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진 한 여자가 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연하의 유부남이고, 외교관으로 잠시 파리에 머물고 있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그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언제올지 몰라 하루종일 전화 앞에서 기다리고,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과 함께인 그를 상상하며 기다린다. 그러나 그 사랑의 끝은 이미 예정돼 있다. 그에게는 돌아가야 할 아내가 있고, 돌아가야 할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고, 그녀는 여전히 파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를 기다리면서 그녀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무언가에 대해 열정을 가지려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아야 한다. 그 열정을 가지기 위해서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 이유가 사라질 즈음이면 열정 또한 사그라들 것이다. 열정은 단순할 수 밖에 없다.
   특별한 사건도 반전도 없고, 그저 짧고 단순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야기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이야기가 바로 작가인 아니 에르노가 겪은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겪지 않은 것은 글로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아무리 우리보다 자유분방한 프랑스라고 할지라도 그런 위치에서 유부남과의 불륜을 글로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꾸밈없이 솔직하게 쓰고 있다. 혹시 그녀가 부끄러움을 모르는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녀는 늘 자신의 이야기를 써왔고, 『부끄러움』이라는 또다른 작품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기억, 어머니의 치매, 연인과의 이별 등을 모두 부끄러움이라 말하고 있다. 그녀가 이 모든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썼기 때문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유장한 스토리텔러는 아니다. 자신에게 닥친 사건에 대한 느낌을 대못 박듯 한 단락 한 단락 끊어 쓰기에 능한 작가다. 이야기 대신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행동보다 내면 독백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나와 정반대 스타일의 작가인 에르노에게서 두 가지 큰 배움을 얻었다.  

   하나는 정직이다. 에르노는 자신의 체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도덕이나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넘어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을 찔러 댄다. (중략)  

   또 하나는 침묵이다. 에르노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하지 않는다. 단락과 단락 사이에는 긴 여백이 있다. 그 여백을 단순히 말없음으로 받아들이고 건너뛰면 에르노 소설의 참맛을 느끼기 어렵다.  

─ 김탁환, 『김탁확의 독서열전 : 뒤적뒤적 끼적기적』 中   

   소설가 김탁환은 자신의 책에서 아니 에르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스무살 시절, 사랑의 상처로 비틀거릴 때 그는 아니 에르노를 읽었다. 나 또한 비슷한 시기에 아니 에르노를 처음 만났다. 아니 에르노와의 첫 만남이 궁금해 오래전 썼던 글을 찾아 읽었다. 신기하게도 스무살 시절에 아니 에르노를 만났던 김탁환 작가와 나는 같은 판본의 책을 읽었고, 비슷한 느낌들을 가졌었다. 왜일까? 그 시절에는 누구나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단순한 열정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려 본다.  

09-28. 『단순한 열정』 2009/03/13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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