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무라사키의 이름은 세계 최초의 훌륭한 소설 《갠지 이야기》를 쓴 여성 소설가 무라사키 시키부에서 딴 것이다. 작중에서 레이디 무라사키는 오노 고마치와 아키코 요사노의 시를 인용한다. 그녀가 한니발에게 작별인사 대신 읊는 시는 《갠지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_토머스 해리스, 《한니발 라이징》, ‘감사의 말’ 中에서, 459쪽
"『마지막 강의』의 표지엔 그 사람, 롤랑 바르뜨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다. 시가를 피우는 바르뜨의 사진으로, 그 사진이 인쇄된 흑백톤 껍데기를 벗기면 뜻밖에 연보라색인 하드커버가 나타난다. 껍데기는 벗겨 선반에 꽂아두고 알맹이로 두거나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이 책은 내게 흑백이 아닌 연보라색이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연보라색인 책. 롤랑 바르뜨는 본인의 마지막 ‘말’들이 한국에서 옅은 무라사끼紫색 커버로 묶였다는 점을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그가 무라사끼 시끼부의 「켄지 모노가타리」를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라사끼紫가 자주색과 보라색을 의미하는 글자라는 것도 그가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저 연보라색을 처음 확인했을 때 책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롤랑 바르뜨가 게이였다는 점이 그의 강의록 표지가 보라색으로 결정되는 데에 영향을 미쳤을까가 나는 궁금했는데 그것은 무슨 영문이었을까."
_황정은, 《디디의 우산》,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234~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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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우연히 고른 두 개의 소설이 공유한 하나의 인물. 무라사키 시키부.
창비는 외래어 표기를 국립국어원을 따르지 않아 처음에는 그 무라사끼가 그 무라사키인 줄 한 3초 정도 고민했다.
《한니발 라이징》에서 레이디 무라사키로 등장하는 이 여성은 전쟁의 무자비함(이 말보다 더 무자비한 말은 없을까)이 할퀴고 간 한니발의 정신세계를 일본 특유 정중동의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중요한 인물이다. 《한니발 라이징》에서 사무라이나 하이쿠로 정화(?)된 어른 한니발의 행동 방식은 안소니 홉킨스의 한니발보다는 매즈 미켈슨의 한니발이 더 가깝게 구현하는 것 같다. 그야, 안소니 홉킨스의 한니발은 원작자 토머스 해리스가 한니발의 탄생을 설명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이니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한니발 라이징》의 마지막 장을 덮고, 《아무튼, 하루키》와 《스스로 행복하라》를 독파한 뒤 시간 순으로는 가장 오래 묵혀둔 《디디의 우산》의 읽다 만 부분을 펼쳤다. 두 책의 장르는 《디디의 우산》에서 표현을 빌려오자면, 묵자의 세계와 점자의 세계만큼이나 다른데도 두 책을 읽을 때의 내 감정선이나 에너지 소모량은 아주 비슷했던 것 같다. 아마도 뇌파를 검사했다면 같은 곡선을 그리고 있지 않았을까.
사실 나는 《레드 드래곤》《양들의 침묵》《한니발》을 읽지 않았고(영화만 봄), 읽어본 분들에 따르면 그 결이 한참 다르다고 하는 《한니발 라이징》을 먼저 읽었다. 영화만 보고 비교한다면, 이 책을 읽는 내내 영화의 공포감보다는 연민과 슬픔이 함께했다. 이 프리퀄은 자신이 탄생시킨 괴물에 대한 작가의 한없는 애정이 담긴 변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어른 한니발의 '범죄'가 용인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해는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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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의 두 이야기에서 첫 번째 이야기 「d」는 사실 잘 읽히지 않아, 읽다 말다 하다가 두 번째 이야기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로 넘어오면서 단숨에 읽었다. 아마도 전편에 등장하는 인물, 장소, 감정이 좀 낯설었던 것 같다. 그에 비해 후편의 이야기는 접점이 더 많아서인지, 마치 침침한 촛불 아래에서 전편의 이야기를 읽다가 누군가 형광등을 탁!하고 켜준 듯한 느낌이었다.
황정은의 책이 처음이라, 그녀만의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중 인물의 이름이 도드라진다는 점이 낯설고 어려우면서도 재미나고 독특했다. 주인공 이름은 차치하고라도, 엄마나 아빠, 형이라고 불러도 좋을 인물들까지 그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 저마다 이름이 있다. 평볌한 이름도 있고, d나 dd처럼 이니셜로 처리된 인물도 있지만 '여소녀' 같은 60대 아저씨와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강렬한 이름도 있다. 아마도 「d」가 읽기 어려웠던 건 저마다의 인생과 무게를 갖고 있는 이 등장인물들의 이름 때문이 아니었나, 지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이 다루는 우리 사회의 아픈 사건들. 나 역시 그 시대에 대학생이었고 어리지 않았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법도 했는데, 어떤 일은 기억나고 어떤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되게 부끄러웠다. 그런 사건들을 하나의 객관적 사실이 아닌, 김소영과 서수경이라는 구체적 인물들이 겪은 아픈 기억으로 나에게 이야기해준 작가에게 솔직히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어제 우연히 세월호를 기록한 다큐 <부재의 기억>을 봤다. 세상 사람들이 얘기한다.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아무리 가만히 있으라 했어도 바다에 뛰어들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보상금 바라고 저러는 거 아니냐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로 설명한다는 건 정말 말이 서툰 나같은 사람에겐 어려운 일이다.
"김소리는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자기는 그 일을 말할 수 없는 것뿐이라고 대답했다. 한 집에서 아이가 자란다는 것을 내가 모른다고 김소리는 말했다. 아이가 얼마나 더디게 자라는지 얼마나 빠르게 자라는지 그걸, 언니는 모른다, 라고. 부모는 아이와 같은 공간에서 일상적으로 아이의 흔적을 목격한다고 김소리는 말했다. 아이와 같이 산다는 건 매일 숱한 감정적 소용돌이와 아이의 흔적에 휩쓸린다는 거야. 우리 집에도 그런 게 잔뜩 있어. 내 아이가 엉뚱한 장소에 넣어둔 장난감, 이로 씹은 물건들, 아이 옷에 일어난 보푸라기들, 펼쳐진 그림책, 낙서들. 내 집에서 내 아이의 자국들을 볼 때마다 난 그 애들이 생각나. 나처럼 그런 걸 하나하나 목격하며 그 나이로 자랄 때까지 아이를 키웠을 엄마아빠들이. 그러니까 내가 그 일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처럼 내게 말하지 마. 나는 그 일을 생각해. 그 사람들의 집을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생각해. 그래서 말할 수 없어. 무서워서."
_황정은, 《디디의 우산》,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298쪽.
작가란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감정들을 속시원히 대변해주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내가 그 감정을 말로 하지 못하고(김소리처럼 무서워서였건, 표현 방법을 몰라서 하지 못했건) 참여하지 않은 데 대한 일말의 변명이자, 그럼에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정당화란 느낌을 대신 말해준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그럼에도 '그래선 안 됐어'라는 두 생각이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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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d」를 읽을 때, 처음에는 d와 dd가 여고생일 거라 생각했고, d와 dd가 동거를 시작했을 때는 d가 남자이고 dd가 여자일 거라 생각했다가 d가 dd의 집으로 LP 판을 찾으러 가면서야, 거기에서 구체적인 명사를 발견하고 성별을 알 수 있었다. d와 dd가 이성이라고 생각했을 때 둘의 관계에서 오는 애틋함을 5정도라고 느꼈다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을 때의 감정은 10정도로 치솟았다. 이 또한 어쩌면 편견일지 모르지만, 아니 그런 게 분명하지만 나의 동성 친구 누구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그 아름답고 처절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세상의 소수만이 가지는 감정, 달라서 싫은 관계, 묵자는 모르고 점자만 아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점자에 대한 시각. 이런 소외와 상실의 이야기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담론부터 한 개인의 삶까지를 오가면서 유별나지 않게, 담담하게, 원래 늘 그 자리에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된다.
나치에 희생된 동성애자 추모관. 이런 게 있었구나. 나치는 혐오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찾아내 철저하게 혐오했구나. 게이에게는 핑크 트라이앵글을, 레즈비언에게는 '유대인과 섹스한' 아리아인의 낙인인 블랙 트라이앵글을 달아 철저하게 짓밟았구나. 그럼에도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기억을 되풀이하고, 철저하게 상투적인 '위 캔트 저지 뎀'이라는 말로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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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사키 시키부가 이어준 이 두 권의 이질적인 소설은 나에겐 이상하게도 상실과 소외의 문제에서 맞닿았다. 나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채 순간의 연민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위안하는 어제의 세계에 속한 인간이다. 어제의 세계를 살인과 식인이라는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청산하는 한니발은, 그래서는 결코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디디의 우산은 "다른 날일 가능성이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서로의 무사귀환을 날마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벗어나자고, 벗어날 수 있다고, 벗어나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