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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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아이들은 우리(어른들)이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모든 것을 다 알고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실은 자라나면서 배우는 것(즉, 지식을 습득한다, 앎을 키워나간다는 표현이 의미하듯이)이 아니라 전부 알고 있던 것을 하나씩 잊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또다시 새로 배우고 있는게 아닐까 한다. 아멜리 노통이 신, 나, 파이프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의아한 공감을 자아내게 만드는 어린아이의 관점이다. 작가들이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사람들 같다. 우리가 사는 세계보다 훨씬 자유롭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모험이 넘치는 곳. 아멜리 노통의 기발함에서 그녀 또한 또 다른 세계에서 살다온 경험을 완벽히 풀어내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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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브 공작 부인
라 파예트 지음 / 신원문화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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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사랑을 받는 일 이외의 행복이 어디있겠습니까? -<클레브 공작부인> 中에서-
클레브 공은 샤르트르 양을 보고 한눈에 반하고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이유도 없었기에 클레브 공작부인이 된다.그때 프랑스 왕궁의 실세였던 느무르 공은 유부녀가 되어서도 여전히 킹카인 클레브 공작부인을 사랑하게 되고, 그녀는 정숙한 부인의 정절과 남편에 대한 의무 때문에 느무르 공을 사랑하는 마음을 감추게 된다. 허나 자기 아내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된 클레브 공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부인에게서 자신은 사랑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과 느무르 공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말하자면 상사병으로 죽게된다.

남편이 죽었으니 자유롭게 느무르 공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공작부인은 사랑을 이성과 의무로 억누르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버린다. 느무르 공의 끈질긴 구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도원과 자택을 오가며 남은 여생을 보낸다.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이리하여 부인의 생애는 짧기는 했으나,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과연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겠지. 그렇게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아직 겪어보지도 않은 고통 때문에 지레 겁먹고 자신을 외부로부터 가두어버린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아직 소설이란 것이 형태를 잡아가기 전에 여성 심리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이룩한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결말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지.

소설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봤다. 나는 그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그런데 그는 또 다른 사람을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고 맹세했었다. 만약 내가 그를 보내주지 않는다면? 그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 조금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 괴롭기만 할 것이다. 나는 그를 잃지 않았기때문에 행복하긴 하지만, 그의 불행은 곧 나의 불행이니 그것을 생각한다면 나도 불행하다.

내가 그를 보내준다면? 그는 그녀와 행복할 것이다. 그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한 것인데, 이 상황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곧 그의 행복은 나의 행복이라 했던 나의 맹세는 위선이며 거짓이 된다. 보내주지 않는다면 나와 그 둘 다 불행해지지만, 보내준다면 나 혼자만 불행하다. 정말 불행한 것은 어떻게 하든 나는 불행의 공통분모 속에 놓인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것은 정말이지 순간적인 쾌락일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진창 속에 인간을 쳐박아 놓는 못된 감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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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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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이제 가서 자. 어디 있는거야? 누구하고 있니?' '아무하고도 같이 있지 않아. 나와 나 자신과 나 뿐이야.' -<호밀밭의 파수꾼> 中에서-

'두번 읽게 만들지 못하는 책은 한번 읽을 가치도 없다’는 말을 인용한 누군가는 이 책을 열번 읽었다고 한다. 난 아직 두 번밖에 읽지 못했다. (실상 내 습관대로라면 두번'이나' 라고 해야 옳겠지만.) 어떻든 이 책은 자꾸 들여다보게 만든다. 무슨 책을 볼까 책장에 꽂힌 책들을 따라가다가도 이 책에서 눈이 멈추고 읽진 않을거지만 그냥 한번 뺐다 꽂게 만드는 뭐 그런 종류의 책이다.

홀든은 외롭다. 퍼내어줄 사랑이 많기 때문에 외롭다. 그는 자기 동생들을 묘사한 후에 꼭 '진짜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 정말 그의 동생들이 '진짜 보고 싶어진다'. 홀든은 고등학교에서 비록 네번(정확하지 않다)이나 퇴학당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사랑할 줄 아는' 아이이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그런 걸 가르치지 않으니, 퇴학당할 수 밖에. 베르베르의 <타나토노스>에서 죽은 아내를 구하러 영계로 떠나는 주인공은 비로소 자신이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 나 또한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런면에서 홀든은 진짜 대단하다. 16살에 여드름투성이인 고등학생일 뿐이지만 그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홀든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 아이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면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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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노트 1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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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게 약이다'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죽음이란 우리가 알 수 없는 두려운 세계이지만 그러하기에 삶을 지탱해주는, 우리가 살아가도록 해주는 그리고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는 버팀목이 된다는 것을 베르베르의 이 가상현실을 통해 느꼈다. 이 책을 통해 소개되는 고대 신화, 전설을 보고 있으면 과연 현대인들이 이룩한 이 과학문명을 '진보'라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고대인들은 기계와 기술이 아닌 인간 스스로가 지닌 '내적성찰'을 통하여 죽음에 대해 사색하고, 그것의 실체를 꼭 밝혀내야지만이 죽음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베르베르의 상상력을 통해서 본 인간은 진실의 엄청난 위력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은 얼마나 피곤할까.

웰즈, 쥘 베른, 필립 딕 같은 작가들을 언급했으니 올더스 헉슬리도 읽었을 게 분명한 베르베르의 글에서 <멋진 신세계>의 냄새가 난다. 솔직히 나는 과학적 문명(그것의 진보를 찬미하든 경고를 내포하든)을 다룬 책들이 싫다. <멋진 신세계>를 중반까지 읽고서 도저히 더 읽을 수가 없어서 덮어버렸다. 베르베르의 책은 물론 많은 지식을 주고, 흥미롭지만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나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책이라서 그런가 보다.

아니면 그가 드러내주는 현실이, 그가 제시하는 미래가 유혈이 낭자한 공포영화보다도 나를 두렵게 만들어서일지 모르겠다. 그것은 두려움 이상의 혐오감이다. 2000년에 이 책을 읽으려다 실패하고 얼마전 베르베르가 내한한 것을 기념으로 다시 한번 시도를 결심, 고른 것이 이 책이다. 내 취향과는 맞지 않는 책이지만 영계에 대한 그토록 세부적인 묘사를 이루어낼 수 있는 상상력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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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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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만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피조물이 괴로워하고 있으며,누구 속에서든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다.
- <데미안> 서문 中에서-

헤세의 이 서문을 읽고 있으면 초라해 보이는 나 자신이 문득 뿌듯해진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는 헤세의 위안이다. 집단속에서 뭉뚱그려져 ’나, 너, 누구’가 아닌 이내 ’사람들’ 속에 묶여버리는 현대인. 나는 사실 <데미안>의 내용보다는 서문이 더 좋다. 위에 인용한 단락뿐만 아니라 이 서문은 어느 한 구절도 놓치기 아까울 만큼 아름답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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