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나라 쿠파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고양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지배하는 자와 지배 당하는 자의 이야기! 

 

   *에서 *까지는 스포일러가 담겨 있으니, 『밤의 나라 쿠파』를 읽을 계획인 분들은 이 부분 피해서 읽으시면 됩니다. 단, 이 부분에 이 소설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봐." 나는 톰이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향해 말했다. 고양이에게 말은 건다는 자체가 현기증 나는 사태였지만 어쩔 수 었었다. (p.18)

 

   정신을 차려 보니 가슴 위에 회색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생긴 것은 나도 분명 잘 아는 고양이 모양이었으나 '세상에 이런 고양이가 다 있다니.' 하고 멍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거치적거리니까 치워 버리려고, 엄밀히는 손가락으로 툭 튕겨 내는 식으로 밀쳐 버리고 싶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훅 불어 버리려고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 고양이가 "잠깐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는데." 하고 목소리를 내다니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p.20~21)

 

   말하는 회색 고양이, 게다가 이름이 '톰'이라니. 주인공 '나' 뿐아니라 우리 모두 이 고양이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떠오르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죠. 우유를 주면 맛있게 먹고, 간지럼을 태우면 까르르 웃을 것 같은 이 고양이가 나쓰메 소세키의 '그 고양이'처럼 '나'에게 시크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이죠.

 

 

 

   "얘기 좀 들어줘."

   고양이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사는 나라에 갑자기 많은 일이 일어났어."

   "놀던 공원이라도 철거됐니?"

   "공원? 그게 뭐냐."

   고양이는 말했다.

   "전쟁이 끝났거든. 끝나서 지배를 받게 되었어."

   "전쟁? 전쟁이라니 그 전쟁?"

   "그 전쟁이라는 게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전쟁이 전쟁이지."

   "고양이가 전쟁을 한다고?"

   "아니."

   그는 내 가슴 위에 오도카니 앉은 채 털을 다듬었다. 정교한 장난감을 보는 기분이었다.

   "전쟁을 한 건 인간이야. 우리는 상관없어. 다만 같은 장소에 사니까 영향은 받아. 아, 그렇지. 너는 철국 인간이냐."

   "그런 나라는 모르는데."

   "우리 나라가 전쟁을 하던 게 철국이라는 옆 나라였거든."

   고양이는 말했다.

   "그 철국이라는 나라가 지배를 하러 왔다는 거야?"

   "맞아. 며칠 전에. 우리 마을에 와서 칸토를 죽였어." (p.23~24)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나'는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취미로 도피하기 위해 센다이 항구에서 나룻배를 타고 혼자 낚시를 하기 위해 바다로 향한다. 출발할 때는 분명 날씨가 좋았는데, 이내 파도가 거칠어지면서 낚시배가 뒤집히고 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풀숲에서 덩굴로 꽁꽁 묶여 있는 상태였고,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고양이와 말을 하고 있다는 자체도 당황스러운데, 이 고양이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더 당황스럽습니다. 예전에 인간들이 전쟁을 하긴 했지만, 그것 벌써 아주 오래 전에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철국이라는 나라가 마을을 지배하러 왔다니요. 도대체 '톰'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톰'은 쿠파의 병사 이야기도 들려 줍니다. 100년 전부터 마을 젊은이들이 숲에 살고 있는 쿠파를 무찌르기 위해 복안 대장과 함께 마을을 떠났는데, 해마다 복안 대장만 마을로 다시 돌아오고 쿠파의 병사들은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쿠파를 무찌른 병사들은 투명해지고, 마을에 위기가 생기면 도와주기 위해 언젠가는 돌아와 줄거라고 믿고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그 마을 사람들은 총도, 말도 모른다라고 합니다. 그 마을을 지배하러 온 나라 이름도 '철국'이라니, 도대체 '톰'은 어느 시대에서 온 걸까요?

   그저 '톰'의 상상이라고 하기엔 이야기가 디테일하고, '톰'도 매우 진지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인 '나'에게 마을 사람들을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그저 공무원일 뿐인 '나'에게 무슨 능력이 있다고 이런 부탁까지 하는 걸까요?

 

   고양이 '톰'의 이야기만큼이나 묘한 소설입니다. 그저 소설이라 생각하며 읽었는데, 인간 세상을 지켜보고 있는 고양이들이 등장해서 마치 우화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읽은듯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고양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나쓰메 소세키의 '그 고양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그 고양이'라고 부릅니다 ─가 떠오르기도 하고, 이름이 '톰'이라는 것과 생김새를 보면 한때 유행했던 '말하는 고양이 톰'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 그리고 평범한 인간인 '나'에게 톰이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이유의 비밀은 『걸리버 여행기』에 있습니다. 걸리버가 표류하다가 도착한 소인국에서, 걸리버 역시 묶인 채로 눈을 뜨게 됩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톰'이 덩굴로 '나'를 꽁꽁 묶어 뒀던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 '톰'을 발견하고 '나'는 손가락으로 툭 튕겨 내거나 훅 불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정교한 장난감을 보는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톰'이 '나'에게 마을 사람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톰'의 몸집을 보고 마을 사람들의 몸집을 어느 정도 짐작한 '나'는 '톰'과 함께 마을로 향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이사카 고타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일까요? 작가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를 당하는 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배하는 자는 자신이 좀 더 쉽게 지배하기 위해, 자신의 지배가 타당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 지배를 당하는 자들에게 진실을 숨기고 정보를 차단합니다. 처음부터 '쿠파'라는 건 없었습니다. 그저 마을을 지배하고 있던 '칸토'가 계속 지배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죠. 아니 '칸토'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꾸며낸 이야기죠. 마을 사람들과 복안 대장의 대화 속에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아마 100년 전 전쟁에서 졌을 때 그런 조건으로 결착이 지어졌을 거야."

   "그런 조건?"

   "해마다 이쪽에서 광석을 캘 인부를 보내겠다. 그 대신 어느 정도 자치를 인정해 달라고 말이야."

   "칸토가? 아, 아니랬죠. 그 전쟁이 끝났을 당시의 이쪽 나라 국왕이 그런 제안을 했다는 거군요."

   "그것밖에 길이 없었을 테지. 그리고 그 약속대로 이 나라에서는 해마다 몇 명씩을 철국에 보냈어. 다만 국왕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았다. 이유는 무엇이겠나"

   "일을 하러 철국에 가는 거라고 하면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인가." 이이오가 질문을 던졌다.

   "그것도 있겠지. 하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가는 자기들 몸이 위험해질 거라고 생각한 게 더 컸을 거야." 복안 대장은 오른쪽 눈을 덮은 천을 만졌다.

   "국왕이 위험해져?"

   "이 나라는 쭉 같은 집안이 국왕이 되어 왔어. 뒤집어 보면 국왕이라는 근거는 '대대로 이어져 왔으니까' 하나밖에 없는 거야. 능력은 상관이 없지. 따라서 국왕인 자기들이 철국에 굽실거리는 한심한 인간인 줄 안 순간, 그 자리에서 끌려 내려올 거라는 불안을 안게 됐더라도 이상할게 없어. 자기들 입장이 위태로워질 거라고 생각하고. 중요한 것은 진실을 전하는 것보다 위엄을 지키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야."

   그게 그렇게 되나요?" 겐은 감이 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국왕들은 쿠파의 존재를 퍼뜨리고 병사 파견을 시작했어. 옛날에 칸토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지.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비결을 아느냐고."

   "비결 같은 게 있습니까."

   "그 남자가 말하기에는."

   "바깥에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적을 준비하는 거다.'라고, 그렇게 말했어."

   "적을 준비한다?"

   "그래 놓고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는 거라고. '걱정 마라. 내가 너희를 그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겠다.'라고 말이야. 그러면 모두가 자신을 의지하고 반항하는 인간은 줄어든다. 칸토는 그렇게 말했어."

   "칸토가 그런 말을."

   "그 남자는 머리에 그런 생각밖에 들어 있지 않았어. 뭐 그런 이유에서 이 나라 바깥에 무시무시한 적을 꾸며 내기로 한 거야."

   "그게." 겐이 멈칫거리며 말했다. "쿠파입니까?"

   "그래, 그게 바로 쿠파다." (p.447~449) *

 

   '나'처럼 '톰'의 이야기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책을 읽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분명 현실을 지적하고 있지만, 아닌 척 고양이의 입을 빌려 전하는 것. 이게 바로 이 소설의 매력이자 이사카 고타로의 매력이 아닐까요?

 

   "누구든 자기보다 작은 존재에 관해서는 의식이 흐려지기 마련인지도 몰라. 배짱을 부리자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우리도 너희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누구나 자기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p217~2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