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의 거짓말
제수알도 부팔리노 지음, 이승수 옮김 / 이레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아마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사회 교과서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데카메론』이 있다는 것을 보고, 교과서에 등장하는 책이니 당연히 좋은 책일거라고 생각하며 당장 서점으로 달려갔다. 흑사병을 피해 모인 남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과연 죽음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그들이 할 이야기가 그것 밖에 없었을까? 고민 끝에 국어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선생님께서도 놀란 눈치셨고, 그때부터 난 선생님들 사이에서 책을 읽는 학생으로 유명해졌다.
   그 덕분인지 내용과는 상관없이 『데카메론』은 내게 잊을 수 없는 책이 됐다. 그 『데카메론』을 제수알도 부팔리노가 변주를 했다고 하니, 어찌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작품이 이탈리아 최고의 문학상인 스트레가 상 후보에 오르자 감히 겨룰 수 없다하여 다른 후보들이 전원 자진 사퇴까지 했다고 하지 않는가.
 
목숨 vs 신념, 그들은 무엇을 지킬 것인가?
   내일이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네 명의 남자가 있다. 그들은 각각 남작, 시인, 병사, 학생으로 신분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불멸의 신'의 이름으로 반역을 꾀한 자들이다. '총잡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령관은 밝혀지지 않은 반역의 주동자 '불멸의 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그들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내일 아침, 그들 중 한명이라도 '불멸의 신'의 이름을 적어낸 사람이 있으면 그들 모두를 살려준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사실 사형 집행이 코 앞에 다가오면 아무리 악랄한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죄를 실토하거나 반성한다고 한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고백의 대가로 생명까지 주어지지 않는가?
   그들은 다음날 자신들과 함께 처형될 또 한명의 반역자와 함께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된다. 그의 별명은 '수도승'이지만 악랄한 일을 수도 없이 저지른 사람이다. 다섯 사람은 마지막 밤을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며 보내기로 한다. 사랑하는 여인의 남편이 탈출하도록 돕다가 오히려 그 죄를 뒤집어 쓴 사람, 결투에서 죽은 동생 대신 동생의 행세를 하며 살고 있다는 남작, 자신의 어머니를 범해 원치 않게도 자신이 태어나도록 만든 남자를 죽인 병사,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이 산적에게 유린 당하고 그것을 본 아들이 자살하는 것을 목격한 시인.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 혹은 삶을 부정한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약속된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수도사는 그들의 이야기만을 듣고 있다. 쪽지에는 아무도 '불멸의 신'의 이름을 적지 않았지만, 얼떨결에 '불멸의 신'을 언급하고야 만다. 그제서야 수도사는 정체를 드러낸다. 그는 바로 '총잡이' 사령관이었던 것이다. 약속대로 쪽지에 이름을 적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처형된다. 과연 신념을 지키려고 했던 그들은 패배자이고 교활한 계략을 썼던 '총잡이'가 승리자일까?
   그들이 처형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총잡이'는 비로소 그들이 승리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날밤 그들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들이 '불멸의 신'이라고 언급한 사람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불멸의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상의 인물을 설정한 다음 존재한다고 믿게해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과연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자 했을까? 아마 이 한문장으로 그 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 인간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실제인가 가짜인가? 종이로 만든 허구, 신의 모습을 닮은 허상, 재로 만든 팬터마임 무대에 등장한 실재하지 않는 존재, 적의를 품은 마술사가 빨대로 불어대는 비눗방울?
   그렇다면 진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짜가 아무것도 없다면, 모든 것은 제로, 아무것도 나올 수 없는 제로입니다. 우리 모두 진위불명입니다. (p.251)


2008/09/14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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