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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마르탱 파주 지음, 이상해 옮김, 발레리 해밀 그림 / 열림원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비가 내린다.
하늘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축복을 내린다.
그래서 더는 성수반이 필요 없다.
우리의 나날은 그로 인해 신성화된다.
비는 종교를 희석시킴으로써 그것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전 지구가 교회가 되고, 우린 어디서나 즐거운 우리 집에 있게 된다.
모든 노래가 신성하고, 몸짓 하나하나가 의식이 된다.
성찬과 기도의 마술이 우리에게 친근한 것이 된다.
숭배해야 할 것이 더는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의미를 취한다.
비는 무신론으로부터도 해방시켜준다.
우리는 우리 내부에 교리 없는 믿음이 움트는 것을 느낀다.
그럴 때, 비가 자연현상이기에 앞서 사랑이나 너그러움 같은 고귀한 감정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마르탱 파주, '비', 열림원, 19쪽
읽다 보면 종교적인 것 같기도 하고, 범종교적인 것 같기도 하고, 반종교적인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 왔다갔다 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별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탁월한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일상에 대한 관조와 통찰의 힘일 것이다.
사소한 것을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낯설게하기의 즐거움'.
이런 낭만적인 비가 지긋지긋해질 지도 모를 장마다.
게다가 지구에서는 점점 이런 낭만적인 비가 퇴출될 위기에 놓여 있다.
개인적으론, 돔구장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비는 야속한 존재로 느껴진다.
하지만, 미친듯이 감수성이 예민해지게 만들어서 작가님들, 화가님들 좋은 작품 나오게도 하는 게 비다.
눈 깜짝할 만큼 짧은 연애를 했을 때 정신나간 여자처럼 비를 맞고 돌아다녔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비가 좋았는지, 비를 좋아하는 척했는지, 비를 좋아하는 내가 좋았는지,
비를 좋아하면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비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내린다. 예보를 무색하게 만들며, 느닷없이.
같은 책, 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