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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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도 인문학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분석은 어떨지 몰라도 종합을 하려면 결국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합니다."

위의 저 말은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는 최재천 교수의 말이다. 문득 인문학도로서 뿌듯한 감흥이 생겨나는 동시에, 논문을 쓰면서 느꼈던 내 문제의 본질을 꿰뚫게 됨으로써 부끄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논문이란 분석한 항목들을 일목요연하게 종합하여 하나의 조직적인 구성체로 만들어내는 작업인 것 같다. 구구절절 절감하는 바로, 사실 분석도 부족하긴 마찬가지이지만 인문학적 소양에서 비롯되는 '종합' 능력이 부족하여 나의 논문은 지난한 작업이 되고 말았다. 논문의 반, 아니 80%는 목차를 짜는 것, 그러니까 글의 뼈대를 구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10%가 분석력, 나머지 10%가 필력인 것 같다. 한심한 나는 마지막 심사가 코앞에 닥쳤을 때도 80%의 그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여전히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논문을 쓰는 목적이 인문학적 소양을 넓히는 것일텐데,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오히려 그 폭은 사정없이 줄어들고 말았다. 반성에 반성을 거듭해도 모자라다. '시간이 없다'는 새빨간 거짓말들로 자기변명을 하면서 나는 점점 다이제스트식 독서에 자신을 길들이고, 깊이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읽지 않은 책들은 뇌사상태에 빠진 식물인간처럼 점점 시들시들해져간다. 책은 호박 안에 갇힌 중생대 곤충처럼 눈으로 즐기는 보석이 아닌데. 영혼의 교감이든 육체적 교감이든 부딪치며 느껴야지.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아래 도정일씨의 아름다운 충고를 되새기며 책읽기를 더 바지런히 해야겠다. 

"나는 예술이 수행하는 가장 위대한 인문학적 경험은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인문학적 삶의 제 1조예요."

오... 아름답다. 나의 고리텁텁한 두뇌 속에는 그저 예술은 미의 탐구를 통한 예술적 경험만을 준다는 사고방식만이 들어있었는데, 그방식에 일대 획을 긋는 엄청난 반향이다!  부시Bush가 선언한 '테러와의 전쟁' 속에서 우리는 부시의 인문학적 소양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부족, 이러한 com+passion의 경험을 최재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도 하고, 호모 폴리티쿠스이기도 하지만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즉 공생인간이기도 하다"

스타워즈 episode 1에서 콰이곤 진은 강력한 포스가 느껴지는 아나킨 스카이워커한테서 미디클로리언 수치를 조사한다. 아나킨이 미디클로리언 수치가 무엇이냐고 묻자 콰이곤은 "미디클로리언이란 간단히 말해서 포스에 민감한 사람들에게 포스의 뜻을 전달하는 공생자(Midichlorians are simply the symbiont that conveys the will of the Force to those who are Force-sensitive.)"라고 설명한다. 공생자가 전달하는 포스란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선과 악의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정신적 우주적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주는 힘인 것 같다.

서로 다른 길을 가던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 상생의 길을 찾듯이 극적인 것들의 어우러짐은 21세기 이후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주요 화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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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09 0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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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려면 우선 많은 것을 포기하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는 것이 중도에 책을 덮어버리거나, 심한 경우 던져버리거나 하는 과격한 행동을 막을 수 있는 방법임을 먼저 말해두고 싶다. 논리적인 줄거리 전개, 이따위 것에 대한 강박관념은 훌훌 털어버리고 그냥 말도 안되는 황당한 이야기들 그 자체를 즐긴다면, 새벽녘에 미친 사람처럼 키득키득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도 그다지 한심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저 드넓은 미지의 우주에는 과연 우리 아닌 다른 생명체가 살고 있을까. 보통 영화 같은데서 보면 우리보다 지적으로 월등한 생명체들이 지구를 우호적으로 혹은 공격적으로 방문하곤 하는데, 아직 그런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무한한 우주에 덩그마니 놓인 지구가 어쩐지 좀 외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니 존재치 않는다는 논리는 세상 재미없게 살아가는 사람들더러 고민하라 하고,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는 우주를 향해 깨끗하고 흰 수건 한장 들고 엄지 손가락을 바짝 치켜 들련다. 

 책이 워낙 두텁고 길다 보니 여러 가지 감상이 드는데, 마구마구 웃다가 울게 만드는 한편의 로맨틱 코미디 SF 영화를 보는 듯하다. 황당무계한 이야기 같지만 천체 물리학 비스무리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 좀 필요할 때도 있고, 시간 개념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 능력도 더러 필요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간혹 신경질이 나기도 하고, 지루해서 하품이 나기도 하고,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들다가도, 사라지고 난 뒤에서야 느끼게 되는 그 사라진 것에 대한 소중함이 아련히 울려 온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명시되어 있는 지구에 관한 설명에서, 주목할 것은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불행했다는 것이다"라는 부분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한 여성이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이 멋지고 행복한 곳이 될 수 있는지를 알게"되는 순간 지구는 사라진다. 아직 마지막 권을 남겨두고 있는데, '42'라는 답에 대한 질문이 저 사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가끔은 나도 사람이 제법 많은 지하철 안에서 이어폰을 끼고 큰 소리로 흥얼대는 파렴치한(?)이 되어보고픈 생각이 든다. 최근 그런 사람을 자주 봐서 그런가. 오늘은 중년의 한 아줌마가 MP3 이어폰 밖으로 흘러나오는 '빗속의 여인'을 엉덩이까지 덩실거리며 부르시던데. 반대편 승강장에서 한 아저씨는 박수를 쳐대며 앵콜을 외치고, 나는 웃음을 참느라고 혼쭐이 났다. 남의 이목 신경쓰지 않고 음악에 심취해 음정박자 다 틀린 멜로디를 흥얼대던 아줌마. 때아닌 리사이틀에 앵콜까지 받았으니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기분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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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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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전날의 섬』을 읽다가 불현듯 생각나서 동시에 읽기 시작했다. 아마도 에코의 책을 읽으며 나의 무의식이 몇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 것 같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병치되어 전개되면서 조금씩 섞여드는 과정이라든가, 햇빛에 약해 밤을 도와 행동하는 주인공 등등. 한 권의 책이 또 다른 책으로 이끌고 서로 교감을 이루는 것을 체험하는 일은 독서의 크나큰, 그리고 색다른 묘미이다. 『상실의 시대』에서 『위대한 개츠비』로 나를 이끈 하루키는 이번에는 스탕달과 투르게네프와 발자크로 이끈다. 이런 책을 만나면 다음 번에 읽을 책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은, 읽지 않은 수많은 책이 꽂혀 있는 책꽂이 앞에서 서성거리는 일이 책들 보기에 민망스럽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나는 소설의 첫관문인 엘리베이터 장면에서부터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건 엘리베이터가 자주 등장하는 내 꿈 속의 장면들과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사고 나서는 초반부를 읽다가 그만 두었는데, 책을 다시 읽었을 때는 그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엘리베이터 이야기가 그 당시 내 무의식 속에 깊은 흔적을 남겼을 수도 있다. 내 꿈 속에서 엘리베이터는 단순히 수직이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를 무서운 속도로 넘나든다. 내부는 고급스런 응접실로 꾸며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큰 사무실 하나를 엘리베이터로 개조한 것처럼 널찍하다. 어쩌면 내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패스워드는 '기묘한 엘리베이터'일지도...
엘리베이터 뿐만 아니라 소설의 많은 상황들이 악몽의 순간들과 비슷하다. 건물 내부에서 지하 깊숙이 숨어있는 노박사의 연구실, 손에 잡힐 듯한 덩어리진 어둠, 그속에서 활동하는 야미쿠로 같은 악의 세력들은 악몽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미지들이다. 아마도 하루키는 정신없이 꿈속을 헤매다 한밤중 벌떡 일어난 뒤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다시 각설하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의식'의 세계라면, 세계의 끝은 '무의식'의 세계이다. 직업이 계산사인 이 소설의 주인공 '나'는 그 자체로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하는 일종의 정보처리사이다. 우리 사회의 정보처리사가 컴퓨터를 이용해서 정보를 처리한다면, '나'는 자신의 두뇌, 즉 몸을 이용하여 어떤 수치를 계산해낸다. '코드명 J(Jonny Mnemonic)'의 조니처럼. 그런데 '세계의 끝'은 '나'가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패스워드이기도 하다. 이 '세계의 끝'은 이 소설에서는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도시처럼 부정적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가 도달해야할 궁극적 세계이기도 하다. 
'세계의 끝'에서 '나'와 분리된 그림자는 이곳이 완전하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이곳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생기없는 평화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미움과 슬픔, 욕망과 시기를 느끼지 않고 아무런 고통없이 살 수 있기 때문에 '세계의 끝' 외부에서 그러한 고통을 느끼며 살았던 사람들은 이곳이 완전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완전'이라는 것의 개념이 무엇일까. 완전이란 불완전을 포함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완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미움과 슬픔, 욕망과 시기와 같은 고통이 빠진 곳에서 '나'는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고 그곳에 동화되지 못한 채 그림자와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이 사라진 이곳에서 사랑은 그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 것 같지만, 사람들은 사랑을 알고는 있되 느끼지를 못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무의식의 세계 속에 자신이 꿈꾸는 유토피아인 원더랜드를 만들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그 세계는 실제로는 하드보일드(hard boiled : 무감각한)한 원더랜드, 즉 모순적인 세계였다.  고통이 없기 때문에 행복할 것 같지만 그곳은 '경이로운' 곳이 아닌 '이상한'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매트릭스>의 설계자는 매트릭스를 고통과 악을 뺀 상태로 프로그래밍했더니 사람들이 다 죽어버렸다고 했다. 인간이란 행복해지기 위해서, 즉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진보를 추구하고 애써 노력하지만 결국 고통이란 실존의 본질이며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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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3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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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도정일 선생의 글을 자주 접하게 된다. 선생은 최재천 선생과의 <대담>에서 '인문학적 경험은 타인에 대한 고통의 이해다'라고 말했고, 최근 신문기고에서는 '세계의 양극화를 해소하는 길은 사회적 구성원 모두가 책임의 윤리 의식을 지니고 사회적 삶의 고통에 대한 공동 책임감을 지녀야한다'고 말했다.
인문학과 윤리 의식.
최근까지 이 둘은 내게서 각각 따로따로 존재하던 것들이었다. 책을 통해서 내가 경험할 수 없었던 슬픔과 고통, 기쁨과 환희를 간접 체험하긴 했지만 그것은 감정적 체험이었을 뿐 실천적 경험으로까지 확산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우리에게 낯선 고통에 대한 관찰을 통해 우리가 소위 '정신병자' 내지는 '미친 사람'이라고 사회적으로 소외시켜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처음에 책의 제목이나 커버의 삽화를 보고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와 비슷한 부류의 소설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책 속 알맹이는 신경학의 전문지식과 에세이류의 문학적 측면을 동시에 갖춘, 심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따뜻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문학적 임상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올리버 색스는 '들어가는 말'에서 책머리에 쓸 인용문을 고르는 일에 관해 쓰고 있는데, 책을 읽은 후 다시 인용문을 읽어보니 그가 이 작업에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의사는 자연학자와는 달리... 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다. - 아이비 맥킨지.

환자는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라는 사실은 곧, 이 책의 모든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상적'이라는 모호하고 극히 주관적인 기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 자신은 자신의 그러한 행동을 인식하고 있을까? 이 책의 대상자들 중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사례도 소개된다. 자기 자신의 팔과 다리를 느끼지 못하고 누군가가 유기한 사지의 한 부분이라고 느끼는 사람들. 영화 <메멘토>에서처럼 기억이 지속되지 않는 사람들. 이러한 감각과 인식과 기억들은 자신을 자신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즉 인간이 "자아에 의해 통일을 유지하는 확고한 존재이게 해주는"(p. 240)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신경계의 이상으로 이러한 감각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우리는 곧 우리를 우리 자신이게 해 주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이 세상에서 무의미한 호흡을 반복하게 되는 것 뿐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상실, 과잉, 이행, 단순함'의 세계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우리 신경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굉장한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곧, 그렇지 않은 보통의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한 존재이며, 그 능력과 생김새, 부유함과 가난함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얼마나 완벽한 존재인가 하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얼마 전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다룬 틱 증후군을 보고 혹시 내가 아는 어떤 아이가 그 증후군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 아이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책을 읽어치우는데,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을 때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부쩍 산만하다. 게다가 늘 이상한 버릇을 달고 다녔는데, 처음에 봤을 때는 습관적으로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마른 기침처럼 목소리를 가다듬을 때 하는 것과 같은) 그 버릇이 없어지고 나서는 고개를 두 번 짧은 간격으로 흔드는 버릇이 생겼다. 계속해서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데, 나중에는 나마저도 고개를 흔들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의 엄마가 고개좀 흔들지 말라고 하면서 "네가 그렇게 고개를 흔드니까 상대방이 그걸 '아니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잖니."라며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에게 네가 고개를 흔든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책을 읽느라 대답이 없었지만 분명 그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그것을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해의 차원에서 '병'으로 인식했더라면 소통의 문제나 엄마의 다그침은 조금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어제는 지하철에서 계속해서 차량 안을 왔다갔다하는 한 청년을 보았다. 사람들이 없었던 터라 지하철 한 량의 한 끝에서 한 끝까지 정확히 점을 찍고 왔다갔다했는데, 내 앞에 앉은 아저씨는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고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거나 초점없는 시선을 어딘가에 두고 있었다. 지하철을 갈아탔는데 아까 그 청년이 갈아탄 지하철에서 또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예전 같았으면 그 미소가 음흉하고 무섭게 느껴졌을텐데, 어쩐지 그 얼굴이 순박하게까지 보였다.  타인의 눈에 자폐처럼 비친다 하더라도, 그는 그렇게 왔다갔다하면서 자기 자신임을 느끼는 지도 모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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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6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엉이 2006-03-16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부끄럽네요^^;;
 
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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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문구처럼 포복절도할 만큼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머꼬네나 삼미 슈퍼스타즈를 읽을 때만큼 대소(大笑)가 터지지는 않았지만 시종일관 만면에 미소를 띠게끔 해준다고나 할까.

이라부는 아이러니하게도 상담을 받으러 그를 찾아오는 환자들보다 더 비정상적인 정신과 의사다.  환자들이 그를 '변태 의사'라거나 '미친 얼간이' 쯤으로 여기면서도 두 번, 세 번 자꾸만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라부의 치료법은 어려운 전문 용어들을 들먹이며 피상적인 처방을 내려주는 정신과 의사들과는 달리, 바로 '환자 그 자신이 되어보기'를 통해 환자로 하여금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안도감을 주는 것에서 출발한다.

때로 우리의 고민들은 누군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눈녹듯 사라져버리는 수가 있다. 이라부를 찾아오는 환자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직업과 관련하여 자신이 가장 잘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어처구니없이 못하게 되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아주 사소한 곳에서 발생한 불균형은 심리를 불안정하게 하고, 한 번 그것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하면 눈감고도 했던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항상 '잘' 해야하고, 실수는 용납할 수 없고,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곧 약점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현대인들을 압박하는 공통사항인 듯하다. 

이라부는 그런 압박과 금기 따윈 과감하게 무시하고 인생을 가볍게 만들어준다. 무겁고 불필요한 허례허식의 투구들을 벗게 해주고, 나비처럼 가볍게 삶을 즐기도록 해준다. 환자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는 자신의 문제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또 자연스럽게 소멸되도록 도와준다.

전에 어떤 친구가 '너 나랑 하루만 같이 미친척 해줄래?'라는 희한한 부탁을 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아마 그때 실연을 겪고, 미치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했던 것 같다. 순간 머리속에 떠오른 건 다름 아닌 두려움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어떻게 미칠거냐고 물어봤다. 들어보고 결정하자는 심산이었다. 친구 역시 구체적 계획은 없었다. 솔직히 '미친다'는 건 그냥 미친 '척'에 불과한 것 아닌가. '광인'에 대한 사회적 금기에 세뇌된 우리들로선 미친다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정도? 그 정도면 가능할 것 같다. 불발에 그친 그 부탁, 지금 생각하니 친구에게 미안한 감이 든다. 그냥 함께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친구에겐 큰 위안이 되었을텐데, 정말 같이 미쳐줘야하는 줄 알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던 내가 웃기기도 하고 바보같기도 하다.

머리가 복작거리던 참에 100%까지는 아니어도, 마유미짱이 막무가내로 놓아주는 비타민 주사 한방 맞은 기분이다. 마치 플라시보 효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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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9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엉이 2005-11-0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정말 한 번 미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면 훨씬 살기가 편할 것 같기도 해요. 물론 좀 외롭긴 하겠지요. 어제는 엄마 모시고 병원에 갔다가 예진하는 신참내기 의사가 하도 틱틱거려 확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의사란 어찌보면 가장 친절해야할 직업이잖아요? 가장 약자를 상대로 하니깐 말이죠. 이라부 같은 의사는 정말 소설에서나 만날 수 밖에 없나봅니다...

2005-11-09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