 광고하는 대상의 일부를 전체인 듯 만드는 것이다. 광고는 광고하는 대상의 부분적 타당성만을 유일한 인식 체계로 만들어 버린다. 알튀세르는 전체를 부분인 것처럼, 부분을 전체인 것처럼 인식시키려는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그래서 광고는 이데올로기다.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보면 광고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데올로기 속에서만 작동하며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적인 실천이다. - p.109

 

광고인이기 때문에 공유하고 있고 그것을 어겼을 때 도덕적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직업윤리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종종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광고인의 자부심은 줄어들고 점점 회사원이 되어 가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토로하곤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결론은 외적 조건의 변화를 어쩌겠냐는 자조로 끝이 난다. 광고 심의 규정에 저촉되지 않는 것이 광고인이 공유해야 하는 직업윤리의 전부라면, 광고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광고의 위기라는 말이 심심찮게 회자되고 있다. 광고인 스스로 광고업 전반에 대한 자기반성과 성찰이 요구되는 시기다. - p.136

 

광고나 관련 업계에 종사하게 되지 않는다면 이 책이 그저 재미졌던 구경으로 그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직업이든, 어떤 꿈을 꾸든 한창 인생을 설계하고 달리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우아한 거짓말의 세계>는 유용한 자극제이다. 지금 나보다 10년, 15년 더 앞선 프로페셔널 선배의 고군분투 성장담, 열정 회고록을 보며 많이 배우고 자신을 깰 수 있었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고, 또 개인마다 인상점이 다르겠지만, 몇 가지 언급해보자면 5년 단위로 계획을 세운다거나 무조건 30대에 반드시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행한 일이나 후배를 열심히 키우고 그 후배에게 밟히는 것을 기꺼이 반기되 그 내일이 되도록 멀도록 노력하자는 얘기 등이 있다. 각종 좋은 얘기들을 무수히 짜깁기한 전형적인 자기계발서 수권보다 좋은 본보기가 되는 프로들의 노하우 아닌 노하우가 담긴 이런 책들이 훨씬 인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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