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장바구니담기


아버지가 바로 아버지일 때에만 아버지는 저한테 너무 강한 분이셨습니다. -16쪽

아무튼 아버지와 저는 그렇게 달랐고, 다르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위험했습니다. -20쪽

'어느 날 밤 거인의 모습을 한 아버지가 느닷없이 최후의 심판관이 되어 나타나서는 나를 침대에서 들어내 파블라취로 끌고 나갈 수도 있다, 그만큼 나란 존재는 아버지한테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26쪽

아버지가 제게 내리신 계율을 아버지 스스로가 지키시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저를 짓누르는 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39쪽

왜냐하면 지배에 대한 생각은 다른 사람 안의 마지막 저항의 목소리 마저도 제압해야 하기 때문이지요.-43쪽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관계는 또 다른 결과를 낳게 되었는데 그건 사실상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였지요. 제가 말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44쪽

저는 제 행동에 대한 믿음을 잃고 말았습니다. -50쪽

인색하다는 건 깊은 불행 속에 처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불행의 징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모든 사물에 대해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제가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것은 이미 손에 쥐고 있거나 입에 물고 있는 것, 아니면 적어도 손에 쥐려고 하거나 입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뿐이었지요. -8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향수 (반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Mr. Know 세계문학 20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품절


그때부터 그녀는 후각을 상실했고, 그와 더불어 따뜻함이나 냉정함 등 모든 인간적 감정도 잃어버렸다. -27쪽

그는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않았다. 단지 아래로부터 퍼져 올라오다가 뚜껑에 덮인 것처럼 지붕 밑에 갇혀서 그를 감싸고 있는 나무 냄새를 들이마실 뿐이었다. 냄새를 들이마시고 그 냄새에 빠져 자신의 가장 내밀한 땀구멍 깊숙한 곳까지 전부 나무 냄새로 가득 채운 그는 그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는 나무 인형, 즉 피노키오가 된 것처럼 그 장작더미 위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한참 뒤, 거의 30분쯤 지나서야 비로소 <나무>라는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
그에게 가장 어려웠던 일은 냄새가 없는 대상을 지시하는 추상적 개념어들, 특히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듯을 지닌 단어들을 익히는 일이었다. -33쪽

냄새로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풍부함과 언어의 빈곤함으로 인한 그 모든 이상한 불균형들로 인해서 그르누이 소년은 말의 의미를 포기하게 되었다. -34쪽

말이나 눈빛, 감정이나 의지보다 향기가 훨씬 설득력이 강했다. 향기의 설득력은 막을 수가 없었다. -95쪽

이렇게 공식들을 기록해 둠으로써 그는 자신의 도제의 내면세계에서 솟아 나오는 그 놀라운 창조적 카오스의 세계를 가두어 둘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105쪽

그르누이는 이 과정에 매혹되었다. 그가 인생에서 뭔가 감동이라는 것을ㅡ물론 그 감동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진 채 차갑게 타올랐다ㅡ맛본 적이 있다면 바로 불과 물과 수증기, 그리고 골똘히 고안해 낸 어떤 도구를 이용해 물질로부터 향기의 영혼을 빼앗는 이 과정에서였다. -110쪽

끝을 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풍요로운 자신의 상상력의 샘에서 그는 단 한 방울의 구체적인 냄새 에센스도 퍼 올리지 못했다. -114쪽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외부 세계가 그에게 제공하는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의 내면이 훨씬 더 놀랍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24쪽

그루누이의 마음속 우주에서는 사물은 없고 단지 사물의 냄새만 존재했다(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를 적절하고 그럴듯한 하나의 풍경으로 묘사하는 것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우리의 언어는 냄새로 맡을 수 있는 세계를 묘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142쪽

사실 <인간의 냄새>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의 얼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듯이 말이다.
[...]
-167쪽

그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 주변에 냄새의 공간을 형성하지도, 파동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170쪽

사람들이란 멍청하기 이를 데 없어서 코는 숨 쉬는 데에만 이용할 뿐 모든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191쪽

그런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꼭 한 군데 있으니, 그곳이 바로 그르누이 자신이다. 그는 이 사랑의 향기를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
이 향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것을 만들어 낸 나 자신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향수의 마법에 걸리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이 향수는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27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야기 파는 남자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절판


고자질이란 실제 있었던 나쁜 짓을 흉내 내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그건 너무 천박한 행동이다. 고자질과 구타란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54쪽

감각의 인상에만 매몰되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진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78쪽

<졸업>이라는 영화를 함께 본 뒤 집으로 왔을 때 헤게는 피아노 앞에 앉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단조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했다. 시간은 30분 이상 걸렸다. 헤게가 아다지오를 연주할 때 나는 순간적으로 헤게를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에 빠졌다. 그러나 연주가 알레그로로 넘어가는 순간 내 넋을 잃게 만든 것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음악 그 자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88쪽

추리소설에는 대개 한 페이지 정도로 집약할 수 있는 하나의 응축된 이야기 핵이 있다. 추리소설가의 재능이란 이러한 이야기 핵을 사실 정보 차원에서 교묘하게 은폐하고 유보시키는 기술에 있다. -98쪽

꿈이란 마치 펼쳐놓은 한 권의 책과 같았다. 당시 내 꿈에 등장하는 배경은 늘 두세 개 정도로 일정했고, 등장인물들 역시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나타나는 고정 배역이 있었다. 이 배역들은 단순히 내가 바깥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의 반영이 아니었다. 반대로 뭔가 새로운 것을 표출해내고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경험들에서 나는 뭔가를 배웠고, 그것을 토대로 오늘의 성숙한 내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꿈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99쪽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글을 볼 때마다 나는 마치 무의식적인 글쓰기를 통해 내게 선사된 신비스러운 문서를 입수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공상을 하고 가끔씩 뇌를 알코올에 푹 절여가면서까지 글쓰기를 하는 것은 아마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을 잊으려고 애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것을 잊으려고 그리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던 것일까?-103쪽

먼저 글을 쓴 뒤에 세상을 경험해도 된다는 믿음은 포스트모던적인 오해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작가의 삶을 살기 위해 작가가 되고자 한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꼴이다. 작가가 되려면 먼저 세상을 살아야 하고, 그런 다음에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도 그에 대한 결정은 삶 자체가 내린다. 글이 삶의 결실이지. 삶이 글의 결실은 아닌 것이다. -201쪽

나는 쉽게 사랑에 빠지는 유형이 아니지만 일단 마음을 사로잡는 여인을 만났다 싶으면 그녀를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알아내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28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6.5.8

 

2006.5.11 오전

 

2006.5.13 아침

 

아주 연한 보랏빛 하늘하늘한 꽃이 오래도록 피어있던 바이올렛이었는데, 겨울을 나지 못하고 죽었다.

새싹 옆에 누워있는 것이 분명 주검 같은데 푸른빛이 없어지지 않고 썩지도 않아서 버리지 못하고 놔두었는데, 얼마 전에 저 이름모를 녀석이 땅을 뚫고 나왔다. 으아~!

꽃피우는 바이올렛이었으면 좋겠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잘 크고 있다.  


 

 

"안녕, 화분!"

 

'Dr. 깽'에서 달고(양동근)가 화분에 물주며 하던 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근대라는 말은 거칠게 정의를 내려보자면 자본주의와 합리주의가 사회의 지배적 인식론으로 자리잡은 시기를 의미한다고 본다. 근대 이전과 비교해 볼 때 근대와 그 이후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진보'의 공간을 확장하며 달려왔고, '탈근대'를 향한 의식은 아마도 이 무한속도의 경쟁과 일방적 흐름에서 잠시 멈추어 뒤를 돌아보는 반성의 한 몸짓이 아닐까 한다.

그중에서도 '나비와 전사'는 자괴적 반성이 아니라 나비처럼 가볍고 전사처럼 과감한, 생을 향한 긍정적이고 유쾌한 몸짓이다. 지나간 자리를 모조리 자신의 흔적으로 채우고마는 근대라는 탱크에 맞서, 짓밟히고 지워진 것들을 다시 일으키는 작업이다.

연암과 푸코를 두 개의 중심축으로 한바탕 통쾌한 썰을 풀어내는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솔직히 두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이러한 연구서를 접하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고, 또 예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게다가 '성의 역사'와 '천개의 고원'의 잘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들에서 절망감을 톡톡히 맛본지라 이 책 역시 그러한 좌절감을 가중시키는 괜한 짓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그러나 '지은이의 말'을 읽는 순간부터 이러한 잡스런 기우들은 다 사라지고, 입담 좋은 길라잡이를 따라 문과 문 사이를 넘나들며 그야말로 '사-유(思-流)' 혹은 '사-유(思-游)'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자유로운 서술방식을 일컬어 문체가 진지하지 못하다고 반박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을 나는 현학적 무게감을 덜어내기 위한 저자의 솔직담백하고 친절한 배려로 받아들이고 싶다.

연암과 푸코를 통해 동양과 서양으로 대표되는 여타의 이분법으로부터 어떤 접점을 찾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나 역시도 근대의 환상 속에서 내 안에 고착된 경계를 허물고 해묵은 편견들을 없애고 싶었다. 지금도 내안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과정들 속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해 준 열쇳말들은 '자기속도 지니기'(1장), '삶의 전략으로서의 유머(해학)'(5장) 그리고 '거리 지우기'(6장)이다. 

'낙오자'라는 말은 모두가 한 속도로 움직이는 대오(隊伍)에서 뒤쳐진 사람을 말한다. 극소수가 주도하는 '빠른' 것만을 속도로 인정하는 이 사회에서 자신이 낙오자라는 열패감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책의 저자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이러한 열패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자기 속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언제든 자신의 시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생에 대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만족감을 맛보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고달픔을 양(陽)의 에너지로 바꾸어야 한다. 저자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제로서 '유머'를 이야기한다. 유머는 바로 피폐해진 우리 내부에 어떤 공간, 즉 '여유'를 만들어준다. 그속에서 우리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힘을 축적할 수 있다.

이렇듯 저자는 내부의 공간은 넓히되, 외부와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타자와의 거리를 '편견'이라 칭하고 싶다. 우습게도 편견은 대상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착각, 다시 말하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세상과 나 사이에 수많은 벽을 만들고, 삶을 불편하게 하며 결국은 바늘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따라서 거리 지우기는 '존재-되기'의 경험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다.

이 책의 목적과 내가 이 책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론의 전환이었다. 비판적 사고 없이 당연스레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근대의 환상을 걷어내는 것. 그렇지만 근대는 나쁘고, 탈근대는 좋다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은 "대칭적 동일성에 빠지기 때문에 언제든" 근대를 "복제할 위험에 처"(263쪽)할 수도 있다. 근대 없는 '탈근대'는 있을 수 없고, 근대를 배척하는 '탈근대'는 자칫 동어반복적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근대적 사고방식이 그토록 견딜 수 없어하는 '차이'를 재발견하고 그 '주름들' 속에 유폐되고 소외되었던 참삶을 되살리려는 목적을 끊임없이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6-05-12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해요..

부엉이 2006-05-12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감사해요^^ 저도 다른 분 추천할 때 버튼만 누르지 말고 꼭 이렇게 흔적을 남겨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