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감옥 - 생각을 통제하는 거대한 힘
니콜라스 카 지음, 이진원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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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리감옥] ‘자동화’에 눈멀어 ‘인간’을 잃다

 

 

 

‘자동화’라는 이름의 달콤함에 우리는 기꺼이 ‘유리감옥’에 수감되고자 한다

기계의 편리함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우리는 무엇을 잃었나

‘유리’는 깨뜨릴 수 있다. ‘유리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은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

 

 

 

“사전을 찾을 필요가 없는 쉬운 단어만 쓴다.”는 포크너의 비판에 “글의 울림과 어휘의 수준은 상관이 없고, 쉽지만 쓰고 싶은 바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어휘를 선택했다.”고 일축했던 헤밍웨이처럼 니콜라스 카의 글은 언제나 영리하고 쉽다. 그는 디지털사상가로 활동하기 전, 아이비리그에서 학석사를 마친 잘 나가는 경영 컨설턴트이자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편집장이었다. 그는 활자를 인간의 기억을 담은 지도라며 강조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대중들의 독해력과 집중력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초 단위’를 언급하며 전작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대중들의 실태를 분석했던 그였고, 그래서 자신의 책을 하나의 이상적인 ‘블로그 포스트’처럼 일부를 보든 전체를 보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중심 주제를 찾을 수 있도록 설계해놓았다. 누구나 문제의식을 갖고 도출할 수 있는 결론임에도 누구도 나서서 진지하고 면밀하게 분석하지 않는 소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는 이 시대 흥미로운 저자이다.

 

 

이번 신작을 전세계 동시출간했을 만큼 현재 그의 위상과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처음 칼럼을 통해 ‘구글이 우리를 바보로 만든다’고 고발하며 본격적인 디지털사상가로 변신하였고, <빅 스위치(2007)>에선 디지털 세계의 특징을 정의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2010)>에선 디지털 시대의 인간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흐름에서 ‘자동화’를 소재로, 컴퓨터스마트폰 등의 스크린이 인간의 생각을 통제하는 거대한 ‘유리감옥’이라고 고발한 신작 <유리감옥(2014)>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니콜라스 카’다운 선택과 도전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한용운의 시 <복종>이 떠올랐다.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중략)” ‘유리’ 화면을 보는 동안 인간은 다른 일을 하지 못한다. 시간, 관심, 사고 모두를 빼앗는 ‘감옥’에 우리는 기꺼이 수감된다. ‘자동화’라는 기계의 편리함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때문이다.

 

 

스마트폰 사용은 기력을 빼앗기는 것과 같다. 알다시피 여러분들은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다. 여러분들은 이런 특징 없는 유리 조각을 문지르는 것 같다. - 세르게이 브린(구글 창업자)

 

구글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구글글래스를 내놓으며, 구글글래스가 기존의 스마트기기와 차별화된 ‘유리’라고 자랑했지만, 니콜라스 카는 이 역시 또 다른 ‘유리감옥’의 등장일 뿐이라고 분석한다. 370쪽이 넘는 <유리감옥>은 자동화, 희망 오류, 퇴화, 자동화의 역설 네 가지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자동화’는 1946년 포드자동차가 자신들의 작업공정을 일컫는 새로운 용어로서 등장하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이끌어낸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낳은 용어로, 기존 기계화의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진보한 무언가를 의미하였다. ‘로봇’이 노예 상태를 뜻하는 체코어 로보타에서 기원했다는 것에 알 수 있듯, 기계는 인간에게 시종 인간의 행위를 대신하거나 그 행위에 있어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충직한 종으로 인식되어왔다. 문제는 기계가 할 수 있는 ‘자동화’의 영역이 많아질수록 기계에 대한 인간의 의존은 점점 높아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가 시간을 보낼 때보다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일로 인해 더 많은 행복가과 성취감을 느꼈다. 자유 시간에 사람들은 지루함과 불안함을 느끼는 경향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일을 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다시 일하러 가는 걸 가장 싫어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여가를 즐길 때보다 일을 할 때 더 많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면서도, 여가를 즐길 때가 아니라 일을 할 때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확인했다.” 이 실험 결과는 어떤 활동이 우리를 만족시켜주고, 또 반대로 어떤 활동이 우리를 만족시켜주지 못할지를 기대하는 데 서툴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뭔가를 하고 있는 와중에 그로 인한 심리적 영향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다. - p.37  

 

저장해둔 데이터베이스에서 쉽게 정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뇌가 기억하려는 노력을 덜 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 인터페이스가 인간의 능력을 더 많이 대체할수록 새로운 상황에 대한 사용자의 적응력은 그만큼 더 떨어지게 된다. - pp.128~130

 

 

심리학에서 좋아하지 않는 것을 바라고 바라지 않는 것을 좋아해, 일어나길 바라는 일들이 행복감을 높여주지 못하고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들이 행복감을 높여주는 것을 ‘희망 오류’라고 정의한다. 즉 우리의 믿음과 달리, 인간은 자신의 선호와 이해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자동화’가 가져오는 비극은 ‘희망 오류’와 관련 있다. 인간이 원하고 좋아해서 더 많은 기계, 더 탁월한 기계를 만들고 의존한 결과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와 행복을 빼앗아간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흔히 떠올리는 ‘자동화’의 비극은 인간의 ‘퇴화’이다. 편리함의 대가는 자율성의 상실이고, 자율성의 상실로 인한 단순화는 퇴화를 일으킨다. 내비게이션을 사용할수록 공간지각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은 이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었다. 손가락만큼 최고의 도구가 없다고 말했던 스티브 잡스처럼 인체만큼 가능성 넘치고 생동하는 자동체가 없는데 우리 스스로 점점 우리의 ‘자동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의 지적 재능은 자동화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한다. 현재 온갖 종류의 창조적·분석적 작업이 소프트웨어에 의해 처리되고 있다. 의사, 예술가, 변호사, 음악가, 교사…컴퓨터가 이런 직업들을 100퍼센트 떠맡은 건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대신해주고 있다. 그리고 컴퓨터는 분명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 직업만이 컴퓨터에 의해 자동화되고 있는 건 아니다. 취미도 자동화되고 있다. - p.33

 

자동화에 대한 편향은 자동화에 대한 안심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은 모니터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에 과도한 무게를 둘 때 이런 식의 편향에 빠진다. 정보가 틀렸거나 잘못됐더라도 무조건 믿어버리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를 맹신하다 보면 본인의 감각 등 다른 정보 출처를 무시하거나 폄하해버린다. - p.114

 

자동화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일에 대한 부담을 지우고, 여키스-돗선 곡선(자극 강도와 능력 정도가 종형을 이룬다는 곡선. 자극이 지나쳐도 무기력과 무능력에 빠진다)의 오른쪽으로 그들을 밀어 넣음으로써 사실상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추가적 부담을 가한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자동화의 역설’이라고 말한다. 자동화된 시스템이 종종 업무 부담을 높이고, 불안한 작업 환경을 만들어낸다는 걸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자동화의 아이러니다. - p.143

 

아이들이 혼자서 절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간섭하길 좋아하는 부모님처럼 구글과 페이스북과 다른 개인용 소프트웨어 제조사들은 적어도 과거에는 온전하고 활기찬 삶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천재성, 호기심, 독립심, 인내, 담대함 같은 성격상 특성들을 비하하고 깎아내린다. 미래에는 그런 미덕들을 우리가 컴퓨터 스크린들을 통해 들어가는 판타지 세계에 사는 존 마스턴 같은 영웅들의 위업을 통해서 간접 경험만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 p.271

 

 

‘자동화’는 인간의 노동과 여가 모두에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TV를 바보상자라 부르지 않는다. 전통적인 수제 교구보다 시청각과 터치에 기반을 둔 스마트 교구가 수업을 지배하고, 아무 생각 없이 부모들이 아기들에게 스마트폰으로 뽀로로를 틀어주고 글씨를 쓰는 것보다 문자로 치는 것을 먼저 알게 하면서 디지털 시대에 최적화된 ‘새로운 인간’의 양산은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겪은 성인들은 점점 ‘더 많은’ 과거에 겪지 않았던 어려움과 과거에 필요하지 않았던 일들에 직면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엔 직접 쓰고 말해서 끝냈을 일이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고장 나면 손 놓고 있게 된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과거엔 직접 수동 작동하면 되던 일을 굳이 자동기능을 쓰기 위해 기계에 명령어를 입력하거나 데이터를 기록해야 한다. 요리, 운동, 쇼핑, 연애 등 생활의 사소한 부분까지 애플리케이션을 쓰고 인터넷 검색을 하며 오늘도 스마트한 하루를 보냈노라고 뿌듯해 한다. 누르고 찾는 현재보다 직접 생각하고 발품 팔던 과거가 더 시간효율적일 수 있음에도, ‘스마트’는 디지털의 전유물이어야 하니까 애써 무시하기로 한다.

 

자동화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자동화와 자동화의 선구자인 기계화는 오랜 세기에 걸쳐서 발전해오고 있으며, 그 결과로 우리가 처한 환경은 대체로 크게 개선되었다. 현명하게 사용할 경우 자동화는 우리가 힘들고 단조로운 일에서 벗어나 보다 도전적이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문제는 우리가 자동화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거나 자동화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아주 능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충분하다’ 내지는 심지어 ‘잠시만 멈춰’라고 말해야 할 시기를 모른다. 경제적, 감정적으로 자동화의 장점에만 흠뻑 빠져 있을 뿐이다. - p.42

 

우리는 여러 가지 대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망각한다. 우리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과 자동화된 시스템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이해를 약화시키기보다 강화시키게 해주는 방식을 무시하고 있다. 인간 요인 연구원들과 자동화에 대한 다른 전문가들이 찾아냈듯이, 컴퓨터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많은 혜택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리감옥을 깰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분명 존재한다. - p.228

 

 

유리천장이든 유리감옥이든 ‘유리’의 속성은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유리감옥’은 기꺼이 수감되기를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원한다면 충분히 부수고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이 ‘희망 오류’ 속성을 가진 비합리적인 존재임에도 인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니콜라스 카의 주장이다. 성장의 정점을 찍은 인간은 모든 면에서 늙어간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인체의 기능은 나이와 상관없이 쓰지 않거나 잘못 쓰면 망가지고, 다시 쓰고 잘 쓰면 다시 회복한다. 그게 인간의 가능성이고, 그래서 인간을 믿어야 한다. 니콜라스 카는 분명 유리감옥을 깰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다만 그 구체적인 방법들을 별로 말하지 못하고 ‘유리감옥’의 속성과 현황을 분석하는 데 그친다는 것이 책의 한계라면 한계이다. 어쩌면 그것은 누군가 콕 짚어 명쾌하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사람마다 달라 각자 방법을 찾아야 하는 사안일지도 모른다. 니콜라스 카가 생각하는 한 가지 힌트는 프로스트 시 <풀베기>의 한 구절인 ‘사실은 노동이 알고 있는 제일 달콤한 꿈이다’이란 문장이다.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

 

 

육체나 정신 중 어떤 것이건 노동은 일을 완수하는 방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노동은 사색의 한 형식이자, 세상을 유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대면해서 바라보는 방법이다. 행동은 관점을 조정하지 않고, 우리를 사물 그 자체에 가깝게 데려다준다. 사랑이 우리를 서로 묶어주듯이 행동이 우리를 이 세상과 묶어준다는 게 프로스트의 뜻이다. 초월과 반대되는 일은 우리를 우리의 공간 속으로 집어넣는다. - pp.31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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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10가지 - 따봉, 프란치스코!
차동엽 지음 / 위즈앤비즈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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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10가지]

교황청립 대학에서 감수하고 박사 신부가 쓴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하여’

 

 

지난 8월 18일 4박 5일 간의 바쁜 방한 일정을 마친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으로 돌아갔다. 평화방송은 당분간 천주교 신자가 소폭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젊은 시절 일본 선교에 평생을 투신하고 싶어 했던 교황의 꿈이 반백년 후 옆 나라에서 조금이나마 이루어진 셈이다. <명량>의 1500만 돌파처럼 교황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인간적인’ ‘리더’에 대한 갈급이 어느 정도 작용했던 듯하다. 문제는 백자백답이듯 교황이 원하지 않는 반응도 적잖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공사기업은 물론 지자체까지 교황 관련 관광 상품과 물건 기획에 열을 올리고, 어느 언론은 교황 방한이 별로 특수를 가져다주지 못해 유감이라고 한다. 교황의 행동 하나만 보고 빨갱이라 하질 않나 해방신학자라는 둥 포퓰리즘에 미쳤다는 둥 하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저마다 보고 싶은 대로 믿고 싶은 대로 교황을 쳐다보는 것이다. 방한을 앞두고 몇 달을 주보로 강론으로 주의를 주고 심지어 교황 집전 미사 참석자를 본당별로 미리 조사해 예비소집까지 하는 초유의 단속이 있었음에도, 우상숭배도 아니고 신자씩이나 되어서는 교황을 만지기만 하면 천당 가는지 아는 무지몽매한 이도 있었던 듯싶다.

  

아무리 경박하고 무책임한 세태라지만, 적어도 어떤 이를 힐난하려거든 제발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서 논리적으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광신도처럼 묻지도 따지지 않고 좋다고 사랑한다고 외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적어도 사회 혼란은 일으키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 한번만 해도 잘못된 걸 알 수 있는 이야기가 SNS로 입으로 인터넷으로 삽시간에 퍼져버리고 커지는 요즘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저런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책을 찾아보며 그의 면면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 문제는 물량의 홍수인데 최근 두세 달 동안에 나온 교황의 어록이나 글을 번역한 책이나 제3자가 교황을 분석한 책들이 수십 종에 이른다. 온라인 서점과 제휴해서 무료 전자책을 대량 배포하거나 장기 광고를 걸 수 있는 출판사, 교회 내에서 대놓고 밀어주고 소비되는 가톨릭계 출판사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참으로 피 튀기는 책전쟁이 아닐 수 없다. 그 때문에 독자는 선택의 폭이 넓어 행복한 대신에 괜찮은 책을 골라내기 위해 한참을 서가 앞에서 고민해야 한다.

차동엽 신부가 쓴 <(따봉, 프란치스코!) 교황의 10가지>는 6월 말에 일찌감치 내놓은 책이다. 스타 신부임은 물론 <무지개 원리> 열풍으로 신자, 비신자 아우르는 팬층을 꽤 확보하고 있는 저자이다. 사목신학을 전공한 차동엽 신부의 장기는 어려운 얘기도 쉽게 푸는 문장력과 뛰어난 편집력인데 <교황의 10가지> 역시 그런 장기를 한껏 살린 책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 말과 글을 실으며 본문의 모든 내용을 교황청립 라테란대학교의 자문을 구해 집필하였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10가지로 정의를 내렸다. 검증받은 책, 정통 가톨릭의 입장에서 교리적 배경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고픈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교리 소양이 부족한 가톨릭 신자나 가톨릭의 특성을 전혀 모르는 비신자에게 유용한 책이다.

 

“가톨릭 교회는 항상 이 부분에 명확한 입장을 밝혀 왔다. 나는 교회의 사람이므로 교회와 같은 생각이다. 더 밝은 얘기를 하고 싶다.” - p.230

 

인용한 것은 낙태, 동성애 등 교회가 금기해 온 민감사안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확고한 입장이다. 최초의 비유럽권 교황, 최초의 남미 교황, 최초의 개발도상국 출신 교황,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 최초의 프란치스코 교황…. 유난히 ‘최초’ 타이틀이 많은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싶어 한다. 하루아침에 뚝 떨어진 외계인 보듯, 기존 교회를 뒤집어엎는 매우 별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가톨릭이 내세운 ‘개혁 교황’이란 의미는 점점 대중의 염원으로 둘러싸인 신화를 뒤집어쓰고 있다. 만장일치 콘클라베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가 영속하기 위해선 보수적 기조는 필수다. 사람들은 낮은 곳에 몸소 임하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강조하고 대중 친화적이고 여러 사안에 대해 온건한 언행을 보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며 해방신학이니, 프란치스코 정신이니, 진보 좌파니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을 읽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단연 ‘예수회’라고 생각한다.

  

그가 가톨릭 내부의 ‘개혁’에의 갈급 때문에 선출되었고, 요한23세의 뒤를 잇는 ‘개혁’교황으로서의 의지를 보이고 있음은 분명하다. 교황 재임기간 동안 교회법이나 교리, 각종 추문과 부정 등에 대해 상당한 조치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어떤 기존의 근간을 흔드는 개혁이라기보다 가톨릭의 과오를 사과하고 자정하며 교회와 교리, 신앙을 더욱 공고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을까 싶다. 선교(복음화)도 더욱 강조될 수 있다. <교황의 10가지>에서 차동엽 신부가 분석한 교황의 10가지 특성은 다음과 같다. 사람에 대한 애착과 믿음, 사랑의 강조, 항상 웃음과 미소, 자비를 중시, 희망과 긍정주의, 예수를 닮고자 노력, 무릎 꿇고 기도함은 축복, 현장의 목자, 프란치스코의 정신으로, 마지막으로 식별로 상징되는 예수회의 교회 기여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식별을 통해 자신의 올바른 위치를 인식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냐시오(예수회의 설립자) 성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장소와 시간과 사람의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육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통솔 자세는 요한 23세 교황의 ‘모든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식별하고, 작은 것을 시정하라’라는 문구에서 다시금 드러납니다.” - p.222

"유토피아적인 모든 투사(미래를 향한)나 재건(과거를 향한)은 좋은 정신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실재하시고 ‘오늘’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과거를 향한 그분의 현존은 당신 백성에게나 우리 각자에게나 구원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미래를 향해서는 ‘약속’과 희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과거에 하느님은 현존하셨고, 당신의 자취를 남기셨습니다.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만나도록 도와줍니다. 미래는 오로지 약속입니다. 천년도 아니고 막연한 미래도 아닙니다. ‘오늘’은 영원과 가장 닮았습니다. ‘오늘’은 영원의 불꽃입니다. ‘오늘’, 영원한 생명에 투신해야 합니다." - p.238

  

<교황의 10가지>를 읽으며 가장 큰 소득은 몇 안 되지만 중요한 가톨릭의 기조들을 저자의 명쾌한 설명으로 알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와 함께하고’ ‘가난한 교회’를 갈망하는 것에 대한 프란치스코 정신과 교황의 신념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함의를 알기 위해선 가톨릭의 두 비전인 ‘제도’ 교회와 ‘성령’ 교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제도 교회는 말 그대로 교회의 구조와 재산, 규정과 통치 등을 다룬 계보와 조직화의 교회를 의미하고 성령 교회는 약자를 사랑하는 사명을 같고 겸손하고 단출한 평등 공동체를 지향하고 영성을 강조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둘은 비교적 서로 떨어져 서로의 빈틈을 메우거나 견제하며 발전해왔다. 나름의 신념을 갖고 영성 교회의 역할을 해온 대표적인 수도회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의 정신을 제도 교회의 끝판왕인 교황청으로 끌어들인 것은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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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광기 - 왜 예루살렘이 문제인가?
제임스 캐럴 지음, 박경선 옮김 / 동녘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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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광기]

예루살렘, 오오 이토록 성스러운 '유토피아'여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코너에 몰려 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 코너는 그들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 코너의 한쪽 벽은 서구 문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유대주의의 오랜 역사다. 기독교 신학은 (...) 유대인들은 유대 본토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어 있음(예루살렘으로부터의 유대인 배제)을 전제로 삼는다. (...) 1948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한에 관한 양가서은 이 같은 맥락에서 상당 부분 설명이 가능하다(가령 바티칸은 1994년까지 이 국가를 인정하지 않았다). (...)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취해 온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반유대주의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이 늘 비난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열쇠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다수가 느끼는 본능적인 불편함에 있다. 나머지 한쪽 벽은 식민 정책이다. 유대인들이 여전히 오랜 과거의 역사에 휘둘리고 있듯, 아랍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역사는 곧 인종차별의 역사다. 식민지의 민족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경멸 말이다. (...) 식민지 개척 세력이 예루살렘에 뿌려 놓은 유대-아랍 분쟁의 씨앗이 단단히 뿌리를 내려 버린 셈이다. (...) 그러나 그 제3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인식도, 인정도 하지 않는다. (...) 나는 바로 그 제3자를 지목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3자를 밝혀낸 뒤에야 비로소 그 힘의 작용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 저자 인터뷰

  

이 책의 저자 제임스 캐럴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예수회 계열 대학에 진학했고 아예 신학교로 옮겨 석사학위를 받는 것으로 모자라 사제가 된다. 신앙인으로서 정점을 찍었다 생각한 순간 열의가 사라지고 혼란에 휩싸였다. 마음을 잡고 영적 성숙을 위해 떠난 예루살렘 성지순례는 그에게 엄청난 확신을 심어주었고, 이 경험으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사제직을 그만 뒀지만 신앙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리고 전업 작가가 된다. 그가 몰두하고, 그를 관통하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 하나는 <아메리칸 레퀴엠><전쟁의 집>으로 대표되는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콘티탄티누스의 칼><예루살렘 광기>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예루살렘 광기>는 그렇게 작가 자신의 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한 책이다. 사사로운 동기였지만 그 완성품은 창대한 역작이다.

덤비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대개 읽는 이의 수준보다 높은 어려운(데다 두껍기까지 하면 더욱)’ 책들이 그렇다. 반가워하며 주먹 불끈 쥐고 전투 독서하며 책과 승패를 겨룬다. 이런 책 중 뭔지 모를 짜릿함에 휩싸여 읽는 내내 신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올해는 <예루살렘 광기>가 처음 만난 그런 책이었다. 역사, 종교, 사회학, 문화인류학 등 배경지식이 얼마나 있어야 이 책을 완전히 읽을 수 있을까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저자의 서술은 종횡무진 한. 서로 중첩되어 이어진 10개의 장은 다시 한 가지 담론을 그린다. 본문 간의 중첩이 저자가 독자를 위해 마련한 유일한 배려이다. 흔히 대중교양서가 가진 친절함(차근차근 설명하며 떠먹여주는)<예루살렘 광기>엔 없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세 종교의 중요 성지인 예루살렘, 그를 둘러싼 인간의 탐욕과 분쟁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톨릭은 끊임없이 십자군 전쟁에 대해 속죄했지만 20년 전까지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고, 부시는 그 불편한 단어인 십자군을 다시 입에 올리며 이스라엘과 미국의 긴밀한 유대와 미국의 중동 개입을 대놓고 표를 내기 시작하였다. 빈 라덴 사후 이슬람근본주의 테러리스트들은 예루살렘으로 집결한다. 미국의 출연으로 이 미친 성전의 판은 오히려 더 커졌다. 저자는 예루살렘이 서구 역사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둘러싼 광기의 기원을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제임스 캐럴은 예루살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과 종교의 본질을 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p.11) 이 책은 예루살렘이라는 실제 도시와 그 도시가 던져 주는 묵시종말론적 환상 간의 치명적 순환 고리에 관한 책이다. 다시 말해, 두 예루살렘에 관한 책이다. 땅의 예루살렘과 상상 속 예루살렘, 그러한 이중성은 기독교의 예루살렘과 유대교의 예루살렘, 유럽의 예루살렘과 이슬람의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언덕 위 도시라는 실제 지리상의 예루살렘과 메시아 국가라는 이상으로서의 예루살렘 간 긴장을 통해 한층 두드러진다. (p.13) 수 세기에 걸쳐 환상 속의 그 도시가 현실 속 도시를 만들어 내고, 그 현실 속 도시는 다시 환상 속 도시를 만들어 왔다. 결론은 전쟁이다. 지난 2000년간, 예루살렘의 지배 세력은 열한 차례나 거듭 전복됐고, 거의 모든 경우 극단적 폭력을 수반했으며 그 전면에는 늘 종교가 있었다. 이 책은 그러한 전쟁 이야기, 즉 신성한 땅이 전쟁터가 되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토마스 무어가 주창한 유토피아는 모든 인류가 꿈꾸는 이상향이지만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모순의 공간이다. 이러한 유토피아의 속성과 가장 가까운 곳이 예루살렘이 아닐까 싶다. 예루살렘은 4대 문명 중 둘이 속한 비옥한 초승달 지역안에 있는 도시다. 유일신이 말한 약속의 땅이었고, 예수의 주 활동지였으며, 가장 오래된 이슬람사원이 있는 탐나고 탐나는 곳이다. 제임스 캐럴은 종교의 본질을 폭력과 모순으로 규정한다. 신석기혁명으로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멈춘다. 그러나 그때 맛본, 살육의 집단흥분이 DNA에 각인되었다. 인류는 이를 종교의식을 치를 때 희생물을 요구하는 희생제의라는 방법으로 타협점을 찾는다. 문제는 이 희생제의를 통해 폭력을 거부하는 종교의 중심에 폭력이 있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바탕부터 모순이니 교리와 신앙이 비이성적인 것은 당연하다.

   

(pp.268~269) 하느님은 막강한 통치자에서 친구로 진화했다. 한 종족에게만 충실한 하느님이 아니라, 도처의 모든 인간에게 충실한 친구인 단일한 하느님이 된 것이다. 따라서 성서는 상대적 약자의 관점에서 풀어낸 사회적 서사로, 스스로 한 민족을 창조해내고 그 민족에게 자기비판의 원칙 즉 예언을 주었다. 성서는 희생자가 된 민족 스스로도 타인을 희생양 삼으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음을 경고했다. 폭력의 충동을 느꼈던 성서 속 하느님이 폭력을 거부했다. 이 하느님은 홍수로 지구를 한차례 멸망시킨 뒤 이렇게 맹세했다. “다시는 아니하리라.” 당시 유럽인들은 중세시대 이래 문화적, 경제적, 종교적 대변혁을 또 한 차례 겪었으나, 이는 다시는 아니하리라라는 서사의 번복이었다. 우리는 기독교가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규정해 유대교의 부정적 이미지에 대비시키고, 유럽 대륙이 외부의 적인 이슬람교에 맞서 단일화된 문화로 결집했음을 지켜보았다. 인간 본성이 무엇이든, “네 적을 사랑하라라는 평화운동에서 출발한 종교가 또다시 전쟁의 후원자가 되었다. 천년왕국을 향한 열병에서 수많은 운동이 생겨났고, 그중 십자군운동과 그 정신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라틴인과 잔틴인 사이뿐 아니라 라틴인과 아랍인 간의 수많은 무력 충돌로 대대적인 변화가 촉발되었다.

  

그래서 팽팽하게 대립하는 각 종교간 이해관계에서 어느 누구도 승자도 선도 있을 수 없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이스라엘을 두고 서로 주인임을 자처하는 동시에 자신의 피해를 부각하지만 세 종교 모두 역사적으로 과오가 있다. <예루살렘 광기>는 각 시대별로, 종교별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과 그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분석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성과는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대한 지배적 관점이 얼마나 기독교 편향적인지 밝힘으로서 독자들이 다시 생각하도록 돕는 것이다.

 

<예루살렘 광기>를 관통하는 흥미로운 개념은 성서 <요한묵시록(요한계시록)>에 입각한 묵시종말론적 사고. <요한묵시록>은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논란이 되는 성서이다. 인류의 종말과 구원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석을 놓고 수많은 교파가 갈려 이단전쟁을 낳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자나 성직자가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다룬다. 그러면서 신자들을 단속하는 각인기제로 강력하고 요긴하게 사용해왔다. 반유대주의의 기저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세 종교의 전쟁의 표현만 다를 뿐, 결국 묵시종말론적 사고에 입각한 성전이다. 누가 극단적 공포를 견디고 유일신의 선택을 받는지, 신의 도시의 주인인지를 놓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이 세 종교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종교의 본질을 규정한다는 것은 심한 비약의 위험한 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네 대륙(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의 이해관계가 얽힌 유일 무일한 갈등이고, 제법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좋은 종교에 대해 고민한다. 그의 평생을 지배하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종교가 있는 이라면 누구나 생각하게 되는 문제이다. 저자의 명민한 통찰력을 통해 다각적으로 예루살렘의 특수성을 배울 수 있었고, 세계를 보는 눈을 좀 더 키울 수 있었다. 색인과 주석 등까지 포함해서 66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고 꽤 어려운 편인데도 피곤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오타도 없고 바르게 용어 표현한 바른 역자와 편집자의 꼼꼼한 작업 덕인 것 같다. 빨간 표지처럼, 한여름 더위가 싹 가실만큼 빠져들었던 강렬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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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나 - 개혁가 프란치스코와 한국
김근수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교황과 나]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을 읽는 이유, ‘나’

 

  

2014년 8월 16일, 드디어 교황이 방한한다. 124명의 한국 순교자를 성인 전 단계의 복자로 인정하는 시복식을 하기 위해서이다. 정부는 국빈 예우를 하고, 공영방송 KBS가 교황 방한 주관사를 맡아 각종 교황 관련 방송을 한다. 출판계는 일찌감치 교황관련 책들을 앞 다투어 출간하였다. 불교의 자존심을 운운하며 달라이 라마를 모셔 오겠다는 으름장처럼 도대체 일개 종교의 수장의 방문이 왜 온 나라를 술렁이게 하냐며 못 마땅한 이들도 있다. 아무래도 종교 지도자인 동시에 대사관도 있는 어엿한 국가의 정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 지도자와 다른 감이 없지 않다. 메디치미디어에서 7월 출간된 <교황과 나> 역시 셀링 타이밍을 노리고 우후죽순 봇물처럼 출간된 수많은 교황 관련 서적 중 하나다. 그 많은 책 중 <교황과 나>를 고른 것은 다른 교황 관련 서적에 없는 ‘나’ 때문이었다. 이 ‘나’가 국적과 종교를 떠나 우리가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을 읽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2013년 2월에서 3월 가톨릭 역사상 유례없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고령에 따른 체력 약화와 학문 연구의 재개를 이유로 들며 자진 사임 의사표시를 내민 것이다. 베네딕토 16세는 정통 가톨릭 입장의 첨단에 서 있던 대단히 보수적인 사제 겸 학자였다. 그런데 그 후임교황은 정반대의 입장에 선 인물로 최초의 예수회, 남미 출신의 교황이었다. 그리고 그는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모두 강경하게 부정했던 해방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또 프란치스코회가 아닌 예수회면서 프란치스코란 교황명을 최초로 쓴 인물이기도 하다. 재밌는 것은 이런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미 요한바오로 2세의 후임으로 콘클라베에서 베네딕토16세와 함께 최종후보로 올라갔었다는 점이다. 이렇듯 가톨릭이 진보적인 소수파 교황을 추대했다는 것은 그만큼 내부개혁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껴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교황과 나>를 읽기 전, 비가톨릭 독자가 알아야할 점이 있다. 이 책의 저자 김근수는 해방신학자이다. 그리고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교황을 평가하는 책을 썼다. 해방신학은 가톨릭에서 극소수에 불과한 분파이다. 심지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단까지는 아니어도 거의 부정당해온 분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방신학의 본고장인 남미 출신이고 스승 중 해방신학자가 있긴 하였지만 그도 해방신학자인 것은 아니다. 그런 점을 염두하고 책을 읽어야 가톨릭에 대한 오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다행인 것은 <교황과 나>에서 저자가 해방신학을 강하게 어필하거나 그에 치우친 자의적인 해석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고, 그래서 독서의 균형을 잡기 위해 굳이 다른 책을 집을 필요도 없다. 별로 두껍진 않지만 교황에 대한 핵심적인 정보는 모두 담겨 있다.

 

저자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읽는 세 가지 열쇠로 아르헨티나. 예수회, 프란치스코를 꼽는다. 아르헨티나는 대통령이 가톨릭 관련 중요행사에 참여할 만큼 가톨릭 강성 국가이다(전체 국민의 92%가 가톨릭 신자). 흔히 떠올리는 남미 가톨릭의 불편한 진실이 침략자에 의한 폭력과 눈물로 얼룩진 포교의 결과물이라는 것인데, 아르헨티나는 약간 궤를 달리 한다. 아르헨티나는 전체 국민의 97%가 백인인, 남미에서 가장 백인 비율이 높은 국가인데 가난한 이탈리아인들이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정착한 곳이 아르헨티나로 침략자인 스페인계와 이탈리아계가 각 35%씩 거의 같은 비중을 차지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이탈리아계이기에, 최초의 비유럽 출신 교황이긴 하나 유럽과 연결고리가 있다.

우리나라는 가톨릭이 선교사의 포교가 아닌 학문으로 공부하다가 신앙이 퍼지고 후에 선교사가 들어온 독특한 국가라 예수회에 대해 별 인상이 없다. 예수회 학교 서강대의 종교색은 명함도 못 내미는 강력한 미션스쿨이 옆에 있다 보니 잘 모른다. 예수회가 가톨릭 내 소수야당이긴 하지만 진보 입장은 아니다. 오히려 더 심한 원리주의자에 가깝기 때문에 가톨릭 내에서 더 이상 세력을 키우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야당으로서 기능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회가 강조하는 것은 선교와 교육이다. 이교도의 땅에 평생 투신할 선교사를 보내 학교를 세우고 지역개발하며 포교한다. 타문화와 타협하지 않고 정통교리를 강요하기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곤 한다. 제사 거부 등으로 한국의 순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도 예수회 등장부터였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신념 강한 예수회의 일원으로서 평생 일본 선교에 투신하려 했었다. 병 때문에 출국이 좌절되면서 자국에 남게 되면서 학자로 사제로 이력을 발전해나가면서 결국 추기경까지 올랐고 현재의 교황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프란치스코라는 정체성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개혁’이나 ‘다름’의 코드를 읽었다면 대부분 이 측면 때문일 것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가톨릭사에서 남다른 인물이다. 동시대의 중세 가톨릭과 전혀 다른 빈자를 생각하는 성인이었고, 모든 생물 뿐 아니라 무생물까지 주님이 만든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인간 중심 철학에서 탈피했던 매우 이타적인 인물이었다. 예수회 소속이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을 흠모해 그의 이름을 딴 교황으로서, 그의 정신을 본받겠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도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가난한 이들의 곁을 떠난 적이 없다거나, 해방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고 천명하는 등 다양한 면에서 포용성을 보여준다. 동성애자나 창녀의 신앙에 대한 접근이나 비가톨릭교도를 대부모로 내세우는 것에 대한 입장 등은 놀랠 노자이다.  따라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저자가 꼽은 아르헨티나, 예수회, 프란치스코의 정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의 개혁성은 오히려 그 자신만의 독특한 성향에서 설명할 여지가 많을 수 있다.

 

가톨릭은 전세계에서 가장 중앙집권과 체계화가 잘되어 있는 종교이지만, 교황에 따라 가톨릭의 강조점이나 과제가 다르다. 프란치스코 교황 하 1년 동안 가장 많이 체감하는 것은 선교의 강조인 것 같다. 방한 후에 또 새로운 기조들이 논의될 것이다. <교황과 나>의 저자 김근수는 그것들이 ‘개혁’과 관련된 것이 될 것 같다고 무척 기대한다. 부디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에서 저자의 의견에 깊이 동의했던 것 중의 하나가 한국 교회는 변해야 할 과제들이 있고, 가톨릭은 자기반성하고 내부개혁할 수 있는 종교라는 점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가톨릭은 교황의 기조가 좌든 우든 관계없이 끊임없이 과거에 저지른 가톨릭의 과오들을 사과하고 반성하고 있다. 그에 맞게 교리가 수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저자가 한국가톨릭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교황청보다 더욱 보수적이고 경직화되어 있으며, 세속적이라는 것이다. 해방신학자답게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는 지금보다 더 가난해져야 한다. 종교는 가난한 이들 위에서 누렸던 부와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주장에 강하게 동조한다. 한국 교회의 부가 지금의 10분의 1로 줄였으면 한다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안 그래도 언제부턴가 한국 성당이 대형 교회의 화려함이나 카페 만들기 같은 걸 부러운지 자꾸 따라하는 모습이 꽤나 많이 보인다. 신축 성당 모금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이유를 물으면 주님을 누추한 데 모실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물론 예수님이 화려한 신전, 장사하는 신전에서 깽판친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교황과 나>의 저자는 친가와 외가 모두 200년 이상 신앙을 지키고 순교자를 배출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고, 사제가 되기 위해 가톨릭신학대학에서 수학했던 사람이다. 하수상했던 1980년대의 한국에 염증을 느끼고 사제가 아닌 신학자의 길을 가기로 유학길에 오르고 독일에서 정통신학을 공부하다 해방신학으로 전공을 바꿔 아르헨티나로 갔다. 아르헨티나의 신학도로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기 전 베르골리오 신부던 때부터 그를 지켜보고 흠모하면서 그의 학문과 신앙을 고민해왔다. 그래서 책 제목이 <교황과 나>이다. 기본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을 서술하는 책이지만, 그를 통해 그 동안의 교황들을 가톨릭 전체와 한국 가톨릭의 나아갈 바를 그리고 자신이 나아갈 바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책이다. 그를 지켜보는 독자 역시 그렇다면 이 책을 통해 ‘나’는 무슨 의미를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교황과 나>는 프란치스코 교황 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우리 자신이 있기 때문에 다른 교황 관련 서적에서 느낄 수 없었던 다른 울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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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브랜딩하라 - 헬스케어 마케터의 실전 사례, 브랜딩 스토리
송경남 지음 / 비비투(VIVI2)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병원을 브랜딩하라] 병원전쟁의 중심에서 브랜딩을 외치다

 

 

 

이제, 병원 마케팅의 관점은 바뀌어야 합니다. 병원에서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도 일반 기업의 상품과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색깔, 특징, 이미지가 녹아 있는 브랜드로 탄생되어야 합니다. 병원에서 고유의 브랜드로 다가가야 환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 책은) 살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학습서가 아닌 실용서입니다. 개원의, 병원을 개원한 지 2, 3년이 지났으나 도무지 병원 경영이 궤도에 오르지 않아 고민인 병원장, 새로운 도약이 꼭 필요한데 막연한 홍보팀원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경영과 마케팅을 공부하는 대학생과 취업준비생들에게는 실전 경험을 공유하는 매개체이고 싶습니다. - 저자의 말 中

 

 

10년 전 일이다. 중경외시 경영학과를 졸업한 지인(남자)이 일반 회사도 대형 병원도 아닌 일반 치과 실장으로 취업하는 것을 보고 다소 의아해했던 일이 있다. 강남, 신촌 등 주요 핫플레이스도 아닌 서울의 평범한 동네 병원이었다. 직함에서 추측할 수 있듯, 병원에서 그에게 요구한 일은 수납이나 치료보조가 아닌 영업이었다. 그러나 브랜딩 등 다른 그의 전공지식은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대부분의 피성안치(피부과, 성형외과, 안과, 치과)개인 병원에서 영업을 뛰는 ‘실장’이나 ‘코디’는 주로 ‘예쁜’ ‘여자’이며 외모와 화술 좀 더 보태면 어학능력을 요할 뿐 높은 스펙을 요구하지 않는다.

 

 

2012년 보건복지부 통계 기준 현재 우리나라에 59,519개의 병의원과, 15만 4천여 명의 의사·한의사·치과의사, 약사와 간호사 등 기타 의료 인력이 30만여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두 집 건너 하나는 치킨집, 세 집 건너 하나는 커피 전문점이나 병원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요즘 개인 병원은 그야말로 흔해 빠졌다. 그 때문에 동네 병원은 당장의 질병 치료로 오는 환자만큼 ‘의료 쇼핑’ 차원에서 일상 건강 관리하는 환자도 많다. 식당 폐업률 만큼 점점 높아지는 개인병원 폐원률, 그야말로 병원 전쟁이다. 신환 창출만큼 단골 관리도 중요한 요즘, 병원 브랜딩은 미래를 위해 개업의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개념이다.

 

 

현행 의료법상 병원은 의사, 한의사, 치과 의사 등 ‘의료 면허’를 가진 ‘의사’만이 개업하고 운영할 수 있습니다. 의료인 자격이 없는 일반인이 의사를 고용해 운영하는 이른바 사무장 병원은 의사 면허와 부당한 자본의 불건전한 만남, 불륜과도 같은 셈이지요. 최근 개원환경은 고자본, 고경쟁, 고위험 등 3고로 인해 더욱 악화일로입니다. 이럴 때 사무장 병원의 유혹이 더욱 커집니다. 사무장 병원의 폐해는 여간 심각한 게 아닙니다. 병원장과 사무장, 그리고 이에 연루된 나이롱 환자 등 모두 범죄 유형에 속하며,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의사가 대표로 돼 있기는 하지만 실제 병원 경영자는 일반인으로, 윤리경영이나 국민건강 및 환자 인권 따위에 관심을 둘 리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속칭 ‘바지 병원장’인 의사가 모든 부조리의 피해자가 되기 일쑤입니다. 사무장 병원은 부당 청구, 보험재정 훼손 등의 해악뿐만 아니라 의료윤리를 크게 훼손시킨다는 점에서 사회악입니다. 사무장은 어떻게든 의사를 활용해 돈만 벌면 그만이고, 돈의 논리로만 포장돼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제대로 실천한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입니다. 당장 병원이 어렵다고 해서 부당한 자본이나 사무장에게 손을 내미는 의사는 없어야 합니다. 이처럼, 아직도 의료계 주변에는 리베이트, 탈세, 부당청구, 과잉진료, 무면허, 마약관리, 성범죄 등등 부정적인 단어들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병원 경쟁이 치열해지고 경영난이 가중되면서 정도를 벗어난 유혹도 점점 많아집니다. - p.49

 

 

저자인 (주)닥터피알의 대표이사 송경남은 MBA에서 의료경영을 전공하고, 차병원 의료재단의 홍보실을 시작으로 1995년부터 메디컬 홍보마케팅기획컨설팅을 해온 우리나라 대표적인 헬스케어 마케터이다. 의료경영이나 병원브랜딩이 생소하던 시절부터 이 분야를 끊임없이 홍보하고 강조한 개척자이다. 병원 브랜딩이 중요하다면, 왜 전문 경영자가 병원을 경영하고 홍보마케팅 전문 인력을 채용하지 않을까 궁금해 할 독자를 위해 일단 저자는 책의 초반에 ‘사무장 병원’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그렇기에 병원브랜딩은 절대적으로 의사의 태도와 의지에 달려 있다.

 

 

큰 병원이 아닌 이상 현재 우리나라 개인병원에서 원장이 틈틈이 경영학 공부를 하거나 일부러 마케팅 업무를 전담할 경영학 전공자를 뽑는 경우는 많지 않다.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공부를 잘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직업이 의사다 보니 의사만큼 자존심과 고집이 센 직업군도 없을뿐더러, 제대로 된 의사는 병원 업무와 치료 연구하기도 바쁘다. 두 번째는 현재의 병원 환경상 병원 직원 임금 수준이 낮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인건비마저 줄이려 자격 없는 ‘간호조무조무사’나 ‘아르바이트’가 판을 친다. 영업실장(코디)가 제대로 제일 할만한 병원도 많지 않고, 간호조무사와 ‘기타 등등’이 수납 등 행정업무를 충분히 할 수 있는 판국에 굳이 의료 관련 자격 없는 경영 전공 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병원을 브랜딩하라>는 그런 우리 병원 현실을 누구보다 아는 입장에서, 그럼에도 좀 더 나은 병원 고용 시스템을 꿈꾸며 쓴 책이다. 전자의 이유로 의사들이 30분에서 1시간만 투자해도 공부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압축적이고 단순하게 썼다. 후자를 위해 제2, 제3의 자신을 꿈꾸는 후배들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읽자마자 바로 현장에서 쓸 수 있게 책을 만들어 놓았고, 풍부한 사례와 쉬운 설명으로 읽기 무척 편하다. 한편으론 그만큼 의료경영과 병원브랜딩이 일반 기업과 비교하면 어린애 장난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마저를 자존심이 상한다고, 슈바이처면 그만이라는 낭만가라서, 알아도 바쁘다고 애써 모른척해서 등등 각양각색의 이유로 미뤄두거나 외면한 개인 병원 의사들에게 추천한다. 서글프지만 병원도 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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