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발자크 소설은 위험한 금서일까?

   프랑스에서 영화감독이자 소설가로 활동 중인 다이 시지에는 1954년 중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지목돼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산골에서 재교육을 받았고,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대학에서 예술사를 공부하다가 1984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후 그는 프랑스에서 영화를 찍고, 소설을 쓰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는 이런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로, '하늘긴꼬리닭'이라 불리는 산골마을로 재교육을 받으러 온 두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1968년 말,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이자 혁명의 기수인 마오쩌둥 주석은 나라를 일대 변혁하는 운동'(13쪽)을 벌였습니다. 모든 대학이 문을 닫고 '젊은 지식인들', 다시 말해 중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재교육을 받기 위해 농촌으로 추방되었습니다. '나'와 '뤄'는  이제 겨우 중학 3년 과정을 마쳤지만 그들의 부모가 '인민의 적'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젊은 지식인들'과 함께 재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지은 죄는 의료업에 종사했고, 중국 전체에 이름이 알려진 위대한 치과의사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부모가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남들보다 더 부유하게 지낼 수는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나쁜 짓을 하며 번 돈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자본의 논리일 뿐인데, 마오쩌둥에게 이런 논리가 통할 리 없습니다.

   당시 젊은 지식인들이 받았던 '재교육'은 말이 '가난한 농민들에게 받는 교육'이지 사실은 중노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펜만 잡고 있던 사람이 재교육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들에게 붙여진 '죄'의 명목과 재교육 기간입니다. 단지 의사 부모님을 뒀다는 이유로 재교육을 받게 된 '나'와 '뤄', 게다가 그들의 부모가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았던 탓에 그들의 재교육은 끝나는 날을 기약할 수 조차 없습니다. 이제 겨우 '뤄'는 열여덟, '나'는 열일곱인데 말입니다.

   다행히도 '뤄'와 '나'는 하늘긴꼬리닭 마을에서 재교육을 받으면서 그들만의 장기를 발견해 냅니다. 그들에게는, 특히 '뤄'에게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좋아했던 촌장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한달에 한 번씩 영화가 상영되는 소도시로 그들을 보내 영화를 보고 오게 했습니다.

   어느날 '뤄'와 '나'는 바지 길이를 늘이기 위해 그 산골마을에 딱 한 명 있었던 재봉사의 집을 찾습니다. 마침 재봉사는 출장을 떠났고 그의 딸이 대신 바지 길이를 수선해 줍니다. '바느질 처녀'를 처음 본 '뤄'는 그녀를 이 산골의 공주라 불렀습니다. 비록 도시 소녀들처럼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그 산골에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뤄'와 '나'에게는 시인 부모님을 둔 '안경잡이'라는 고향친구가 있었는데, 그 역시 옆마을에서 재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안경잡이'에게는 비밀가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가방 안에 '금서'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 '뤄'와 '나'는 곤경에 빠진 '안경잡이'를 도와준 대가로 책 한 권을 받아냅니다. '안경잡이'가 건넨 책은 발자크의 『위르쉴 미루에』였고, 그 책은 두 소년이 알지 못했던 세계를 보여줍니다.


   뤄는 '안경잡이'가 책을 준 그날 밤부터 그 책을 읽기 시작해서 새벽녘까지 모두 읽어치웠다. 책을 다 읽은 그는 남폿불을 끄고는 나를 깨워 책을 내밀었다. 나는 밥을 먹지 않고 밤이 이슥하도록 사랑과 기적으로 가득한 프랑스 이야기에 푹 빠져,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보냈다.

   아직 청춘의 혼돈상태에 빠져 있는 열아홉의 숫총각이 애국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운동에 관한 혁명적 장광설밖에 모른다고 생각해보라. 그런데 갑자기 그 작은 책은 침입자처럼 나에게 욕망과 열정과 충동과 사랑에 눈을 뜨라고 말하면서, 그때까지 고지식한 벙어리에 지나지 않던 내게 세상에서 벌엊는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80~81쪽)


   '바느질 처녀'와 사랑에 빠진 '뤄'는 '바느질 처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는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점퍼 안쪽에 옮겨 적습니다. 책을 통해 사랑과 세계에 눈을 뜬 그들은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재교육이 끝나 마을을 떠나는 '안경잡이'의 책들을 훔칩니다. 그들은 열심히 읽었고, '뤄'는 열심히 '바느질 처녀'에게 책을 들려줍니다. '뤄'는 책을 통해 바느질 처녀를 딴사람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이 책들로 나는 바느질 처녀를 딴사람으로 만들어놓겠다. 그애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산골처녀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140쪽)

  

   '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바느질 소녀'는 어느날 도시 처녀처럼 브래지어를 만들어 입고, 시장에서 구한 새하얀 테니스 운동화를 신고 산골마을을 떠납니다. '바느질 처녀'는 마지막 말을 남긴채 그렇게 그들 곁을 떠납니다. '뤄'가 원했던 것처럼 '바느질 처녀'는 더이상 순수한 산골처녀가 아닙니다.


   "발자크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걸." (252쪽)


   '나'와 '뤄', '바느질 처녀'는 발자크의 소설들을 통해 마오쩌둥과 중국 사회가 그토록 숨기고자 했던 세계의 참모습과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나'와 '뤄'는 재교육에 발목이 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바느질 처녀'는 자유롭게 떠납니다. '발자크식 재교육'(245쪽)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아름다움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합니다. 우리도 '바느질 처녀'처럼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책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만날 수 있을까요? 벌써 몇 번째 읽고 있는 책인데,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아직 만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만나기 힘들거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바느질 처녀'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와 매체들이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