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사람을 분석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단 몇 마디만을 나누고도 분석이 가능한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일단 한번 분석하면 상대를 그 분석틀 안에 가둬두고 대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고정관념이라고나 할까. 그를 좋아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그 분석이 나름 정확하다는 것이다. 몇 십년을 함께해 온 나 자신조차 나를 잘 모르는데, 단지 몇 마디만으로 타인에게 나를 정의 내릴 기회를 주다니.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열두살 소녀의 세상 엿보기! 
  『새의 선물』은 주인공이 1995년에 발사되고 있는 무궁화호를 보며 아폴로 11호가 발사됐던 1969년을 떠올리는 액자소설 형식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는 1969년의 열두살 소녀 진희다. 과연 열두살 소녀가 1969년을 얼마만큼 잘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그런 우려는 접어두어도 된다. 
   진희는 자기 삶과의 거리를 유지할 줄 아는 아이다.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켜 '보여지는 나'에게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그렇게 진희는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며 살았다.(p.12) 덕분에 타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날카로운 시선을 가지게 됐다.
   이제 겨우 열두살일 뿐인데 유난히 조숙한 진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진희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할머니, 이모, 삼촌과 함께 살고 있다. 진희의 아버지는 어느날 사라져버렸고, 세 살된 진희를 묶어놓고 집을 나간 진희의 엄마는 정신병원에서 자살했다. 분명 진희의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법한데도 부모의 부재 이전이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진희가 또래보다 조숙한 것은 부모의 부재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더 어린 아이같은 이모를 보며 지금까지 아무런 시련을 겪지 않아서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희네는 마당 안족으로 들어앉은 살림집 두 채와 대문 쪽에 자리잡은 가겟집 한 채까지, 세 채의 집으로 되어 있다. 살림집에 세들어 살고 있는 장군이네는 하숙을 쳐 두 명의 선생님도 함께 살고 있다. 가겟집 네 칸에는 뉴스타일양장점, 광진테라, 우리미장원, 문화사진관이 세들어 살고 있고 이 세 채의 집 한가운데에 우물이 있다. 덕분에 진희는 우물 곁에만 있어도 많은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고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어린 진희를 그다지 경계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비밀 하나쯤 알아내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이 우물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 이상의 비밀 혹은 아픔를 간직하고 있다. 물론 아무런 아픔도 없었던 이모 또한 나중에는 여러 개의 아픔을 겪으며 성장하게 된다. 
   그해 겨울, 그 우물가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진희는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 그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바로 그가 사라졌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 그 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p.20~21)


새가 남기고 간 선물은 무엇일까요?
   『새의 선물』은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으로 출품 당시의 제목은 "연애대위법"이었으나, 당선 후 '진부하고 딱딱한 제목이라 역설과 희극성이 담긴 내용이 가려질 수 있다'하여 수정했다고 한다. 만약 그 평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나같은 독자에겐 영원히 외면당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고 왜 "새의 선물"이 되었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정확한 답은 모르겠지만, 아마 진희가 그 새가 아닐까? 새는 보금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진희도 가족이 있는 보금자리를 찾아 할머니 집으로, 아버지 집으로 옮겨 다닌다. 그리고 1969년의 정취가 물씬 베어나오는 이 이야기가 그 선물이 아닐까?
  사실 열두살 소녀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그 묘사가 너무나도 정확하다. 시대 묘사는 제쳐두더라도 어른들의 내면 묘사까지 뛰어나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그토록 와닿았던 것은 바로 뛰어난 묘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열두살 소녀가 어른들의 내면을 너무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어서 부자연스럽다고도 했지만, 어차피 서른이 넘은 주인공의 회상이니 그것이 개입됐다고 여기면 될 것이다.

   진희를 보고 있으면 내가 아는 또다른 소년이 떠오른다. 바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 등장하는 아홉살 소년 모모다. 역시 부모가 없는 모모 또한 세상 사람들을 통해 삶의 비밀을 알아낸다. 또래보다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진희와 모모, 두 소년 소녀에게 서로를 소개시켜줘야겠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p.224)

아줌마처럼 강인한 사람은 아무리 힘든 삶이라도 자기가 익히 아는 일은 어떻게든 이겨나갈 자신이 있다. 그러나 새롭게 닥쳐올 일에 대해서는 불안하고 자신이 없다. 그것이 아줌마처럼 자기 생에 대한 의지는 강하되 자기 생을 분석할 줄 모르는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p.241)

대부분의 어른들은 모험심이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자기의 삶이라고 믿고 견디는 쪽을 택한다. 특히 여자의 경우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배후에는 '팔자소관'이라는 체념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체념은 여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연히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불행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p.245~246)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p.363)

 
   

2008/08/23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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