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반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Mr. Know 세계문학 20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품절


그때부터 그녀는 후각을 상실했고, 그와 더불어 따뜻함이나 냉정함 등 모든 인간적 감정도 잃어버렸다. -27쪽

그는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않았다. 단지 아래로부터 퍼져 올라오다가 뚜껑에 덮인 것처럼 지붕 밑에 갇혀서 그를 감싸고 있는 나무 냄새를 들이마실 뿐이었다. 냄새를 들이마시고 그 냄새에 빠져 자신의 가장 내밀한 땀구멍 깊숙한 곳까지 전부 나무 냄새로 가득 채운 그는 그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는 나무 인형, 즉 피노키오가 된 것처럼 그 장작더미 위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한참 뒤, 거의 30분쯤 지나서야 비로소 <나무>라는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
그에게 가장 어려웠던 일은 냄새가 없는 대상을 지시하는 추상적 개념어들, 특히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듯을 지닌 단어들을 익히는 일이었다. -33쪽

냄새로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풍부함과 언어의 빈곤함으로 인한 그 모든 이상한 불균형들로 인해서 그르누이 소년은 말의 의미를 포기하게 되었다. -34쪽

말이나 눈빛, 감정이나 의지보다 향기가 훨씬 설득력이 강했다. 향기의 설득력은 막을 수가 없었다. -95쪽

이렇게 공식들을 기록해 둠으로써 그는 자신의 도제의 내면세계에서 솟아 나오는 그 놀라운 창조적 카오스의 세계를 가두어 둘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105쪽

그르누이는 이 과정에 매혹되었다. 그가 인생에서 뭔가 감동이라는 것을ㅡ물론 그 감동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진 채 차갑게 타올랐다ㅡ맛본 적이 있다면 바로 불과 물과 수증기, 그리고 골똘히 고안해 낸 어떤 도구를 이용해 물질로부터 향기의 영혼을 빼앗는 이 과정에서였다. -110쪽

끝을 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풍요로운 자신의 상상력의 샘에서 그는 단 한 방울의 구체적인 냄새 에센스도 퍼 올리지 못했다. -114쪽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외부 세계가 그에게 제공하는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의 내면이 훨씬 더 놀랍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24쪽

그루누이의 마음속 우주에서는 사물은 없고 단지 사물의 냄새만 존재했다(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를 적절하고 그럴듯한 하나의 풍경으로 묘사하는 것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우리의 언어는 냄새로 맡을 수 있는 세계를 묘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142쪽

사실 <인간의 냄새>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의 얼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듯이 말이다.
[...]
-167쪽

그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 주변에 냄새의 공간을 형성하지도, 파동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170쪽

사람들이란 멍청하기 이를 데 없어서 코는 숨 쉬는 데에만 이용할 뿐 모든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191쪽

그런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꼭 한 군데 있으니, 그곳이 바로 그르누이 자신이다. 그는 이 사랑의 향기를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
이 향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것을 만들어 낸 나 자신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향수의 마법에 걸리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이 향수는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27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