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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봐야 하나요?"
올해 중순, 트위터의 독서 관련 모임에 누군가 올려놓은 질문이었다.
곧바로 여러 개의 멘션이 달렸다. 대부분은 너도 나도 가볍게 "네, 한번 읽어보세요."
이상한 것은, 당시 질문을 올린 사람도 답변을 올린 사람의 대다수도 피차 그 책을 확실히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고 있더라는 거다. "무슨 책인지 잘 모르지만 유명하다고 하니 한번 읽어볼까요?" 라는 질문에 "무슨 책인지 잘 모르지만 유명한 것 같으니 한번 읽어보세요" 라는 기묘한 답변들... 문득, 책상 위에서 힘겹게 진도를 달리고 있던 <정의…>가 빼꼼히 내다보는 것 같아
"본인이 직접 내용을 살펴보고 결정하는게 어떨까요?"
라는 지극히 당연한 멘션을 달았더니, 질문자를 포함해 해당 타임라인이 오히려 뜨아해 하는 분위기다.(뭥미?) 내친김에 몇 마디 말을 섞어본 즉, 평소 윤리/철학 분야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도, 롤스의 <정의론>을 들어본 적도, 사회적 이슈에 별반 고민한 적도 없는 평범한 20~30대 젊은이라 했다. '아니, 그럼, 도대체, 왜?!'
하도 여기저기서 이 책을 들먹이니 읽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이 되어 남들에게 대신 선택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책인지 서점 가서 직접 확인해볼 생각은 딱히 없으면서 말이다...)
2010년 대한민국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하나의 '패션'이었다.
왜 그토록 이슈가 되었을까에 대해서는 단행본 <'정의란 무엇인가'는 무엇인가>라도 한 권 낼 수 있을 만큼 다양한 해석들이 난무했다. '정의에 목말라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부터 한국사회에 대한 자조적 분석, 현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 미국 출신 엘리트에 대한 한국사회의 동경, 딜레마 문답식의 교수법, 하버드大라는 상징성, 인상적인 강의실 장면,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베스트셀러를 부채질한 출판시장, 동일 저자/유사 도서의 출간과 해명, 정의에 대한 무수한 담론과 도서 리뷰, 마이클 샌델 교수의 방한과 5000명 공개강연의 열풍, 그 강연에 대한 취재 기사 등등등...
이유야 어쨌건 놀라운 것은 이 책의 '알맹이'보다는 거기 붙은 '라벨'로 인한 관심 자체가 엄청났다는 점이고, 평소 정치철학이나 윤리철학, 정의론 같은 분야에 관심을 두지 않던 사람들조차 부담없이 이 책을 손에 들더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따분한 개념들을 딜레마 상황을 통해 쉽게 풀어내는 저자의 강의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많았겠지만, 책 제목만을 가지고 그 내용을 지레짐작하면서 나름의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경우를 접할 때면 뭔가 좀 떨떠름했다. 저자가 원하던 '시민사회의 자발적 고민'보다는, 귀에 익숙해진 '제목'만으로 이미 <정의>의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말의 거품들... <정의란 무엇인가>는 어떤 면에서 책으로서의 '내용'이 휘발된 채 유통되는, 일종의 'Must have' 아이템이나 대중문화의 기호품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더랬다.
역시 복합적 이유로 이 책을 접했고, 운좋게 평화의 전당에서 저자의 공개강연까지 듣게 되었다.
나름 경험해본 <정의>의 미덕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적절한 질문을 던져준다는 것.
내 관점과 가치관이 상황에 따라 교묘하게 말을 바꿀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 주고,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다른 사람의 입장과 관점에도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 막연하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던 정치/사회/윤리적 이슈들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해볼 직접적인 기회를 제공하더라는 것.
경희대 강연에서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는 그랬다.
"이게 뭐야. 말만 빙빙 돌리면서 정의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는 않네."
2010.12.13. 경향신문 만평
자, 누군가 하버드 모범답안을 떠먹여 주길 기대하며 한번의 되새김도 없이 널부러져 있을 동안, 대한민국 정치권은 "이것이 정의다!"하며 '그들만의 정의'를 강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한번, 책상 위에서 진도를 나가고 있는 마이클 샌델의 새책은 표지에서부터 그 당위성을 조용히 웅변하고 있다.
<왜 도덕인가?>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저자의 다른 저서 <공공철학(Public Philosophy, 2005)>으로 언급된 바로 그 책이다. (척 봐도 이렇게 한국판 책제목을 뽑아낸 그 사람에게 판매이익의 일부를 인센티브로 지급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도덕>은 다행히 <정의>보다 쉽게 진도가 나아간다.
그리고 마이클 샌델 자신의 견해가 직접적으로 더 뚜렷이 제시되어 있다. <정의> 책이나 강연에서 '그러니까 당신의 주장은 무엇인가?' 궁금했던 사람이라면 반가워할지도 모를 일인데, 앞서 문답식 강연에 너무 깊은 인상을 받아서인지 조금은 낮선 느낌이다. 질문을 통해 딜레마에 빠트리고 독자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기 보다는, 한달음에 술술술 관련된 사건과 이론들을 끌어와 설명하면서 다양한 이슈들을 훑고 지나간다. 굳이 서문을 읽지 않더라도 쌍방향 소통의 강의가 아니라 잡지에 기고한 일방통행 칼럼의 느낌이 곳곳에 배어있다.
책의 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대체로 생소하지가 않다.
낙태, 동성애, 존엄사를 비롯하여 배아복제, 환경오염, 역사 유물, 핵전쟁, 소수집단 우대정책, 공공기업의 상업화, 공정한 법 집행 같은 이슈들은 <정의> 뿐만 아니라 TV나 논술지문 같은데서도 흔히 접할 수 있던 것들이다. 다만, 상당 부분 미국사회 고유의 주제와 시각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러한 정치/문화적 배경들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내용은 크게 3부로 나뉘어진다.
- 1부는 지난 20년간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위와 같은 도덕적 현안들을 다루고,
- 2부는 현대의 다양한 자유주의 정치이론을 본격적으로 비교 분석하며
- 3부는 미국 정치의 전통과 미국 정치사의 주요 논쟁을 짚어보면서 질문을 던진다.
'왜 도덕인가' 라는 질문의 답을 발견하려고 샅샅이 훑어보게 되는 1부까지는 그다지 학술적인 냄새가 많이 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워밍업 단계. [도덕적 가치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근사한 부제가 붙은 2부 부터는 롤스, 칸트, 벤담, 밀, 듀이 등 이 분야의 낮익은 슈퍼스타들과 함께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실용주의 등, 역시 낮익지만 쉽게 친해지긴 어려운 철학적 개념들 사이에 본격적인 비교/분석이 펼쳐진다.
'뭐 이런 걸 가지고 따지고 그러세요.' 라든지, '그렇다 한들 실생활에서 이런 개념을 인지하고 써먹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라는 볼멘소리가 불쑥 입밖으로 튀어나오려 할 즈음, 그는 꽤 근사한 설명을 통해 학습동기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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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행들과 제도들은 이론의 구현이다. 따라서 정치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론과 연관되는 것이다. 정치철학의 궁극적인 문제들, 즉 정의와 가치, 좋은 삶의 본질과 관련된 문제들에는 불확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다. 바로 항상 '모종의' 답에 따라 살아간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행과 제도에 내재된 정치철학은 무엇인가? 그것이 어떻게 철학으로서 유지되고 있는가? 그리고 현재의 정치 상황에서 그러한 정치철학의 불안 요소들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오직 하나의 정답을 모색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반면 우리는 '하나의 답'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답에 따라 살아간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답이 여러 개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일종의 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답을 허용하는 정치이론이 바로 내가 탐구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p.175~176; 관행과 제도에 내재된 정치철학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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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딱 절반쯤, 위의 인용문이 포함된 8장章 23페이지 분량의 내용은 알쏭달쏭한 개념들에 지쳐갈 무렵 다시금 눈을 번뜩 뜨이게 만드는 부분인데, '옮음과 좋음'이라든지 '정의와 공동체' 등 자주 언급되는 마이클 샌델의 논제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마침 알라딘 '로쟈'님의 서재에서 이 챕터와 책에 대해 언급한 글을 발견하여 반가움에 링크를 걸어둔다. 언급된 영어 원문은 여기로. 놀랍게도 1984년에 쓴 글이다.)
일견 엇비슷한 개념과 이론들에 대해 날카롭게 그 차이점을 도려내고 그 사이에서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걸어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작업들은 해당 분야 전공이 아닌 독자에게 몇 번이나 앞 뒤를 들쳐보는 독서를 요구한다. 그런데, 마이클 샌델 자신은 그런 단락에서 오히려 신나게 글을 써내려 갔을 것 같아 그의 미소짓는 얼굴이 자꾸만 오버랩되니 참으로 묘한 기분.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것은 존 롤스와 그의 <정의론>이다.
이 책 2부의 절반은 아예 롤스가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언젠가 '불의에 맞서는 정의'쯤으로 가볍게 집어 들었다가 생뚱맞은 사고실험(!)과 겹겹이 둘러싸인 이론에 질겁을 하게 만들었던 그의 <정의론>. 고작 '무지의 베일'이나 대충 주워담을 정도이지만 그나마 이 이론이 친숙하게라도 느껴지게 된 것은 김영사 지식인마을 <정의로운 삶의 조건> 이래 <정의>와 이 책의 덕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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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5년 옥스퍼드 대학원을 다닐 때 처음으로 <정의론>을 읽었고 그의 책은 나의 논문 주제가 되었다. 이후 나는 자유주의에 관한 그 위대한 저서의 주인을 만나지도 못한 채 하버드대 정치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다. 그런데 하버드에 도착하자마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선 반대편에서 주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 존 롤스, R-A-W-L-S입니다." 신께서 몸소 전화를 걸어 점심을 함께 먹자고 말하면서 자신이 누군지 모를까봐 자기 이름의 철자를 일일이 말해주는 것에 버금가는 상황이었다. (p.266~267; 롤스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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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께서 몸소 전화를 걸어'라고 했지만, 주지하다시피 마이클 샌델은 롤스의 추종자가 아니었다. "옮음(권리)이 좋음(선)에 우선한다"는 롤스의 주장 하나만 가지고도 그는 롤스의 '자유주의'와 견해를 달리하는 소위 '공동체주의'의 편에 서 있다. 그의 명성이 롤스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일정 부분 얻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떤 식으로건 롤스와 대립각을 세우며 반목하는 관계는 아니었을까 하는 섣부른 짐작도 해봄직하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롤스의 이론을 다각도로 비교 분석하고, 미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나 개인적 추억을 회상하는 모습에서는 오히려 해당 분야의 대선배에게 바치는 은근한 존경의 마음이 내비치어 신선한 느낌이었다. 견해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정당한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모습을 본다는 게 그리 흔치 않다는 새삼스런 발견도 함께.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1830년대에 "문명세계에서 미국만큼 철학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나라는 없다"(p.266)고 했다지만, 역시 그에 못지않게 철학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한 한국을 돌아보면 인물과 상황에 대한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온갖 뭐뭐 '~주의'로 뒤범벅 되어 있던 롤스 고개를 넘어와 책 후반의 3부 [자유와 공동체를 말하다]에 다다르면,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제-정치-시민사회가 직조해낸 미국의 '민주주의'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본주의와 경제 논리에 침식당해 자유와 도덕적 가치를 위협받고 있는 시민과 공동체의 현실... 결국 마이클 샌델이 다시 역설하는 것은 글로벌 경제 시대의 민주주의를 떠받칠 수 있는 '시민의식'의 회복이다. 그럼 무엇을 통해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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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민주정치는 이웃에서 국가,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실천할 수 있는 정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애매모호한 통치권에 저항하고 다중적인 연고적 자아로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민들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에 특히 두드러지는 시민 덕성은 때로는 주어진 의무를 수용하고 때로는 저항하면서 자신의 길을 협상하고,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다. (p.303~304; 시민의식은 과연 회복될 수 있는가 - 시민생활 회복을 위한 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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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시민의식이 정치철학과 맞물려 운용될 수 있는 공간은 현대 사회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가 아니라 도덕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community)'로 제시되고 있다.
그의 책에서 반복적으로 접했지만 아직도 왠지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공동체'라는 용어. 미국이 연방정부 체제라서 그런가 싶다가도, 식민지 시대와 6.25 전쟁,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거치는 동안 '전통적인 공동체' 개념을 고작 '옛날엔 그랬었지' 내지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된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면 미국의 사례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진다. 신자유주의도 일종의 정치철학(?)인양 '미국 무작정 따라하기'에 빠져있는 어느 '국가공동체'의 현실이 어느새 1부 내용들과 자꾸만 교차 편집되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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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와 상업주의가 지나치게 뒤섞이는 현상은 우려의 수준이다. 정치와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커지면 정부 관리들은 대중문화와 광고, 오락 등을 이용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를 높이려 애쓰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처럼 위장된 권위가 실패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확실하게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중략) 하지만 국민은 고객이 아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단순히 국민들에게 원하는 것을 제공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올바르게 시행된 정치는, 국민들이 자신의 욕구를 되돌아보고 그것이 올바른지 판단한 후 그 욕구를 수정하도록 이끈다. 고객과 달리 국민은 때로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희생시키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정치와 상업의 차이점이며 애국심과 브랜드 충성도의 차이이다. (P.40~42; 공공기관이 상업화돼가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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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0일, 경희대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개인 메모)
- 경제를 우선시하면 윤리, 정의, 도덕과 같은 의미있는 주제들이 잘 다루어지지 못한다.
- 도덕적 질문들이 정치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시장과 정부의 역할을 그들에게 맡겨두면 안된다. 시민참여가 필요하다.
정의에 위배되는 결정이 내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을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 삶을 통제하려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 하나의 획일적 정체성을 설정하기 보다는,
구체적인 생활터전 속에서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 고민해보야야 한다.
- 적극적이고 건전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시민들이 서로 다른 신념을 들어주고 대화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이미 2005년에 펴낸 에서도 이런 생각은 고스란히 결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언급된 수많은 '뭐뭐' 주의와 개념들이 분명 생각의 방향과 범위를 넓혀주지만, 이러한 기본적 뼈대를 숙지하고 그의 글을 읽어가는 것이 쉽지 않은 철학적 개념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을 최소한의 지표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가져보게 된다.
재미난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때와 마찬가지로 <왜 도덕인가?>라는 한국판 제목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또 하나의 '메시지'처럼 슬그머니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 ← 원제
<왜 도덕인가?> ← 원제
아마 이번에도 미처 내용을 챙겨 읽지 않은 사람들까지 제목에 자극을 받아 '왜 지금 도덕을 이야기할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 되먹여보고 있지 않을까?
<정의>가 안겨준 독서체험과 말로만 듣던 하버드 명강의가 만족스럽긴 했지만, 마이클 샌델이나 그의 저작들에 막연히 열광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 열광이 원서 제목에 덧붙여 창작된 '번역본 제목'에 어느 정도 힘입은 것이라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 등 이 책들이 펼쳐놓은 다양한 정치철학의 세계에 빠져들어 그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해보는 것은 분명 색다른 체험이다. 그러나 '가정'과 '조건'에 의해 다양한 견해차가 곁가지로 뻗어가는 '개념'들에 휩쓸린 나머지, 그가 몇 년째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공동체의 위기'나 시민 각자의 자발적 고민, 그리고 여러 가지 답을 허용하는 열린 대화의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책 제목이 건드려놓은 '정의'와 '도덕'에 대해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과 '공동체적 관심'이 한데 모여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가만히 빌어본다.
책을 덮으면, 이제 스스로 생각을 해보아야 할 시간이다.
평화의 전당 앞, 내한 강연 직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